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도구상자 - 우리 삶에 의미를 주는 위대한 철학자 50명의 명언들
라이너 루핑 지음, 강윤영 옮김 / 청아출판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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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 번 나를 되돌아보게 되는 책.

오랜만에 샤프를 들고, 책 이곳저곳에 줄을 쳐가면서, 생각나는 글귀를 적어가면서 읽었다.

어렵지 않게 쉬운 말로 철학가들의 이론을 간단히 풀어놓고, 그와 아울러 그 철학가의 삶을 요약해 놓은 책이다.

먼 옛날, 기원전의 철학자 아낙시만드로스에서부터 아직 죽지 않은 현대의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까지, 철학사를 한눈에 되짚을 수 있었다.

 

학교 다닐 적, 윤리나 철학사 수업에서 외우곤 했던 철학가들을 사상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삶 또한 들여다보면서 그들이 어째서 그러한 사상을 펼쳐냈는지 알 수 있었다.

 

그 어떤 한 명의 철학자에게 완전히 동의할 수는 없었지만,

한 가지, 한 가지들이 모두 나의 삶을 재조명하게 해주었다.

 

새로운 것이 만들어지면 기존의 것은 사라진다고 말했던 아낙시만드로스, 배우는 것에서 기쁨을 얻는 것은 천성이라고 말했던 아리스토텔레스,

모든 인간은 자신의 틀로 세상을 바라보기에 객관적 진리란 없다고 말한 프로타고라스,

학문은 허영적인 호기심에 불과하다고 말한 신앙의 선지자 아우구스티누스,

어리석음이 인간을 현명하게 한다는 에라스뮈스,

육체적 건강이 행복을 준다던 라 메트리,

선한 마음씨를 갖고 위대한 일을 하는 척한다는 투덜쟁이에 대해 말한 헤겔,

세상을 바꾸는 틀을 확고하게 자신했던 마르크스,

삶은 고통이기에 연민과 음악으로 현실을 잊으라 했던 쇼펜하우어,

자기 자신을 찾으라 말한 키에르케고르,

순간순간의 삶에 충실해야 한다던 니체,

이성으로 말할 수 없는 것에는 침묵으로 경의를 표하라 한 비트겐슈타인,

틀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사는 것을 인간의 임무라 한 사르트르,

세상의 틀은 어차피 계속 유지되므로 개인적 삶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라 한 카뮈,

일상과 일상밖의 영역 모두 존중해야 한다는 헬러,

자주성과 해방만 생각하지말고 타인과의 관계를 존중하라 한 버틀러.

 

그들이 있었기에 사람들은 세상을 보는 방법을 배워갈 수 있는 것 같다.

세상을 보는 방법이라든가,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은

한 가지 정해진 규칙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내가 살려고 하는 삶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그를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하면 되는 것이다.

사람마다 보는 삶에 대한 정의가 저토록 다양한데도,

누구 하나 틀린 소리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반대의 주장을 하는 사람들에게서도 각각에게 긍정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

삶이라는 것 같다.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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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사인
에이미 벤더 지음, 한아인 옮김 / 문예출판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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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인공의 이름부터 모나 그레이, 회색빛이 가득하다. 검정과 하양의 중간색인 회색을 좋아하는 사람은 드물다. 비가 오기 전의 하늘, 스모그로 가득한 땅, 오염된 물... 긍정적 이미지 보다는 부정적 이미지로 떠올려지는 회색은 우리나라에서 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마찬가지로 그리 활기찬 색깔은 아닐 것이다.

 영원히 살 수 있는 왕국에서 모두가 함께 살기 위해서, 마을 사람들에게 외면 받으면서 신체의 일부분을 잘라내는 가족에 대한 동화로 시작되어, 영원히 살 수 없는 세상으로 나가는 동화로 끝나는 이 소설은 내게 조금은 위로를 주었는지도 모르겠다.

