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자신의 의무가 뭔지 몰라 일일이 지시 내려 주는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를 필사적으로 찾는 나라는 불행하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바로 그것이 『나의 투쟁』에 담긴 히틀러의 이념이었다. - P135

이렇듯 죽음을 우리의 직접적인 경험 영역에서 몰아내면 훗날 때가 되어 죽음 앞에 섰을 때 우리는 더한층 겁을 먹고 뒤로 물러나게 된다. 죽음은 태어날 때부터 원래 우리 삶의 일부였고, 현자는 평생을 죽음과 함께 살아간다. - P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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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이 역사를 인생의 스승으로 받아들여야한다는 말을 곰팡내 풀풀 나는 서당훈장의 잔소리 정도로 치부하지만, 그럼에도 분명한건 있다. 만일 히틀러가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을 면밀히 연구했더라면 과거와 똑같은 덫에 빠지지 않았을 것이고, 부시가19세기 영국의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잘 알고 있었더라면, 아니 최소한 소련이 초기 탈레반과 벌인 최근의 전쟁이라도 제대로 알고 있었다면 아프가니스탄 원정을 다르게 기획했을 것이다. 처칠을 허구의 인물로 여기는 영국의 골 빈 사람들과 15일이면 문제를 깔끔하게 해결할 거라는 믿음으로 미군을 이라크로 보낸 부시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둘 다 역사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현상이다. p29-30 - P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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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화는 ‘우리‘와 ‘그들‘, 권력을 더 가진 집단과 덜 가진 집단 사이에 경계선을 긋고 그 선으로부터 사회적 거리를 설정하고 유지하는 차별과 선 긋기를 병행하는 과정이다. 이 선은 중립적이지 않다. 빈민을 도덕적 타락의 근원, 두려워할 만한 위협,
‘자격 없는‘ 경제적 짐 덩어리, 연민의 대상, 이국적인 존재, 나아가 인간 이하의 존재로까지 깎아내리는 부정적인 가치 판단을 심어 주기 때문이다. 대체로 타자화 과정에서 ‘빈민‘은 자신들이 하는 행동에 대해 비난받거나, 질이 떨어져 보인다는 이유로 폄하당한다. - P119

타자화는 유형화, 낙인찍기, 중립을 가장한 범주화나 분류 같은수많은 사회적 과정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고, 그 과정에서 더 강해진다. 유형화는 특정 사회집단의 성격을 가정하고 해당 집단이 질적으로동일한 것처럼 묘사하게 만드는 꼬리표 달기 labelling의 형태로 나타나는 차별이다. 차이를 확대하고 왜곡하는 담화 전략discursive strategy인것이다. - P120

타자화는 ‘우리‘라는 표현으로 자아를 정의하고 정체성을 확인하도록 돕는다. 반대로, ‘그들‘에 대해서는 ‘유형화된 특징을 근거로 깎아내리고 목소리를 빼앗아 ‘사회적·문화적 정체성‘을 박탈하는 역할을 한다. - P121

타자화는 자기와 사회의 문제를 손쉽게 타자의 탓으로 돌리게하고, ‘빈민‘의 입장에서는 자기 자신이 문제라고 인식하게 만드는 ‘상징적 배제 전략‘으로 쓰인다. 또한 ‘빈민‘에 대한 타자화는 다른 이들에게 던지는 경고로도 작용한다. 빈곤은 이렇게 ‘하나의 유령, 즉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유익한 공포의 대상‘이 된다. ‘우리‘와 ‘그들‘의 관계에 있어서 타자화는 빈곤의 토대를 이루는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정당화한다. 또 우월함을 근거로 하는 ‘우리‘의 특권과 열등함을 근거로 하는 ‘그들‘을 향한 억압을 정당화하고, 그리하여 구조적 원인을 은폐한다.
여기서 타자화 과정에 권력관계가 각인되는 방식이 뚜렷이 드러난다. 따라서 타자화가 두드러진 곳에서는 불평등이 극심할 것이라고 짐작할수 있다. - P122

