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폴 고갱 ㅣ Taschen 베이직 아트 (마로니에북스) 50
인고 발터 지음, 김주원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07년 10월
평점 :
품절
"결핍의 경험이 없는 자는 결코 훌륭한 예술을 창조할 수 없다"
얼마나 많이 들어온 말인지 모른다
그러나 실제로 결핍의 경험은 인간을 나락으로 떨어뜨리기만 한다. 비굴해지고 인색해지며 이중적이 되고 초조해 한다. 전전긍긍하며 매일을 살고, 얼굴에는 찌든 생활고가 그대로 드러난다.
결핍의 경험은 결코 인간을 훌륭하게 만들 수 없다. 오히려 정반대로 인간을 비천하게 전락시킨다.
인간에게 행복과 즐거움, 고귀한 인품을 키울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충족된 삶이다. 물론 도가 지나친 풍족함은 인간을 돼지처럼 탐욕스럽고 무절제하게 만들며 배려심을 버리게 한다. 그러나 적절한 풍부는 인간의 덕성을 키워준다. 비천한 품성을 가지고 태어난 자라도, 적절한 환경 속에서 자라나면서 윤기도는 얼굴과 따뜻한 마음씨를 지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술가들은 셀 수 조차 없는 결핍을 가지고 있었다. 결핍 그 자체는 단지 인간을 타락시킬 뿐임에도, 예술가들은 결핍을 겪고 살면서 그 찬란한 빛을 탄생시키는 것이다.
나는 결핍이 훌륭한 예술을 창조해낸다는 이 역설적인 문구가 사실은 결과론적인 말임을 안다.
실상은 결핍이 예술을 창조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술가의 영혼이 결핍 속에서 비로소 더 찬란하게 빛나게 되는 것이다. 나락으로 떨어지는 환경 속에서도 굴하지 않는 그 영혼은 행복 속에서는 당연스레 여겨지나, 결핍에 결핍을 더하게 되더라도 굴하지 않을 때에는, 비로소 빛나며 그 가치를 알아볼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사실 예술이란 결핍으로 향하는 길과 같다. 결핍이 예술을 만드는 게 아니라, 예술은 결핍으로 필연적으로 향하게 되어있다.
진정한 예술은 시대를 뛰어넘으며 시대와 관계없이 존재한다. 발타자르 데너의 '늙은 여인'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와 당시에는 막상막하의 명성을 가졌음에도, 후자는 미술과 전혀 관련이 없는 사람도 알고 있는 명화가 되어 남았지만 전자는 미술에 관심이 있지 않으면 이름조차 들어 볼 일 없는 그림이 되고 말았다. 예술은 이와 같다. 시대와 관계없이 존재하는 위대한 예술이, 그 시대를 제대로 타고나는 것이 얼마나 되겠는가? 후기 인상파라 불리는 고흐는 그의 사후에 가서야 인정받을 수 있었다. 하다못해, 그가 좀 더 오래 살았더라면! 모네가 말년에 가서 누렸던 지위 정도는 누리고 죽을 수 있었을 텐데.
시대의 흐름과 한 예술가의 예술성의 딱 맞아 떨어지는 일이란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벨라스케스와 루벤스는 살아생전에도 그 명성을 누렸고, 죽어서도 그 명성이 살아남은 예술성을 지녔지만, 사실 그와 같은 경우를 보기가 더 어려운 일이 언제나 일어나지 않는가. 그렇기에 예술가는 자연스레 결핍의 상태에 도달하고 만다. 예술을 좇으며 사는 것은 그의 예술성을 빛나게 하며 동시에 결핍으로 가고 마는 것이다.
"결핍의 경험이 없는 자는 결코 훌륭한 예술을 창조할 수 없다"
이 말은 반드시 맞는 것은 아니지만, 꼭 틀렸다고 할 수만도 없는 것이다.
위대하다고 불린 이들은 그 시대에서는 명성을 누렸으나 잊혀졌고, 시대를 뛰어넘어 살아남은 진정으로 위대한 이들은 정작 평생을 고달픔과 부족함 속에서 살았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김득신은 아둔했지만 각고의 노력 끝에 '독수기'를 남겼다. 그러나, 그 노력과 성실성을 두고서 그 자세를 본받으려는 하나, 아무도 그를 매력적인 천재, 시대를 뛰어넘은 훌륭한 문필가로 여기지 않는다. 그에 있어서는 기생 황진이가 그보다 훨씬 나은 평가를 받고 있다. 김득신은 그 자세로서 후세에 귀감이 됨으로 그치고 있을 뿐, 그를 위대한 이로 여기는 것은 무리가 따를 뿐이다.
결핍에 한 가지 좋은 점이 있으니, 위대한 이의 영혼은 (그것은 김득신을 보면 알 수 있듯이 키워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결핍 속에서 더 찬란하게 빛을 내뿜는다는 것이다. 결핍 속에서 포기하거나 엎드리지 않고, 그 자세를 꼿꼿이 지킴으로써 그의 위대한 영혼을 더 확실하게 알아보도록 만든다.
이중섭이 굶주림 속에서도 신문의 삽화를 그리지 않겠다고 한 것처럼.
바로 이런 것들이 폴 고갱의 그림을 보고, 또 그의 삶을 읽으면서 내 머릿속에 떠올랐던 생각들이다. 폴 고갱은 어떻게 보면 주식중개인의 직업에서 퇴출당해서 그림의 길로 찾아든 사람 같기도 하다. 그러나 그 길은 결코 풍족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가 그 길을 택했다는 것, 결핍의 길을 택했다는 것은 그의 영혼이 어떤지를 알게 해준다.
옛날, 폴 고갱의 그림을 보면 언제나 크레파스로 잘 알지도 못하고 마구자비로 칠해댄 그림 같았다. 발가락은 죄다 고대 이집트 석상처럼 뭉툭하고 두꺼웠으며, 머리카락은 무슨 미역줄기나 감아둔 것 같고. 사람들의 피부색은 고르지도 않고 지저분했다.
인체를 무시하고, 색채를 무시했다고만 생각했던 셈이다.
그러나 그가 원했던 것은 단순한 무시가 아니었다. 일반적인 기술,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모든 것들을 떠나서 자신의 원하는 바를 나타내고 싶었던 것이다. 그가 그리고 있는 이상의 아름다움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오랜 시대를 걸쳐 내려온 당연한 그림에 대한 원리를 깨부숴야 했다. 그것들은 그래서 사람들에게 이해를 받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자신의 삶을 외면하지는 않았다. 그는 어떻게든 그림을 팔고 싶어했으며, 자신의 그림이 인정받기를 원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자신이 그리는 그 모든 것들이 훼손되지는 않길 바랐다.
내가 고갱의 삶을 모티프로 한 책 '달과 6펜스'를 읽고 스트릭랜드에게 감동받으면서도 정이 떨어졌던 것과 달리,
폴 고갱의 삶은 현실에 발을 내리려는 인간적인 모습, 동시에 자신의 예술을 유지하려는 위대한 영혼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어 더 감동적이다.
개인적으로 작품 자체에 대한 설명도 좀 추가되었으면 좋겠다 싶었지만,
예술을 예술가와 결부시켜 풀이해가는 책의 방식이 맘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