 자신은 건강하지 않다고, 너무나 건강한 아버지가 그렇게 말하며 건강을 위한 행동을 계속 했던 이유는 사실은 건강하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일 것이다. 살아가지 않기를 바랐던 것이다. 모나는 그런 아버지가 열 살에 들려준 동화를 듣고, 자신 또한 그런 아버지의 삶에 동참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게 된다. 성인이라는 타이틀이 붙여진다고 해도, 어린 시절 받은 영향들을 쉬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이 나의 본질을 이루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은 요즘이다. 스무살 생일이 되어 도끼-신체 일부분을 언제든 잃을 수 있도록 해주는 그 연장을 최고의 선물 운운하며 자기 곁에 가까이 두는 행동 또한 그런 강박관념의 일부분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생명을 스스로가 만들어낸 이유가 아닌, 타인에게 강요받은 이유로 끊고자 하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아버지처럼 아무 것도 즐기지 않고 그저 그레이-회색빛으로 메말라가고자 노력하지만 사실 그것들은 모나 자신이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그랬기에 자신의 그러한 진심-아버지의 죽음에 동참하는 겉모습과 다른-을 새어나갈 필요가 없는 나무에 쏟아낸다. 똑똑똑똑. 들이마시고, 내쉬고, 똑똑똑똑. 아무도 자신에게 관심이 없다고 (자신의 두드림을 알아채지 못하기에) 생각하던 그레이지만, 사실 자신의 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알고 있고, 그녀는 조금 아프며(죽음 향해 억지로 가야 하기 때문에), 그것을 이해받고 있다는 것을 자신이 가르치던 아이로부터 알게 된다.

 아버지로부터 전해받은 그녀의 강요된 정체성, Grey를 끊어버릴 결심을 하게 된다. 밥은 맛이 없고, 달리기는 이기고 싶지 않으며, 소질있어 보이는 직업은 버려 버리던, 그런 행동들을 더 이상 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나는 가끔,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그 어떤 것도 그다지 즐겁지 않고 식상하며, 감정이 적극적으로 느껴지지 않고 이래도 저래도 상관없다는 식으로, 생을 포기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것이 어느 정도는 진전이 된 듯하다. 기분을 나타내는 숫자를 목에 걸고 지금이 순간의 삶에 충실한 존스, 팔에 화상을 입어가며 실험을 하는 벤자민, 어머니의 죽음을 수용하면서도 생기를 잃지 않는 리사...내 주변에, 모나에게 힘을 줬던 그들이 있었으면 싶다.




때론 스스로의 힘만으로 일어나기 힘들 때가 있다. 괜찮아, 할 수 있어, 같은 말들은 시궁창에 처박혀버리라지. 결국 살아가려고 힘을 내는 것은 본인이라고 말하지만, (또 그것이 사실이지만) 내게도 모나에게처럼 기회가 왔으면 좋겠다. 무기력하게 모든 것을 손에서 놓아버리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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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고갱 Taschen 베이직 아트 (마로니에북스) 50
인고 발터 지음, 김주원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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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핍의 경험이 없는 자는 결코 훌륭한 예술을 창조할 수 없다"

얼마나 많이 들어온 말인지 모른다
그러나 실제로 결핍의 경험은 인간을 나락으로 떨어뜨리기만 한다. 비굴해지고 인색해지며 이중적이 되고 초조해 한다. 전전긍긍하며 매일을 살고, 얼굴에는 찌든 생활고가 그대로 드러난다.
결핍의 경험은 결코 인간을 훌륭하게 만들 수 없다. 오히려 정반대로 인간을 비천하게 전락시킨다.
인간에게 행복과 즐거움, 고귀한 인품을 키울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충족된 삶이다. 물론 도가 지나친 풍족함은 인간을 돼지처럼 탐욕스럽고 무절제하게 만들며 배려심을 버리게 한다. 그러나 적절한 풍부는 인간의 덕성을 키워준다. 비천한 품성을 가지고 태어난 자라도, 적절한 환경 속에서 자라나면서 윤기도는 얼굴과 따뜻한 마음씨를 지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술가들은 셀 수 조차 없는 결핍을 가지고 있었다. 결핍 그 자체는 단지 인간을 타락시킬 뿐임에도, 예술가들은 결핍을 겪고 살면서 그 찬란한 빛을 탄생시키는 것이다.

