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도 얘기했듯 나는 ‘정상‘이라는 단어가 불편하다. 관습적인 것이 정상인가. ‘정상‘ 대신 ‘관습‘이라는 단어로 배치해보면 많은 것들의 부조리가 확실하게 보인다.
인간은 총체적 존재이다. 다만 그 총체성에서 누군가 필요한 부분만 뽑아 분류화한다. 그 ‘누군가‘는 누구인가.
서툴고 성근 글이었지만, 글을 쓸 때마다 주위 환경이 재배치되었다. 이혼이 불행한 게 아니라 정상가족 이데올로기가 견고한 사회가 불행하다는 것, 여자의 도리를 따라야 하는 게 아니라 성별 이분법과 그에 따른 차별과 배제가 부조리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외면했던 나의 입체적인 면도 생생하게 살아났다. 나는 학교밖 청소년이었기에 일찍이 제도권 밖에서 살아갈 다양한 방식을 모색할 수 있었고, 정상 궤도라고 불리는 것을 이탈했기에 차별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감각을 기를 수 있었다. 나는 이혼한 집 딸. 전문대 출신, 성적으로 문란한 여자라는 몇 가지 단어로 간편하게 설명되는 존재가 아니었다. 밀크티와 공포영화, 비 오는 날, 동물, 따뜻한 대화, 침대에서 뒹굴뒹굴하며 책 읽는 걸 좋아하고, 뭔가 이뤄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자주 우울하고, 주기적으로 모든 걸 내려놓고 도망가고 싶어 하는, 규정할 수 없는 복잡한 무엇이었다. 쓰는 과정을 통해 나는 배웠다. 사람은 몇 가지 키워드로 고정되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불확실한 존재라는 사실을.
내 세계를 타인에게 보이는 일, 타인의 세계를 간접적으로 경험하는 일. 타인과 나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에 고개 돌리지 않는 일. 나에게 읽고 쓰는 과정은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한 구체적인 수단이었다. 아직 나에게도 깨지 못한 편견이 많고, 사회에도 깨지지 않은 침묵이 많다. 강요된 평화가 아닌 정직한 불화를 위해, 나는 앞으로도 계속 쓰는 사람이고 싶다.
내 몸을 긍정하는 과정은 읽고 쓰기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내게 강요된 불합리한 감정을 의심하고 재배치하면서 글을 쓸 때, 기억 속 경험은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었다. 경험은 하나의 단면만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수치스럽게 여겼던 경험이 사랑이기도 했고, 사랑이라고 믿었던 경험이 폭력이기도 했다. 나는 안다. 내 몸과 감정을 세심하게 돌볼 때, 경험은 지워버리고 싶은 과거가 아니라 지금의 나를 만든 토대가 된다는 사실을. 이제 나는 첫 키스의 기억을 위협이 아닌 위로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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