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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 7. 16  

오늘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입니다. 워낙 유명인이라 마키아벨리와 그의 저작/주장을 제대로 본 적도 없는데도 아주 잘 알고 있는 것같은 착각을 일으키는 사람이죠. 

마키아벨리를 통해서 이제 근대라는 새로운 세계로 들어서는 그런 의미가 있다고 하네요. 신아래, 봉건시대의 체계를 무시하고 새로운 체계를 주장했으니 그리고 그 이후 세상의 체계가 바뀌기 시작했으니 일면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마키아벨리의 시대는 신의 영역하의 질서체계에서 인간이 중심이 되는 새로운 질서체계로의 전환이 이루어지는 대전환기입니다. 이 전환기에 <군주론>은 작성되었고 그 서막을 알리는 신호탄입니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후의 소개된 고전을 통해 우리는 마키아벨리 이후에 형성된, 고대 세계와는 전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데, 이세계는 어떻게 생겨났으며 지금은 어떤 모습은 띠고 있는지, 그것의 한계는 무엇인지를 집중해서 살펴보아야 한다고 저자는 소개함니다. 

<군주론>은 헌정사와 26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핵심어를 중심으로 구분한다면 신생군주국, 자국군, 설득력을 기준으로 크게 3개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는 무력과 설득력을 갖추어야 한가고 주장하고요. 무력(물리력)과 설득력의 경계가 모호하며 그것들이 서로 맞물려 돌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이 군주의 "역량"이라고 말합니다. 특정한 역사적 국면에서 제도적인 물리력과 이데올로기적인 설득력을 장악하고 있을 때 헤게모니를 쥐고 있다고 하는데, 마키아벨리에 따르면 특정한 역사적 국면(장소와 시간)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한 자만이 군주가 될 수 있다고 합니다. 군주에게 필요한 것은 이러한 역량입니다. 결국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방법이 <군주론>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고대 세계의 플라톤은 통치자가 지혜를 갖추어야 한다고 했는데, 근대 세계의 마키아벨리는 통치자가 기개를 갖추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가장 훌륭한 군주는 "새로운 군주"라고 하는데 "새로운 군주"는 모든것을 자기 혼자 힘으로 쟁취하는 군주라고 합니다.아마도 기존에 물려받는 , 선택되어 모든 권력과 부를 갖는 통치자, 회장님이 아니라 본인의 능력과 노력으로 성취해야 한다는 얘기가 아닐까요? 

군주를 몰락시키는 것은 미움과 경멸인데 이것을 피하기 위해 군주는 물리력과 설득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여기서 물리력(무력)은 폭력이 아닙니다. 전 물리력(무력)을 강인함, 실력, 의지 등으로 해석하고요. 설득력은 소통, 이해(하기, 되기), 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마키아벨리하면 무지막지한 통치술을 주장한 사람으로 이해하기 쉬운데 꼭 그런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구시대의 끝자락에서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통치술을 주장했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용어의 의미가 500여년의 간극으로 우리의 이해와 다소 다르다고 생각됩니다. 어째든 이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질서가 바뀌어야 함을 얘기합니다. 그것에 의미가 있겠네요. 그리고 지금도 계속해서 우리에게 메시지를 던져 주고요.

ps. 

새로운 질서체계를 얘기하지도 만들지도 못하면서 그놈의 일방통행과 폭력(가혹행위는 있으나 고문은 없고, 방패질과 군화발은 있으나 총/칼은 없고, 무지막지한 고소,소송은 있으나 법과 정의의 승리는 없는)은 난무하네요. 우린 지난 10년간 맛보지 못한 신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구시대는 지나가면 오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역사는 돌고 돕니다. 아! 지겨운 신시대. 언제 또다른 새로운 시대가 오려나. 

누가 그랬습니다. 그 사람들이 다 오른쪽에 있어서 그사람 왼편에 서 있으면 다 좌빨이 된다고... 어디까지 달려가 서 있어야 우빨이 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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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7월 14일  

오늘은 단테의 '신곡'입니다. 제목은 절대자와의 만남. 신곡입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절대자의 만남과 그 여행을 통해 단테가 범상치 않는 인물로 새롭게 태어나는 내용입니다. 

이글을 보면서 새삼 저의 무식함을 깨닫게 되었네요. 단테가 1300년을 전후해서 살다 간 사람이네요. 전 지금까지 1500년대 인물로 알고 있었는데요. 후~. 그리고 베아드리체가 여기도 나오네요. 역시 사람은 많이 읽고 많이 보고 많이 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느끼네요. 