나는 결핍이 훌륭한 예술을 창조해낸다는 이 역설적인 문구가 사실은 결과론적인 말임을 안다.

실상은 결핍이 예술을 창조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술가의 영혼이 결핍 속에서 비로소 더 찬란하게 빛나게 되는 것이다. 나락으로 떨어지는 환경 속에서도 굴하지 않는 그 영혼은 행복 속에서는 당연스레 여겨지나, 결핍에 결핍을 더하게 되더라도 굴하지 않을 때에는, 비로소 빛나며 그 가치를 알아볼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사실 예술이란 결핍으로 향하는 길과 같다. 결핍이 예술을 만드는 게 아니라, 예술은 결핍으로 필연적으로 향하게 되어있다.
진정한 예술은 시대를 뛰어넘으며 시대와 관계없이 존재한다. 발타자르 데너의 '늙은 여인'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와 당시에는 막상막하의 명성을 가졌음에도, 후자는 미술과 전혀 관련이 없는 사람도 알고 있는 명화가 되어 남았지만 전자는 미술에 관심이 있지 않으면 이름조차 들어 볼 일 없는 그림이 되고 말았다. 예술은 이와 같다. 시대와 관계없이 존재하는 위대한 예술이, 그 시대를 제대로 타고나는 것이 얼마나 되겠는가? 후기 인상파라 불리는 고흐는 그의 사후에 가서야 인정받을 수 있었다. 하다못해, 그가 좀 더 오래 살았더라면! 모네가 말년에 가서 누렸던 지위 정도는 누리고 죽을 수 있었을 텐데.

시대의 흐름과 한 예술가의 예술성의 딱 맞아 떨어지는 일이란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벨라스케스와 루벤스는 살아생전에도 그 명성을 누렸고, 죽어서도 그 명성이 살아남은 예술성을 지녔지만, 사실 그와 같은 경우를 보기가 더 어려운 일이 언제나 일어나지 않는가. 그렇기에 예술가는 자연스레 결핍의 상태에 도달하고 만다. 예술을 좇으며 사는 것은 그의 예술성을 빛나게 하며 동시에 결핍으로 가고 마는 것이다.

 

"결핍의 경험이 없는 자는 결코 훌륭한 예술을 창조할 수 없다"
이 말은 반드시 맞는 것은 아니지만, 꼭 틀렸다고 할 수만도 없는 것이다.

위대하다고 불린 이들은 그 시대에서는 명성을 누렸으나 잊혀졌고, 시대를 뛰어넘어 살아남은 진정으로 위대한 이들은 정작 평생을 고달픔과 부족함 속에서 살았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김득신은 아둔했지만 각고의 노력 끝에 '독수기'를 남겼다. 그러나, 그 노력과 성실성을 두고서 그 자세를 본받으려는 하나, 아무도 그를 매력적인 천재, 시대를 뛰어넘은 훌륭한 문필가로 여기지 않는다. 그에 있어서는 기생 황진이가 그보다 훨씬 나은 평가를 받고 있다. 김득신은 그 자세로서 후세에 귀감이 됨으로 그치고 있을 뿐, 그를 위대한 이로 여기는 것은 무리가 따를 뿐이다.

결핍에 한 가지 좋은 점이 있으니, 위대한 이의 영혼은 (그것은 김득신을 보면 알 수 있듯이 키워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결핍 속에서 더 찬란하게 빛을 내뿜는다는 것이다. 결핍 속에서 포기하거나 엎드리지 않고, 그 자세를 꼿꼿이 지킴으로써 그의 위대한 영혼을 더 확실하게 알아보도록 만든다.

이중섭이 굶주림 속에서도 신문의 삽화를 그리지 않겠다고 한 것처럼.