‘하층민‘ 개념을 어떻게 사용할지에 대해서는 논평자들의 입장엇갈린다. 사회학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으며 정치적으로 유해하다는 근거를 들어 아예 버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이제는 ‘빈곤‘이라는 말만으로는 빈곤 문제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불가능한 상황에서 유용한 기능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내 생각에, 자애로운 목적으로 그 용어를 쓴다는 것은 불장난이나 마찬가지다. 그렇게 병리적이고 노골적으로 타자화하는 방식으로 한 집단을 지칭하면, 사회의 나머지 구성원이 그들을 공통의 시민권으로 이어져있는 유대 관계 바깥의 존재로 인식해 배척하기 쉬워진다. 그러면 [사회의 대응이]포용적인 반빈곤 활동이 아닌 ‘처벌하기‘에 치우칠 가능성이 높아진다. - P136

허버트 J. 갠스는 낙인이 되는 ‘꼬리표‘와 서술적 개념을 구별한
"다. 그렇게 보면 ‘p‘ 단어, 즉 ‘가난poor‘과 ‘빈곤poverty‘은 서술적 개념에 속하기는 하지만, 역사적으로 보나 현재 그 단어에 담겨 있는 의미를 보나 중립적인 용어는 아니다. 그보다는 ‘불편한 구별의 어휘’의 일부로서, ‘빈민‘을 다른 존재 또는 일탈적인 존재로 만든다. ‘p‘ 단어는 ‘우리‘가 ‘그들‘에 대해 사용하는 말일 뿐, 빈곤층 스스로 쓰는 일은 거의 없다. 그들은 웬만해서는 자신이 어떻게 불리기를 원하느냐는 질문을 받지 않는다. 그렇기에 ‘[어떻게 부르면 좋을지] 질문받은 적도 없고, [그리 불리기] 를 원하지도 않는 사람들‘에게 ‘빈곤‘, ‘가난‘이라는 용어는 낙인찍는 꼬리표로 들리기 십상이다. - P137

언어에 대한 이러한 논의를 통해 대단히 많은 문제가 드러났다.
빈곤을 연구하고 관련 저술을 하는 사람들이 존중하는 태도를 가지고 ‘거리감이 덜한‘ 언어를 사용할 책임도 그중 하나다. 또 하나는 ‘p‘ 단어가 낙인을 찍는 분류의 의미를 띨 수도 있고, 도덕적·정치적 문제를제기하는 데 쓰일 수도 있다는 점이다. 둘 중 어느 쪽에 무게가 더 실릴지는 정치적·경제적 환경에 따라 달라진다. 하지만 피해자로든 악당으로든, ‘빈민‘은 타자로 간주되는 경향이 있다. 자기가 초래한 운명을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존재 또는 행위주체성 없는 수동적 관심의 대상이되는 것이다. 그 결과 잘해 봐야 ‘비빈민‘에게 동정을 얻거나 관심 밖으로 밀려나고, 최악의 경우에는 ‘돕거나 처벌하거나 무시하거나 연구할대상으로 취급받는 한편 동등한 동료 시민으로는 거의 대접받지 못하는, 공포, 경멸, 적대의 표적이 된다. - P141

하이로 루고오칸도는 권력을 가진 이들이 이런 연민으로 연대를 대체한다고 말한다. 연구에 따르면, [이 연민의 감정이 사람들로 하여금] 고통받는 이들 앞에서 무력감을 느끼게 하고, 타자화를 통해 [빈민‘을] 사회적으로 더욱 먼 존재로 만들 수 있다. - P143

언론은 전형적으로 빈곤층을 주체가 아닌 대상으로 재현하고,
그 과정에서 빈곤의 희생자라는 수동적인 표상이 강화된다. 아주 예외적인 경우가 가끔 있지만, 주류 언론에서 빈곤층을 다룰 때는 어느 정도까지는 ‘전문가‘를 통한다. ‘빈민‘에게 직접 모습을 드러내고 말할 기회를 주는 경우라 해도 주로 언론인이 제시한 의제를 다루거나, 빈곤층이 처한 상황에 대한 당사자의 분석보다는 고통에 시달리는 목소리를전하는 데 치중한다. 빈곤층은 ‘가련한 사건에 휘말린 구차한 입장‘에서 말할 뿐이다. 이처럼 빈곤층의 목소리를 제한하고 조건부로만 이들의 모습을 드러내면서 언론은 빈곤의 구조적 맥락과 원인을 탐구하는 대신에 빈곤층이 겪는 문제를 개인화하는 관행을 강화한다. 이는 사회 전체가 빈곤의 원인을 이해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 P145

