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언젠가 - 개정판
츠지 히토나리 지음, 신유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7년 10월
평점 :
품절


통속적으로 이상적인 로맨스 소설.

아마도 이 정도로 '단지 로맨스 소설'인 줄 알았다면 아마도 읽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이 속에서 이 정도로 기분나쁜 생각을 발견할 줄 알았더라면 더더욱 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나에게만 이렇게 기분 나쁜 것일뿐이라는 생각도 든다. 많은 사람들, 그러니까 사랑이라는 것 자체에만 푹 빠져 있고 싶은 사람에게는 이것들이 너무나 달콤한 환상으로만 여겨질 것이다. 이러한 달콤한 환상은 그것이 어떤 생각을 기반으로 하고 있더라도 아무런 상관도 하지 않게 해 준다. 그리고 대부분의 로맨스 소설들이란 바로 이런 것을 기반으로 해서 쓰여지기 때문에, 오히려 그 환상적인 분위기 속에서 오히려 안주할 수 있도록, 그 나머지 것들은 생각 안 해도 되도록 만들어 주기 때문에 많은 '사랑에 빠지고픈 사람'들에게는 좋은 도피처가 되어주는 게 아닐까?

줄거리는 정말이지 한숨나올 정도로 진부하기 그지 없다.

일본인 두 사람이 방콕에서 만나게 된다. 남자는 결혼을 앞두고 있는 앞길 창창한 호청년이고, 여자는 이혼을 한 후 막대한 위자료로 부자가 된 상태다. 여자는 자기의 전남편에게 질투심을 불러일으키려고 이 남자를 유혹한다. 남자는 넘어오고, 여자는 후회한다. 진짜로 사랑에 빠져버렸기 때문이다. 단 넉달간 방종 그 자체의 육체관계를 맺고는, 여자는 남자의 행복을 빌며 떠나가고 남자는 예정대로 결혼한다. 그렇게 25년이 지난 후, 남자는 전무가 되었고 여자는 그들이 매일 나날을 보냈던 방콕 호텔의 어시스턴트가 되어 우연아닌 우연으로 만나게 된다. 그들은 서로를 사랑했었다고, 25년 전 하지 못한 고백을 한다. 그리고 그로부터 4년 뒤에 여자는 죽게 되자 남자에게 와달라고 하고, 남자는 여자를 찾아간다. 그리고 서로 말한다. "사랑한다"고. 사랑했다, 가 아닌 사랑한다고.

사실 이 책을 읽고나서 고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왜냐하면,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내가 지금까지 읽었던 고전들이 얼마나 피땀흘린 노력 끝에 쓰였는가를 몰랐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죽 읽었던 고전들이, 얼마나 '반드시 필요한' 문장과 '가장 적절한' 단어를 배치하여 묘사하고 서술했는지 몰랐었다. 이 책의 묘사와 표현은 '이 정도면 되겠지'라고 넣은 느낌이 너무 강하게 들고, 정확히 무엇을 말하기 위해서 넣은 것들이 아니라 어떤 환상과 같은 달콤한 이미지를 불어넣기 위해서 쓰여진 것이 전부라서 결국 그것들은 아무 것도 말해주지 못하는 표현들이 되고 말아서 읽는데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게 되었다. 게다가 아주 중요한 듯이 삽입되어 있는 시는 뭐 어쩌라고 싶을 정도다. 차라리 현대 가요 한 대목 따서 집어넣는 쪽이 낫지 않았을까 싶다.

하긴, 고전들에 로맨스 소설을 비교하는 건 잔인한 짓일 뿐 의미가 없다. 세기를 넘어 살아남은 고전과 통속적인 로맨스 소설은 그 목적에서부터 전혀 다르게 출발하고, 다른 것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읽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츠지 히토나리'가 쓴 글들을 읽은 다른 서평들에서 여러 번 칭찬을 보았기 때문에, 완전히 통속 로맨스 소설인 줄을 몰랐었기 때문에 이 책을 읽게 된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감정적인 이유 때문인 듯 하다. 원하던 것과 다른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로맨스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이 글을 읽는다면 "그럼 네가 좋아하는 고전이나 읽지 그래?"라고 말해도 나름의 변명거리는 된 셈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이 서평을 이렇게 쓰는 이유는 나처럼 기대하던 것과 다른 것을 읽어서 속은 느낌이 들지 모르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요즘의 일본소설들은 대체 어떤 작가가 어떤 정신의 글을 쓰는지 짐작할 수가 없다. 모두 달콤 발랄한 표지에 광고를 내걸고 침투하기 때문이다.

그럼, 로맨스 소설로서의 이 글이 어떤지에 대해서 서평을 써보도록 하겠다.
로맨스 소설로서의 이 글은 굉장히 적절하다. 남자에게든 여자에게든 달콤한 생각을 갖게 해주기에 충분하다. 여자는 가방 하나에 몇 달치 월급이 되는 명품들을 펑펑 사 나르는 부자이다. 남자는 이미 결혼을 예정한 현모양처가 있는데도 여자의 육탄공세에 무너진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이 육탄공세로 시작한 육체관계가 너무나 정열적인 사랑을 피워올렸고, 단 넉달 간의 관계가 30년이 다 되도록 만나지 못하면서도 '현재진행형 사랑'을 가능하게 했다는 점이다. 짧고 정열적인 사랑, 그런데 그게 한 순간의 육체관계가 아닌 평생의 사랑으로 남았다는 점에서 현실을 완전히 떠난 구름 위의 세상을 꿈꾸게 하는 러브 스토리다.
배경은 열기와 소란의 도시 방콕. 거기의 유서깊고 화려한 호텔 스위트룸이라는 점도 로맨스 소설에서의 환상을 꽃피우기 좋은 조건이다.
게다가 여자는 한 순간의 정열적인 사랑으로 평생을 결혼도 안 하고 남자만 그리며 죽고,
남자는 한 손에는 현모양처에 승승장구하는 직장을 손에 쥐고, 자기를 그렇게 그리워해주는 여자의 편지를 받아가며 정열적인 방콕의 사랑을 때때로 추억한다.
여자에게든 남자에게든 얼마나 달콤한 로맨스가 되는가. (분명 남자에게 좀 더 어필할 듯한 내용과 사상이 포함되어 있지만)
그러니 모든 것을 잊고 "아~ 이렇게 산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렇게 사랑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짱 부러워!"라고 외치고만 싶어서 소설을 읽는 이에게라면 최고의 권장 소설이 되리라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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