바로 이런 것들이 폴 고갱의 그림을 보고, 또 그의 삶을 읽으면서 내 머릿속에 떠올랐던 생각들이다. 폴 고갱은 어떻게 보면 주식중개인의 직업에서 퇴출당해서 그림의 길로 찾아든 사람 같기도 하다. 그러나 그 길은 결코 풍족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가 그 길을 택했다는 것, 결핍의 길을 택했다는 것은 그의 영혼이 어떤지를 알게 해준다.

옛날, 폴 고갱의 그림을 보면 언제나 크레파스로 잘 알지도 못하고 마구자비로 칠해댄 그림 같았다. 발가락은 죄다 고대 이집트 석상처럼 뭉툭하고 두꺼웠으며, 머리카락은 무슨 미역줄기나 감아둔 것 같고. 사람들의 피부색은 고르지도 않고 지저분했다.
인체를 무시하고, 색채를 무시했다고만 생각했던 셈이다.
그러나 그가 원했던 것은 단순한 무시가 아니었다. 일반적인 기술,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모든 것들을 떠나서 자신의 원하는 바를 나타내고 싶었던 것이다. 그가 그리고 있는 이상의 아름다움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오랜 시대를 걸쳐 내려온 당연한 그림에 대한 원리를 깨부숴야 했다. 그것들은 그래서 사람들에게 이해를 받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자신의 삶을 외면하지는 않았다. 그는 어떻게든 그림을 팔고 싶어했으며, 자신의 그림이 인정받기를 원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자신이 그리는 그 모든 것들이 훼손되지는 않길 바랐다.

내가 고갱의 삶을 모티프로 한 책 '달과 6펜스'를 읽고 스트릭랜드에게 감동받으면서도 정이 떨어졌던 것과 달리,
폴 고갱의 삶은 현실에 발을 내리려는 인간적인 모습, 동시에 자신의 예술을 유지하려는 위대한 영혼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어 더 감동적이다.

개인적으로 작품 자체에 대한 설명도 좀 추가되었으면 좋겠다 싶었지만,
예술을 예술가와 결부시켜 풀이해가는 책의 방식이 맘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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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으로부터의 한마디
오기와라 히로시 지음, 권일영 옮김 / 예담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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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으로부터의 한마디

신으로부터의 한마디, 제목은 이중적인 의미를 띠고 있다.


주인공이 다니는 회사의 사훈이 그 표면적인 의미이다. ‘고객의 목소리는 신으로부터의 한마디’라는 사훈은, 고객을 우선시하는 회사의 이미지를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그 안의 실상은 정작 고객을 응대하는 상담실이 ‘인간쓰레기 처리장’ 의 다른 말로 사용되고 있는 회사이다. 회사의 회장이 잠적하고, 그 사이를 타고 들어 온 고위직들은 제대로 된 인간이 없다. 파벌싸움 하기에 바빠서 정작 가장 기본적으로 필요한 ‘고객을 위한 제품 만들기’는 뒷전이 되어버렸다. 무언가 한 가지를 건드리고 싶어도, 대체 어디서부터 꼬인 것인지 알 수가 없는 이 회사의 내부는 가면 파고들수록 손대기 힘든 어마어마한 실타래가 엉켜 있다.


주인공은 이러한 회사에 다니면서 집세만 내면 당장 그만 두겠다 운운하면서 지낸다. 인내심이 부족하고 속에 있는 말을 참지 못하는 료헤이는 중역회의에서 머릿속 욕을 자기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내는 바람에 처리장인 고객상담실로 좌천되고 만다.


이 회사가 사훈으로 걸고 있지만 실상은 뒷전으로 밀어놓고 있던 ‘고객의 목소리’를 듣는 고객상담실로 주인공이 들어가게 만든 것은 인간 내면에 대한 메타포라고 보아도 될 것이다.