제도적 낙인은 특히 선별적 급여 수급자에게 (미국과 영국 같은 자유주의 복지국가에서 더 두드러지게) 붙을 수 있다. 복지 수급자를 비인간화하고 모독하며 심판하는 듯한 태도로 급여를 집행하는 경우에는 낙인이 더강해진다. 그렇지 않은 경우라도 일반적으로 빈곤층의 삶을 좌우하는 권력을 가진 국가 기관에 고용된 공무원 및 전문가와 상호작용할 때 낙인과 비인간화를 경험한다는 것은 익숙한 이야기다. "[그들의] 삶과 경험을 존중하지 않는 태도로 서비스를 제공하며, ‘빈곤주의‘를 드러내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그런 사람들을 상대하다 보면 낙인찍기와 징벌적 대우를 당할까 두려워 공공 서비스를 회피하게 되는 ‘대가‘
를 치를 수도 있다. - P146

한편 낙인에 대한 반응이 내면화되고 개인화되면 그 결과로 수치심이 뒤따르기도 한다. 국가 간 비교 연구를 진행한 워커와 동료들은 ‘수치심은 빈곤의 보편적인 부수물‘로서 ‘빈곤-수치심 결합체‘를 만들어 낸다고 밝혔다. - P148

수치심은 굴욕을 동반하는데, 굴욕은 "단순히 결핍을 개인이나 집단의 탓으로 돌리는 행위만이 아니라, 이러한 열등함을 공개적으로 단언하는 행위에 의해 발생"한다. 굴욕은 ‘빈민‘을 실패자로 규정하는 만연한 소비주의와 결합하여, 일상적인 만남과 구조적인 불평등 모두에서 생겨날 수 있다. - P148

특히, 어린이에게 그러한데, 어린이 빈곤에 관한 리지의 연구에 따르면 (형편에 맞지 않더라도) 유행하는 옷을 제대로 갖춰 입어야만 ‘무리 안에 속하고‘, 우정을 지키고 괴롭힘과 사회적 배제를 피할 수 있다. 리지의 연구, 그리고 이보다 앞선 미들턴 등의 연구 모두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새로 형성된 정체성을 표현하는 데 의복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일반적으로 빈곤과 연관된 수치심과 굴욕은 ‘사회관계에 깊숙이 파고들기‘ 때문에, 개인적 정체성이 형성되는 과정에 놓인 이러한 연령 집단에게는 특히 견디기 어려울 수 있다. p148-148 - P148

수치심은 ‘최우선적‘이거나 ‘가장 치명적인 감정‘이라고 서술되어 왔다. 본질적으로 사회적이고 관계적인 것으로서, ‘체계적인 권력관계뿐 아니라 문화적·사회적 요소에 뿌리를 두고 점점 강화되는 순환 고리‘ 라고도 했다. 수치심과 굴욕은 이러한 감정을 유발하는 불평등과 사회적 위계를 유지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빈곤층에게 ‘사회적·정신적 고통‘을 야기하고 건강을 심하게 해칠 수 있는 ‘관계상의손상‘이나 ‘정신적 상처‘ 또는 ‘존엄 손상‘을 유발하는 요인이며 정체성, 자존감, 자긍심, 다시 말해 우리가 자기를 느끼는 방식에 고통스러운 상처를 안긴다. - P149

앤드루 세이어

"수치를 경험한다는 것은 부적합하고 무가치하다고 느끼는
것, 어쩌면 존엄와 온전함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 P149

수치심과 굴욕은 자긍심을 앗아 가고, 빈곤을 경험하는 많은 이의 정체성을 부정한다. 사회적 정체성 연구를 진행한 이차드 젱키스는 낙인에 대한 고프먼의 분석이 "타인은 우리의 정체성을 그저 인지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구성한다. 이름 짓기나 범주화만이 아니라, 우리에게 반응하고 우리를 대우하는 방식을 통해서 그렇게 한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고 말한다. 꼬리표 붙이기를 통해 정체성이 규정되는 방식은 정해져 있지 않지만, 젱키스는 "대중의 이미지가 곧 자아상이 될 수 있다. 우리가 느끼는 인간성은 우리를 범주화하늠 타인의 판단에 좌우된다. - P150

‘존엄과 존중’을 향한 갈망은 정치학자와 사회학자들이 ‘인정의 정치’라 부른 것이 근간이 된다. 인정 이론을 주장한 악셀 호네트는 인정 추구가 ‘굴욕 또는 경명의 경험’에서 비롯한다고 말한다. - P150

