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표현에 대한 내 이해를 어떤 지평선이 규정하는지 상대방은 알지 못하고 또 그에게 선의가 있어도 늘 제한적으로만 알 수 있다는 사실은 결코 이례적이지 않다. 대다수의 일상에서 이는 그리 두드러지지 않는다. 각기 다른 우리의 지평이 서로 충돌해야만 우리가 서로를 완벽히 이해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다시 말해 우리가 서로 ‘이해한다‘는 것은 검증되지않은, 흡사 착각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일단 오해가 생겨나면 당사자들이 각기 다른 의미 맥락을 동원했음을 알 수 있다. 모멸이 종종 모든 당사들에게 예기치 않게 생겨나는 이유 중 하나가 여기에 있다. - P180
V존중에 대한 기대의 좌절은 자기 가치감이 손상된 사람이 상대방에게 내세우는 것이다. V 무너진 연대는 특히 공감적 불일치에 이른 당사자들 간에 생겨난다. V소통의 실패는 만족스런 수준의 커다란 공동 의미 교집합을 찾으려는(만들려는) 시도의 실패라고 할 수 있다. - P192
"우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보편적 인간성을 자각한다면 실망과 미흡의 감정들이 모두에게 공통으로 있음을 상기하게 된다. 이는 자기 자비를 자기 연민과 구별한다. 자기 연민이 ‘가여운 나‘에 대해 말하는 반면, 자기 자비는 모두가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는 걸 안다. 자기 자비는 위로를 베푼다. 모두가 보편적인 인간이기 때문이다. - P211
접촉은 상호적인 사랑과 연대의 표현이다. 접촉 속에서 우리의 생은 이리저리 활기차게 흘러간다. 우리가 생에서 분리될수록, 이를테면 위기, 질병, 죄와 고독 같은 상황에 처할수록 우리는 더욱더 접촉을 그리워하며 이를 생기와 구제로 느끼게 된다. 모든 선한 접촉 속에서 우리는 이렇게 느낀다. 누군가 너의 곁에 있다고, 누군가 너에게 관심이 있다고, 너는 혼자가 아니라고, 너는 망각되거나 포기되거나 혹은 배제되지 않았다고 말이다. - P219
공감은 괴로워하는 인간에 대한 호의적인 감정으로, 그의 고통이 덜어지기를 소망할 때 생긴다. 그리고 끝으로 공감은 우리 모두가 흠도 있고 결점도 있는 ‘한낱 인간‘이라는 깨달음이기도 하다. - P223
정서는 세상을 향한 우리의 관점과 타인의 행위에 대한 우리의 해석을 달라지게 한다. 우리는 왜 특정 감정이 느껴지는지 스스로 질문을 제기하지 않으며, 오히려 이 감정이 옳음을 증명하려고 노력한다. 우리는 일어난 사건을 현존하는 감정과 일관된 방식으로 평가한다. 그러면서 우리는이 감정을 정당화하고 유지한다. 이는 우리를 어려움에 빠트릴 수 있다. 어떤 감정에 압도당하면 이 감정을 흔들 수 있는 우리가 이미 얻은 지식은 망각되거나 경시되며 또한 당장의 감정 상태에 어울리지 않는 새로운 정보들은 무시된다. - P229
타인을 용서할 때 우리는 진심으로 해야 한다. 용서를 표하면서 마음속에 원한을 품고 비난을 위한 뒷문을 열어두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진정으로 용서한 사람은 이 기억과 함께 살아갈 수도 있다. 용서를 통해 이 기억이 지닌 고통스런 작용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 P247
관계를 맺고 이에 깊이 발을 들이는 사람은 모멸을 경험하고 또 역으로 타인에게 모멸의 유발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감수해야 한다. 좋은 관계는 모멸감이 전혀 발생하지 않는 관계가 아니라, 당사자들이 그들의 유대를 견고히 하고 강화하는 길을 찾아내는 관계다. - P259
우리는 그저 제한된 범위 안에서 타인에 대해 추정할 수밖에 없다. - P274
타인을 모욕하는 일을 피하고싶은 사람은 고유의 관점이 보편타당하다는 암묵적 판단 하에 문제를 풀어가는 대신 타인이 나 자신과 어느 정도 다르게 느낀다는 사실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각자의 준거 틀이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무엇이 타인에게 모멸로 느껴지는지 또 무엇이 그렇지 않은지 잘 모른다. 이런 모름을 자각해야 이를 알아가도록 탐구하고 또 계속해서 질문을 할 수 있다. - P274
모멸의 경험은 인정을 향한 기대의 실망 또는 소통의 실패와 동등한 뜻으로 여겨진다. 모멸을 예방할 수 있는 하나의 일반적인 가능성이 여기에 있다. 즉, 언제나 성실하게 타인의 행동에 인정을 표하고 존중을 전하며 그의 정서적 진동에 공감하고 더불어 문제에 대한 그의 시각을 이해한다고 언행으로 분명히 표현하는 것이다. 이 같은 인정은,
단지 "동의"와 "지지", "긍정" 같은 특유의 행위만이 아니라 (……) 좀더 엄밀한 뜻에서 고유의 가치를 확인해주는 행위로도 이해될 수 있다. 인정에서 주체는 (………) 그저 (긍정적이고 특별한) 능력과 특성만 그리고 "특정 능력과 권리의 가치만 확인받는 것이 아니다. (……) 더 정확히 말하면 인간이라는 주체의 능력과 특성이 그 자체로 "가치 있다고 확인"받는 것이 인정이다. - P277
불확실함은 무능력의 표출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적이다. 거꾸로 말해서 확실함을 취하며 타인의 감정과 의도가 무엇인지 내가 안다고 여기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나는 그저 망상을 만들 뿐이다. 이런 거짓 확실함에 토대를 두면 여기에서 비롯된 모든 귀결들은 불안하게 흔들리며 문제가 계속되는 위험으로 인도한다. - P283
자기 자신이 계속해서 전개되는 과정이라 깨달으면 우리가 븥들고 있는 "나"라는 사념에 대한 고지식한 집착이 얼마나 우매한지 알아차리게 된다. "나"는 고정불변하지도 지속적이지도 않으며 진짜 "나 자신"도 아니다. 이러한 깨달음은 우리 자신을 보호하거나 부풀리려는 불안과 걱정을 현저히 줄이고 공감의 자세로 타인을 마주하도록 하며 우리의 상호의존이 공동 창작물임을 알게 한다. - P306
하버마스가 인간의 "구조적 위해"에 대해 말하면서 이러 인해 "누구도 (...) 자신의 무결함을 홀로 주장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면 여기에 뒤이어 나는 사적 인간관계에 관여하는 사람들을 모두 공동으로 그리고 상호적으로 자기 자신과 상대방을 이 구조적 위해로부터 지키도록 노력하고 또 개별 무결함을 사로 지탱해주도록 애써야 한다고 말하겠다. 다시 말해 이는 두 당사자의 존엄을 서로서로 돌보고 지킨다는, 고유의 존엄뿐 아니라 상대의 인간적 존엄을 끊임없이 살핀다는뜻이다. - P315
페터 비에리peter Bieri는 이를 굉장히 아름다운 문장으로 정리한다.
사고하고 경험하고 행동하는 존재로서 우리의 삶은 연약하고 무너지기 쉽다. (……) 존엄을 지키려는 삶의 형태는 이런 위험을 견제한다. 그리고 늘 그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우리의 삶을 지탱해준다. (……) 그러므로 존엄성 있는 삶은 단순히 어떤 삶의 형태가 아니라 위험이라는 실존적 경험에 대한 실존적 대답이다. - P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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