주인공은 무엇 때문에, 무엇이 하고 싶은데 나는 지금 어쩔 수 없이... 라면서 매일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는 이 회사의 고객상담실로 들어가게 됨으로 비로소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을 시작하게 된다. 이제야 비로소 제대로 된 어른이 되는 길로 들어서게 된 셈이다.그가 고민하고 있는 것은 설령 회사 뿐이 아니다. 그가 ‘하고 싶은 일’이라든가, 잊지 못하는 연인인 ‘린코’에 대한 고민 같은 것도 이 이야기에 얽혀 들어간다.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겠지만 이 이야기를 간단히 도식화 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회사 = 주인공(료헤이)
고객상담실 = 주인공의 내면
사훈 ‘신으로 부터의 한 마디’ = 공원의 노숙자 ‘존의 한 마디’
고객상담실을 사훈으로 걸어놓고 정작 뒷전으로 두고만 있었던 회사의 모습은, 자기 자신에 대한 명확한 생각 없이 되는 대로 살아가고 있던 료헤이의 모습과 맞닿아 있다. 회사는 고객상담실을 제대로 운영하지 않고 구조조정용 대기실 정도로만 사용함으로써 결국은 부도의 지름길로 향하고 있다. 회사의 중역들은 회사에 신경 쓰기보다는 밥그릇 다툼에 위신 세우기에 바쁘다. 제 할일을 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 모습 또한 료헤이와 맞닿아 있어서, 되는대로 ‘지금 당장 급한 불만 끄면 돼’라는 생각만 하고 살던 료헤이의 내면세계와도 같다. 료헤이의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붕괴의 길로 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그가 고객상담실로 가며 회사에서 구조조정 대기자로 발령난 것은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아야만 하는 마지막 한계선에 다다랐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료헤이는 고객상담실에서 ‘신=고객’의 불평과 불만을 처리하면서 점점 자기 자신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진짜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주위 사람과 비교해가면서 찾아가게 된다.


이에 맞물린 또 하나의 ‘신으로부터의 한마디’는 공원의 노숙자인 가칭 ‘존’의 말을 뜻한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말이다. 료헤이는 자기 자신을 찾아가면서, 대뜸 나타나서 신비롭게 말 한 마디를 던지고 사라지는 ‘존’의 말을 신의 말인양 듣고 싶어 한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신’이 아니다. 회사가 물건을 만드는 것은 고객을 위한 것이다. 그것이 가장 기본적인 모토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것은 자기 자신의 내면에 있는 것을 실현시키기 위해서이다. 그것 또한 가장 기본적인 모토이다. 회사가 고객의 말을 소홀히 했던 것처럼, 료헤이는 자기 자신의 내면세계(=팔뚝의 늑대 문신이 메타포인)를 소홀히 했었다. 료헤이는 공원의 노숙자에 불과한 존의 한 마디를 듣지만, 그것은 정말 신의 말을 듣듯이 있는 그대로 믿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내면의 목소리를 깨우기 위한 계기로 삼으려고 하는 것이다.

이 책은 훌륭하게 당의를 입힌 약이다. 표면적으로는 회사에서 제 성질 못 이기고 잘릴 뻔 했던 한 청년이 회사의 비리를 고발하고 멋지게 사표 던지며 나오는 내용이다. 그러나 그 안에서는 현대를 살아가는 한 청년의 모습을 각 시대를 살아왔던 인물들과 비교하면서 그 내면을 그려 보이고 있다. 또한 옛 시대를 거쳐온 인간들도, 현 시대를 살아가면서 각종 문제를 떠안은 회사와 마찬가지로 당장 붕괴되어버릴 아슬아슬한 내면을 부도 어음막듯 스스로를 속여 가며 존재하고 있음도 묘사하고 있다. 가장 중요한 일은 자기 내면의 소리를 듣는 것, 자기 자신을 속이지 말고 내면의 소리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올바른 것이라는 말을 재미있는 표면적인 구조로 전하고 있는 셈이다.