리처드 세넷은 인정과 존중의 결여가 무엇을 뜻하는지 이렇게 설명한다. ‘노골적인 모욕만큼 공격적이지는 않지만, 존중 부족으로 받는 상처는 그와 비슷할 수 있다. 타인을 모욕하지 않지만 인정을 보여 주지도 않는 경우, 그 상대는 존재 자체로 중요한 온전한 인간으로 보이지 않게 된다. 인간 존엄과 빈곤에 관한 소논문에서 클레멘스 제드마크는 이처럼 외면당한 타자에게서 ‘인간적인 측면을 보지 못하는 상황’은 빈곤 경험에서 흔하게 나타나며, 이런 상황이 "자존감의 원천인 존엄의 감각을 약화시킨다"고 말한다. - P151

‘지식의 병합’ 사업 보고서에는 빈곤층을 ‘해결해야할 문제가 아니라 인간으로’ 인식해야 한다고 강조한다.151

베리스퍼드 등의 연구에서는 "빈곤이 존엄을 앗아간다. 빈곤 상태에서는 어떠한 존엄도 지킬 수 없다"고 설명한다. - P152

존 롤스는 자존감이 ‘아마도 가장 중요한 기본적 재화’일 것이라 말했다. 센은 자존감이 핵심적인 기능화하고 판단했으며, 그 중요성은 누스바움이 더욱 깊이 핵심적인 기능화라고 판단했으며, 그 중요성은 누스바움이 더욱 깊이 있게 조명했다. 누스바움은 ‘자존감을 지키고 굴욕당하지 않을 사회적 기반, 타인과 동일한 가치를 지닌 존엄한 존재로 대우받을 가능성’을 인간에게 중요한 기능적 역량의 목록에 추가했다. 빈곤상태로 사는 사람들을 고려한 이 원칙을 지키면 그들이 일상적인 사회관계 속에서 받는 처우가 잘라디고 사회의 여러 조직도 영향을 받게 된다. - P153

그렇지만 동등한 가치와 인간 존엄의 인정이라는 원칙을 대부분 입으로만 떠들고 만다. 사회경제적 불평등이 만연한 현실에서는 아무 소용 없는 짓이다. 앤 필립스가 말했듯이, "충분히 부유한 사회인데도 극도의 빈곤을 외면하거나, 자의적으로 한 가지 기술에 다른 기술의 100배에 잘하는 임금을 지급한다면, 그 사회는 시민을 동등한 가치를 지닌 인간으로 인식하지 않는 것이다. 부유한 이들은 빈곤층을 자기와 똑같이 ‘존엄한 존재’로 느끼기에는 사회적으로, 때로는 지리적으로도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다. 존중이 ‘불평등의 경계’를 넘어서기가 쉽지 않다. 존엄의 부정은 도덕적이 ‘계층적 상처’를 유발한다. p153-154 - P153

미국과 영국 같은 이른바 능력주의 사회에서 "존중의 도표에 실패자의 자리는 없다." 빈곤은 곧 실패를 똣한다. 복지 급여 수급을 ‘의존성’이라는 낙인과 동일시하는 태도가 자긍심의 껍질을 또 한 겹 벗겨 낸다. - P154

벨 훅스는 빈곤 상태로 사는 사람들의 ‘존엄과 온전함’을 긍정하려면 ‘삶의 모든 측면에서 [그들을] 재현하는 방식을 구조적으로 변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존엄하게 재현될 권리’를 포함하는 문화적 시민권이라는 더 큰 문제를 제기한다. 얀 파쿨스키에 따르면 "문화적 시민권에는 ‘다르게’ 존재할 권리, 낙인 찍힌 정체성의 새로이 가치를 부여할 권리가 포함 된다." 그러나 ‘빈민’에게 있어서는 [‘다르게’보다는] ‘똑같이’ 존대할 권리을 의미한다. 다르게 보이는 데 대한 두려움은 어린이의 빈곤 경험에서 유독 강하게 나타난다. - P155

‘빈민’을 타자로 정의하는 권력이 지배적인 집단에게 있다는 것이다. 인정과 권력관계는 떼어놓을 수 없다. 언어의 이면에는 ‘이름 바꾸기의 정치’만으로는 해소되지 않을 권력관계와 문화적 태도, 경제적 범주가 깔려 있다. 이 말은 곧, 훅스가 인정하듯이, 그리고 이 책의 결론에서 전개할 내용처럼 재현과 인정의 정치를 재분재의 정치와 연결시켜야 한다는 뜻이다. - P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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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도어 아도르노가 말했듯이

