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럴 리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아들러는 성격을 어디까지나 대인관계 속에서 몸에 배는 것으로 파악했다. 인용문에 나온 "사회적 개념"이란 바로 그런 의미다. 성격이 그 사람 고유의 내면적 성질, 다시 말해 ‘개인적인 개념‘이 아니라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변하는 사회적인 개념이라는 의미다. - P231
아들러는 인간의 ‘숨겨진 목표‘에 관해 세 가지 유형을 들었다. 하나는 남들보다 뛰어나고 싶은 ‘우월성‘. 다음은 다른 사람보다 힘을 더 갖고 싶어 하는 ‘권력욕‘. 그리고 다른 사람을 복종시키고 싶어 하는 ‘정복욕‘. 이것들이 아들러가 말하는 세 가지의 ‘숨겨진 목표다. - P233
실패를 두려워한 나머지 팔짱을 끼고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과제에 돌입했으나 실패하는 것이 훨씬 낫다고 나는 생각한다. 인생에는 두려운 일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도망치지 말고과제와 직면하는 용기를 조금이라도 가진다면, 인생은 반드시바뀔 것이다. - P253
‘무의식의 방‘에 갇혀서 ‘냉동보존‘ 된 기억을 ‘해동‘ 하면 ‘과거 그대로‘의 기억이 살아난다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입니다. 기억은 그처럼 확실한 ‘실체‘가 아닙니다. 그것은 늘 ‘생각해내면서 형성되는 과거‘ 입니다. - P195
내가 과거의 사건을 ‘생각해내는‘ 것은 지금 나의 회상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내가 이런 인간‘이라고 생각해주었으면 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어떤 일이 일어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 즉 타자에 의한 승인을 얻기 위해 과거를 생각해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미래를 향해서 과거를 생각해내는 것입니다. - P202
요컨대 레비스트로스는 ‘우리 모두 사이좋게 살아요‘ 라고 한것이며, 바르트는 ‘언어 사용이 사람을 결정한다‘ 라고 한 것이고,라캉은 ‘어른이 되어라‘ 라고 한 것이며, 푸코는 ‘나는 바보가 싫다‘ 라고 했음을 알게 된 것이지요. - P217
우리는 늘 어떤 시대, 어떤 지역, 어떤 사회집단에 속해 있으며 그 조건이 우리의 견해나 느끼고 생각하는 방식을 기본적으로 결정한다. 따라서 우리는 생각만큼 자유롭거나 주체적으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대부분의 경우 자기가 속한 사회집단이 수용한 것만을 선택적으로 ‘보거나, 느끼거나,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집단이 무의식적으로 배제하고 있는 것은 애초부터 우리의 시야에 들어올 일이 없고, 우리의 감수성과 부딪치거나 우리가 하는 사색의 주제가 될 일도 없다.우리는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자율적인 주체‘라고 믿고 있지만, 사실 그 자유나 자율성은 상당히 제한적이라는 사실을 철저하게 파헤친 것이 구조주의의 성과입니다. - P28
제도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우리의 ‘의심‘ 까지도, ‘제도적인 지‘로 의심받는 그 제도에 속한다는 불쾌함. 이런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권력에 대한 반역‘을 활기차게 노래하고 있는 우둔한 학자나 지식인에 대한 모멸감. 이러한 불쾌한 일들에 조종당하는 우리 스스로에 대한 철저한 자기언급이 푸코가 보여준 비평의 핵심입니다. - P121
여기에 있는 이 ‘나‘는 도대체 어떤 역사를 경유하여 형성된것일까? 그것을 묻는 것이 푸코가 주장한 비판의 구조이지만, 사실그것은 ‘자기의 눈으로 자기의 뒤통수를 보고 싶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불가능한 희망입니다. 그러나 이 불가능한 희망에 가진 재산을 모두 건 미셸 푸코의 작업은 그 무모함 때문에라도 앞으로 오랫동안 칭송받을 것입니다. - P122
삶은 계란 껍질을 까고 있는데카톡 알림이 울린다.카톡 알림음은 참 경쾌하다.메시지의 무게에 차별을 두지 않는다.확인은.삶은 계란 껍질을 천천히, 공들여 까고 난 후.
폐지 줍는 노인이 건넨 요구르트가 찝찝하고, 홀로 어슬렁거리는 사람보다는 가족 단위의 이용객을 볼 때 더 편안함을 느끼는 ‘나‘ 또한 중산층적 교양과 인구 구성의 경계에 예민한 사람이다. ‘나‘는 분노를 어떤 정치적 자원으로 승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 원한과 복수의 재생산으로 지탱되는 ‘인간의 짓‘을 또 반복하게 될 것인가, 아니라면 이제까지와는 다른 ‘인간의 짓‘을 발명할 것인가. <공원에서(저자-김지연)_오은교 해설 중> - P1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