표면적으로만 읽어도 스트레스 쌓인 직장인들이 통쾌함을 느낄 수 있어 대중성을 확보한 셈이 되고, 표면 아래의 내부를 잡을 수 있는 사람에게는 층위를 만든 소설에서 느낄 수 있는 감동도 전달할 수 있어 문학성 또한 잡았다고 볼 수 있겠다.

당의를 굉장히 잘 입혔기 때문에 내부를 잡을 생각조차 안 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어렴풋하게나마 스스로에 대해서 돌아볼 계기 정도는 당의만 맛보아도 약을 어느 정도 먹은 셈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아쉬운 점은, 독자를 웃게 하기 위해서 다소 억지스럽게 집어넣은 부분들이 있고, 회사를 묘사하기 위해서 할애한 부분들이 다소 지루하다는 점이다. 그 전자는 일본식의 유머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 생각하고 넘어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리고 내게만 안 맞을 뿐이지 이게 재밌어서 깔깔대고 웃을 사람도 있을 수 있을 테고.) 또 하나는 환경을 묘사하기 위해서 였을 테고, 어떻게 생각하면 소설을 쓰기 위해 치밀한 사전 조사를 한 모습으로 생각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쓸데없어 보이는 곁다리 지식들이 널려 있다는 점이다. 독자에게 필요한, 그러니까 소설에 필요한 요소가 아닌데도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그게 마치 ‘작가의 사전 조사에 대한 과시’ 정도로 여겨진다는 게 문제이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보아서는 요즘 소설 중 대중성과 문학성을 잡은 드문 경우라는 생각이 든다. 꽤 추천하고픈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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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언젠가 - 개정판
츠지 히토나리 지음, 신유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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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속적으로 이상적인 로맨스 소설.

아마도 이 정도로 '단지 로맨스 소설'인 줄 알았다면 아마도 읽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이 속에서 이 정도로 기분나쁜 생각을 발견할 줄 알았더라면 더더욱 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나에게만 이렇게 기분 나쁜 것일뿐이라는 생각도 든다. 많은 사람들, 그러니까 사랑이라는 것 자체에만 푹 빠져 있고 싶은 사람에게는 이것들이 너무나 달콤한 환상으로만 여겨질 것이다. 이러한 달콤한 환상은 그것이 어떤 생각을 기반으로 하고 있더라도 아무런 상관도 하지 않게 해 준다. 그리고 대부분의 로맨스 소설들이란 바로 이런 것을 기반으로 해서 쓰여지기 때문에, 오히려 그 환상적인 분위기 속에서 오히려 안주할 수 있도록, 그 나머지 것들은 생각 안 해도 되도록 만들어 주기 때문에 많은 '사랑에 빠지고픈 사람'들에게는 좋은 도피처가 되어주는 게 아닐까?

줄거리는 정말이지 한숨나올 정도로 진부하기 그지 없다.

일본인 두 사람이 방콕에서 만나게 된다. 남자는 결혼을 앞두고 있는 앞길 창창한 호청년이고, 여자는 이혼을 한 후 막대한 위자료로 부자가 된 상태다. 여자는 자기의 전남편에게 질투심을 불러일으키려고 이 남자를 유혹한다. 남자는 넘어오고, 여자는 후회한다. 진짜로 사랑에 빠져버렸기 때문이다. 단 넉달간 방종 그 자체의 육체관계를 맺고는, 여자는 남자의 행복을 빌며 떠나가고 남자는 예정대로 결혼한다. 그렇게 25년이 지난 후, 남자는 전무가 되었고 여자는 그들이 매일 나날을 보냈던 방콕 호텔의 어시스턴트가 되어 우연아닌 우연으로 만나게 된다. 그들은 서로를 사랑했었다고, 25년 전 하지 못한 고백을 한다. 그리고 그로부터 4년 뒤에 여자는 죽게 되자 남자에게 와달라고 하고, 남자는 여자를 찾아간다. 그리고 서로 말한다. "사랑한다"고. 사랑했다, 가 아닌 사랑한다고.