‘고통에 목소리를 빌려준다‘ 는 것이 고통받는 이들이 내는 ‘진실‘의 목소리를 지우는 것이어서는 안된다. - P14

빈곤은 예방 가능한 ‘사회적 해악social harm‘이다. - P13

빈곤의 개념을 잡을 때 개인이 가진 물질적 자원, 특히 소득 수준에 주목하는지, 아니면 생활수준과 사회 활동이라는 측면에서 그 사람이 실제로 영위하는 삶의 수준에 주목하는지에 따라 정의도 달아진다는 것이다. 스테인 링엔이 말했듯이 ..(중략)..이후에 살펴볼 타운센드(피터 타운센드)도 그랬다. 그러니 링엔이 이 두 방식을결합해 ‘자원이 불충분하여 박탈 상태로 살아간다는 의미에서 저생활수준low standard of living‘을 빈곤으로 정의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간단히 말해, 누군가 ‘저생활수준과 저소득으로 사는 경우‘에 그 사람은 ‘빈민‘이라는 것이다.
토니 앳킨슨은 링엔과 비슷하지만 더 근본적으로, 빈곤 정의를생활수준에 주목하는 방식과 시민으로서 ‘최소한의 자원을 누릴 권리‘ 에 주목하는 방식으로 각각 구별한다. 생활수준을 고려하는 방식은 여러 문헌에서 흔히 나타나며, 실증연구empirical research의 기준으로 쓰인다. 최소한의 자원을 누릴 권리에 주목하는 방식은 소득 척도상 빈곤여부를 가르는 특정 지점을 설정하는 방식, 또는 사회부조제도에서 규정하는 소득 수준을 바탕으로 빈곤을 측정하는 방식에 암묵적으로 담겨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권리가 빈곤 정의에 명시되는 경우는 흔치 않지만 전반적인 빈곤 개념화에서는 하나의 구성 요소로 가치가 있다. 우리가 ‘시민으로서‘, ‘적극적인 자유를 보장받는 차원에서 사회참여의 전제 조건이라고 볼 만한‘, ‘자기 몫의 최저 소득을 배분받을 자격이 있다‘ 는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이처럼 빈곤을 인권과 시민권의 부정으로 개념화하는 경향이 점차 늘고 있다. - P31

센(아마르티아 센)에 따르면 돈은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일 뿐이며, 돈으로 사는 재화와 서비스 또는 ‘상품‘은 기능화를 달성하는 특정한 방법에 불과하다. 기능화를 달성하는 데 돈이 어떤 약할을 하는지는 사회마다 다를 것이다. 사회에서 어떤 재화와 서비스가 얼마만큼 상품화되느냐(즉 돈으로 교환되는냐)에 따라 돈의 쓰임이 달랒기 때문이다. 게다가 여기에 개인이 역량과 기능화를 위해서 돈을 사용하는 방식도 영향을 미친다. 연령, 성별, 임신 여부, 건강, 장애 또는 대사율과 신체치수까지, 개인적 필요의 수준과 속성을 좌우할 수 있는 다양한 요소에 따라 역량·기능화와 돈의 관계가 달라진다. 예를 들어 어떤 장애인이 비장애인보다 소득 수준이 더 높다고 해도 그 사람이 기능할 수 있는 역량은 비장애인보다 낮을 수 있다. 비슷한 수준의 기능화를 이루는 데에 필요한 것이 비장애인보다 더 많고, 이런 필요를 채우는 데에 추가 비용이 들기때문이다. 그러므로 빈곤을 소득과 실질 생활수준이 아니라 "최소한으로 용인 가능한 [생활]수준에 도달할 기본 역량의 상실"이라는 측면에서 정의해야 한다는 것이 센의 주장이다. p33-34 - P34

아래는 존 바이트윌슨이 인간의 필요에 담긴 사회적·심리적 측면을 강조하며 내린정의다.

[인간의 필요란] 한 사람이 자기가 속한 사회에 온전히, 자발적으로, 충분히 참여하는 성인으로서 장기간에 걸쳐 생산, 유지 관리, 재생산을 달성하는 데 필요한 무형 자원 및 물질적 자원 전반을가리킨다.] … 물질적 자원으로 신체를 지탱할 수는 있지만, 인간성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전반적인 사회적·심리적 자원이 필요하다.