단테의 '신곡'은 인간의 영원한 것에 대한 소망을 담고 있다고 합니다. 신의 경지이든, 관조적 경지인듯 인간이 꿈꾸는 최고의 경지이겠지요. 단테는 기독교인이었을 감안하면 신의 경지는 아니고 그 아래 단계의 경건한 수도자적인 삶 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신곡'은 지옥편, 연옥편, 천국편으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저자에 의하면 단테의 이 구분방식 말고 단테가 안내자들과 만나고 헤어지는 지점에 따라 구성을 나눌 수도 있다고 하네요. 베르길리우스가 안내하는 지옥편1~34곡과 연옥편 1~29곡, 베아트리체가 안내하는 연옥편 30곡~천국편 30곡 그리고 베르나르두스가 안내하는 천국편 31~33곡으로 구분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 대한 기초적 지식이 '신곡'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지옥에서 연옥 그리고 천국으로 이어지는 단테의 여행을 따라가면서 사실 별다른 느낌을 받지 못했습니다. 저자의 해석이 그나마 곁들여져 있지 않았다면 이 책에 소개된 몇곡의 시도 다 읽지 못했을 겁니다. 단지, 천국까지 이르는 단계가 단테를 기존의 평범한 인간에서  새로운 경지의 인간으로 성장시키고 있구나 하는 정도의 느낌만 받았네요. 그 과정에 별로 공감을 갖지도 못했구요. 

단테가 기독교인일 거라는  선입견때문에 그런지 단테가 추구한 경지라는 것이 절대자(신)의 테두리 안에서의 성장과 보호에 만족하는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 인간으로서의 치열한 고뇌와 성장을 통해 높은 경지의 수준에 도달하고 이상적인 모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신의 존재, 그 한계에서 성장을 얘기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이것이 무슨 차이가 있는지 잘 모르겠네요. 차이가 있는 것인지, 없는것인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아리스토텔레스의 '안티고네'에서 쭉 이어지던 이상에 대한 욕망,절대수준에 도달하고자 하는 욕구과 같은 것들에 대한 고민/사상을 접하는 것같았는데 '신곡'편에서는 갑자기 맥이 딱 풀리는 느낌입니다. 아무리 발버둥쳐봤자 결국 사람은 절재적 존재(신)의 손바닥안이라는 느낌. 그러면 그렇게까지 치열하게 갈구할 필요가 있을까? 그저 성경이 말하는대로 불경이 말하는대로, 코란이 말하는대로 열심히 생활하면 그만이지. 뭘 그리 갈구하고 관조적수준이니 하는 높은 경지를 갈구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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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하며 그때 그때의 느낌이나 도서내용을 chapter별로 나누어 기록해 볼려고 합니다. 형편없는 글솜씨이지만 저를 성장시킬 수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이번 내용은 강유원의 '인문고전강의' 중 제 3장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입니다. 

제목은 윤리학이지만 실제 이 책은 철학책입니다. 처음 책 제목을 보았을때 아리스토텔레스가 정말 박식하고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졌구나 생각했습니다. 철학자가 윤리까지 집필할 정도니깐요. 그런데 제목만 윤리학이네요. 

 이책은 출판을 위한 책은 아니고요. 강의용 노트입니다. 따라서 책의 치밀한 논리구조를 따라 쓴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래도 그 형식과 내용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이니 평이하지는 않습니다. 

이책은 올바로 행하는 것과 올바로 아는 것, 이 둘이 어떤 관계가 있는지, 제대로 행한다는 것은 무엇인자, 그리고 올바로 행하면 무엇이 좋은지. 우리의 삶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인지 등을 탐색해보는 책이라고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으 대답은 '좋은 습관'을 길러야 한다는 것인데 이는 앎과 삶을 연결하기 위해서랍니다.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은 다르다는 것을 간파한 것이지요. 플라톤이나 소크라테스는 올바로 알면 곧바로 올바로 행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고 하니 스승과는 다른 입장을 갖고 있었네요. 

오늘날 정치학은 통치의 기술을 따져 묻는 사회과학입니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을 '인간의 실천적 삶 전체를 통찰하는 총체적 탐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 정치학이 추구하는 가장 좋은 것의 구체적인 내용은 행복이라고 합니다. 물론 행복이 무엇인지는 또 다른 사유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니코마코스 윤리학 chapter를 읽으면서 가장 와닿는 단어는 '실천적 지혜'였습니다.보편적 목표와 그것을 이루는 수단을 숙고하여 일을 제대로 하는 힘이라는 저자의 해석에 공감을 하고요. 실천없는 지식인에 대한 절망감(?)과 지식없는 막무가내 실천자(사이비가 맞겠죠)에 대한 분노를 생각해보면 '실천적 지혜'야 말로 다시 생각해 볼 화두인 것 같습니다.

니코마코스 윤리학 장의 마지막을 장식한 내용은 현재의 우리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국민이 다시금 새겨봐야 하는 글이라는 생각을 저 나름대로 해보았습니다. 인문고전강의 183페이지입니다.  

책을 읽으면서 그때 그때 내용이나 느낌을 정리해 나가 볼 생각입니다. 다음은 단테의 신곡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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