사실 이 책을 읽고나서 고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왜냐하면,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내가 지금까지 읽었던 고전들이 얼마나 피땀흘린 노력 끝에 쓰였는가를 몰랐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죽 읽었던 고전들이, 얼마나 '반드시 필요한' 문장과 '가장 적절한' 단어를 배치하여 묘사하고 서술했는지 몰랐었다. 이 책의 묘사와 표현은 '이 정도면 되겠지'라고 넣은 느낌이 너무 강하게 들고, 정확히 무엇을 말하기 위해서 넣은 것들이 아니라 어떤 환상과 같은 달콤한 이미지를 불어넣기 위해서 쓰여진 것이 전부라서 결국 그것들은 아무 것도 말해주지 못하는 표현들이 되고 말아서 읽는데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게 되었다. 게다가 아주 중요한 듯이 삽입되어 있는 시는 뭐 어쩌라고 싶을 정도다. 차라리 현대 가요 한 대목 따서 집어넣는 쪽이 낫지 않았을까 싶다.

하긴, 고전들에 로맨스 소설을 비교하는 건 잔인한 짓일 뿐 의미가 없다. 세기를 넘어 살아남은 고전과 통속적인 로맨스 소설은 그 목적에서부터 전혀 다르게 출발하고, 다른 것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읽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츠지 히토나리'가 쓴 글들을 읽은 다른 서평들에서 여러 번 칭찬을 보았기 때문에, 완전히 통속 로맨스 소설인 줄을 몰랐었기 때문에 이 책을 읽게 된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감정적인 이유 때문인 듯 하다. 원하던 것과 다른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로맨스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이 글을 읽는다면 "그럼 네가 좋아하는 고전이나 읽지 그래?"라고 말해도 나름의 변명거리는 된 셈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이 서평을 이렇게 쓰는 이유는 나처럼 기대하던 것과 다른 것을 읽어서 속은 느낌이 들지 모르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요즘의 일본소설들은 대체 어떤 작가가 어떤 정신의 글을 쓰는지 짐작할 수가 없다. 모두 달콤 발랄한 표지에 광고를 내걸고 침투하기 때문이다.

그럼, 로맨스 소설로서의 이 글이 어떤지에 대해서 서평을 써보도록 하겠다.
로맨스 소설로서의 이 글은 굉장히 적절하다. 남자에게든 여자에게든 달콤한 생각을 갖게 해주기에 충분하다. 여자는 가방 하나에 몇 달치 월급이 되는 명품들을 펑펑 사 나르는 부자이다. 남자는 이미 결혼을 예정한 현모양처가 있는데도 여자의 육탄공세에 무너진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이 육탄공세로 시작한 육체관계가 너무나 정열적인 사랑을 피워올렸고, 단 넉달 간의 관계가 30년이 다 되도록 만나지 못하면서도 '현재진행형 사랑'을 가능하게 했다는 점이다. 짧고 정열적인 사랑, 그런데 그게 한 순간의 육체관계가 아닌 평생의 사랑으로 남았다는 점에서 현실을 완전히 떠난 구름 위의 세상을 꿈꾸게 하는 러브 스토리다.
배경은 열기와 소란의 도시 방콕. 거기의 유서깊고 화려한 호텔 스위트룸이라는 점도 로맨스 소설에서의 환상을 꽃피우기 좋은 조건이다.
게다가 여자는 한 순간의 정열적인 사랑으로 평생을 결혼도 안 하고 남자만 그리며 죽고,
남자는 한 손에는 현모양처에 승승장구하는 직장을 손에 쥐고, 자기를 그렇게 그리워해주는 여자의 편지를 받아가며 정열적인 방콕의 사랑을 때때로 추억한다.
여자에게든 남자에게든 얼마나 달콤한 로맨스가 되는가. (분명 남자에게 좀 더 어필할 듯한 내용과 사상이 포함되어 있지만)
그러니 모든 것을 잊고 "아~ 이렇게 산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렇게 사랑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짱 부러워!"라고 외치고만 싶어서 소설을 읽는 이에게라면 최고의 권장 소설이 되리라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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