또 다른 글에서 바이트윌슨은 ‘존엄을 확보하고 유지하며, 자기가 속한 사회에서 존중받을 만하고 인정받는 위치를 차지할 가능성을부여한다는 면에서‘ 이러한 자원이 정당성을 갖는다고 정의한다. 사회참여를 통해 사회적 필요를 채우지 못하면 수치를 당하고 그로 인해 고통을 겪는다는 사실이 여러 사회에서 확인되었다. - P44

필요의 본질을 설명한 내용을 보면 타운센드는 확실히 필요가사회적으로 형성된다는 관점을 지닌 쪽이다. 인간은 신체적인 동시에 사회적인 존재로서, 우리의 필요에는 생리적 필요뿐 아니라 다양한 사회적 기대와 책임, 그리고 법제도적 원칙이 반영된다. - P45

타운센드의 주장에 담긴 또 하나의 요소는 영양과 같은 생리적필요조차도 사회적·역사적·문화적 맥락과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섭취하는 음식의 양과 비용은 사람들이 수행하는 사회적 역할과 보편적인 식생활 관습뿐 아니라 생산 및 유통 접근성에 따라 그 사회에서 확보할 수 있는 음식의 종류에도 좌우된다. 간단히 말해음식은 어떤 사회에서든 ‘사회화‘된다. ..… 식생활에서 최소한의 필요를 충족할 비용을 산정하는 일은 어느 사회에서나 한 사람에게 부여되는 모든 역할, 참여해야 하는 관계, 관습을 이행하는 데 드는 비용을 산정하는 일만큼이나 어려운 문제다.

필요는 물직적이면서 심리사회적이다. - P47

도열과 고프는 기본적인 인간의 필요가 "성공적으로 사회적 삶에 참여하기 위한... 보편적인 전제 조건"이므로 인간의 필요를 보편적인 것으로 개념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전제 조건이란 (사회에 참여하기에 충분한) ‘신체적 건강‘과 ‘행위주체성을 자율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상태‘ 또는 ‘무엇을 해야 하며 그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잘 알고 선택할 역량‘을 가리킨다. - P55

EU의 빈곤 ‘해설서‘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사회적 배제는 사람을 사회의 가장자리로 몰아가는 과정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하는 개념이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은 자원과 기회에 접근하기 어렵고 평범한 사회적·문화적 삶에 참여할 수 없어 소외되고 무력하고 차별받는다고 느끼게 된다. - P59

‘절대‘와 ‘상대‘라는 개념은 단순히 빈곤을 서술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서로 대립하는 정치적 입장을 나타내기도 한다. 절대주의적 정의는 전통적으로 정치적 ‘우파‘와 관련이 있고, 상대주의적 정의는 ‘좌파‘와 관련이 있다. 데이비드 그린이 주장하듯이, "빈곤을 정의하는 저자의 태도에서 인간의 조건에 대한 저자의 근본적인 전제, 그리고 그 사람이 선호하는 정부의 역할이 나타난다." 빈곤을 절대주의적 개념으로 협소하게 정의할 경우에는 사회적 필요와 의무 및 사회 전반이 당연시하는 생활 수준을 고려한 정의에 따를 때에 비해서 빈곤 퇴치 정책에 수반되는 정부의 역할과 자원이 상당히 제한된다. p62-63 - P63

개인주의적 관점에서는 빈곤의 주된 책임을 ‘빈민‘에게 지우는 반면, 구조적 관점에서는 전 지구적 수준에서 지역적 수준에 이르기까지 경제적·사회적·정치적 구조와 그 과정이 빈곤을 유발하고 영속시키는 방식을 지적한다. 이러한 해석과 정의(와 이를 바탕으로 하는 측정), 그리고 전반적인 개념화가 한데 결합해 ‘빈곤‘이라는 현상에 대한 정책적 대응을 형성한다. - P64

"사려 깊은 부유층이 빈곤 문제(불평등)라고 부르는 것을,
사려 깊은 빈민층은 부의 문제(불평등)라고 부른다"_R. H. 토니 - P87

부당할 정도의 불평등은 필연적인 결과라 할 수 없다. - P88

여성 빈곤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려면 노동시장과 복지서비스,
생활 보조 제도를 조합하여 [여성] 노동시장 및 국가로부터 적정한 독립 소득을 확보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정책을 수립하는 동시에 성별화된 노동 분업에 맞서는 행동을 취해야 한다. 독립 소득을 확보하면 자율적으로 가구를 구성할 능력이 생길뿐 아니라 동반자 관계에서의 경제적 지위도 강화된다. 이러한 조건은 가정 폭력과 학대를 겪는 경우에 특히 중요하다. - P99

인종주의는 빈곤을 구조적으로 분석하지 않고 개인적인 ‘복지 의존‘으로 연결 지어 흑인에 대한 고정관념과 낙인 형성에 일조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복지‘와 흑인을 인종주의적으로 연결 지어 ‘복지‘ 수급자에게 낙인을 찍을 수도 있다. 이러한 이중과정은 미국에서 가장 뚜렷이 나타난다. 미국에서는 "빈곤을 인종화하는 것이 빈민을 정치적으로 비합법화하고 진압하는 데 핵심적인 요소로 쓰"였고, 그리하여 근원에 깔린 부의 불평등은 가려졌다. - P101

흑인 하층민 관념은 기존의 인종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데 기여했을 뿐 아니라 도심 지역 흑인을 비인간화하고 온갖 사회적 해악의 원인을 그들에게 돌리게 했다. - P102

장애인이 노동시장에서 불리한 지위에 처하는 것은 개인의 역량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작업 공간과 대중교통 구조를 적절히 조정하지 못한다든지 하는 제도적이고 환경적인 차별 때문이다. 빈곤은 그런 제도적 차별이 빚어내는 결과 중 하나다. 장애와 성별 부정의가 교차하는 상태에 놓인 장애여성은 "장애 남성 및 비장애 남성과 여성보다 경제적으로 더 어려운" 처지에 놓일 가능성이 더 높다. - P105

계층과 ‘인종‘은 어린이 빈곤의중요한 결정요인인데, 그럼에도 영국에서는 어린이 빈곤의 인종적 유형화, 그리고 ‘집시‘ 등 소수 유랑인 집단, 난민, 망명 신청자 집단에 속하는 어린이 특유의 취약성이 지나치게 간과되곤 한다. - P107

어린이 권리라는 관점에서 "어린이에게 정말로 중요한 것은 유년기의 행복이다." - P108

요컨대 열악한 물리적·사회적 환경은 개인에게 빈곤이 미치는 영향을 증폭하고, "저소득 생활을 더욱 고통스럽게만든다. " - P111

빈곤이 지리, 불평등, 사회적 범주, 생애에 따라 형성되는 방식을 이해하면, 빈곤의 바탕을 이루는 구조적인 유발 요인과 다양한 빈곤 경험이 눈앞에 드러난다. 이는 곧, 빈곤 퇴치 정책은 빈곤의 밑바탕을 이루면서 교차하는 불평등 문제에 대응하고, 성별, ‘인종‘, 장애를 아우르는 평등 및 반차별 전략을 담아야 한다는 뜻이다. 빈곤 경험에 있어서 장소가 갖는 중요성을 감안해 구역에 기반한 정책을 요청하는 목소리가 있다. 그러나 이렇게 접근할 경우 해당 구역에 대한 낙인찍기가 강화될 수 있다는 점에 주의해야 하고, 이런 정책을 빈곤의 전반적인 구조적 원인에 대응하는 거시적인 정책의 대체재로 활용해서는 안 된다. - P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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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는 급속히 팽창했고, 이제 인류의 절반 이상이 스스로 식량을 생산하지 않고 도시에 살게 되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농촌에 남게 된 사람들 대부분이 도시의 생활을 모방하고자 할 뿐 아니라, 날마다 텔레비전에서 보는 도시생활의 기쁨에서 소외된 것에 불만을 품고 있다는 사실이다.
인간이 도시라는 환경 속에서 면대면(面對面) 공동체의 정서적 연대감(또는 압박감) 없이도 살아갈 수 있을 것인지는 21세기의 핵심적인 사회문제가 될 것이다. 지금까지 인류의 생존은 농촌마을의 회복력에 의존해왔다. 그런 공동체가 최근에 자율성과 근로의욕을 상실했다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존재양식을 규정하던 틀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는뜻이다. 농촌의 관습과 마을공동체 내에서 개인이 차지하는 위치는 한때 일상적인 공동생활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했다. 그것을 대신할 만한 것이익명성을 띠는 도시생활에서 발견될 수 있을지는 아직까지 명확치 않다. - P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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