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딩 ㅣ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46
문진영 지음 / 현대문학 / 2023년 4월
평점 :
지원은 교정보는 일이 좋았다.저자를 관리하고 팀원들을 챙기고 보도자료를 쓰는 일 같은 건 마지못해서 했다. 자리에 꼼짝 않고 앉아서 원고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깊은 물 속에 잠겨 있는 것처럼 주변 소리가 서서히 뭉뚱그려지고 멀어졌다. 그 느낌이 좋았다. 퇴근해서도 원고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고요하게 고여 있는 삶을 흩뜨리는 일은 무엇이건 하고 싶지 않았다.
p.018~019
그러면 안 되나. 집이건 사람이건, 그냥 가만히 허물어져가도록 내버려두면 안 되나. 지원은 생각했다.
p.020
눈이 또 오려나 봐요.
그렇군요.
지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큰 눈이 오기 전의 하늘은 지원도 잘 알고 있었다. 구름과 하늘이 한 덩어리가 되어버린다. 그러다 눈이 내리기 시작하면, 수평선도 지평선도 점차 희미해지다가 결국에는 사라진다.그런 풍경 속에 서 있으면, 자신도 그대로 섞여 지워질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 느낌이 문득 그리워졌다.
p. 029
아니, 죄책감이 들어요.죄책감이에요.
왜 죄책감이 드나요?
상담사가 물었다. 지원은 자신의 손등을 내려다보면서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아버지가 나한테 잘못한 건 없잖아요. 잘못한 게 없으니 용서할 수도 없는데, 용서가 안 돼요. 그게 미안해요. 미안하고 죄책감이 들어요.
p.035
그때 지원은 이곳의 공기를 숨 쉬는 것마저 불쾌하다는 듯이 얼굴을 찌푸리고 다녔다. 정을 떼려는 사람처럼 주미에게 차가웠고, 주미는 그때 차가움에도 데일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p.060~061
귀가 아니라 다른 무엇으로 듣는 건 어떤 느낌일까. 그토록 먼 곳에서부터 들려오는 무수히 많은 소리 중에서 나만을 위한 메시지를 어떻게 구별해 날 수 있는 걸까.
p.105~106
영식이 비틀거리며 방파제 위로 올라서는 순간, 주미가 영식에게 달려와 덥석 안겼다. 조그맣고 따뜻한 몸이. 그때 영식은 주미에게 안긴 채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주미는 잊었을지도 모르지만, 영식은 잊지 않았다. 영식이 술을 끊은 건 그때부터였다.
p.129
문득 생각난 듯, 쑤언은 주머니에서 귤을 꺼내 계단참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고래를 닮은 신을 향해 기도했다. 떠난 이들에게는 깊은 안식을. 남은 이들에게는 폭설을 견딜힘을 주시길.
p.152
소설속에 깊게 담겨졌다가 빠져나왔다.
문체 하나하나가 잔잔한 파도 같아서, 그 파도에 몸을 맡기다보니 어느새 바다 한 가운데까지 와버린 기분이다.
보드에 뭔가 부딪혀 상처가 나면 그걸 딩이라고 부른다.서핑을 하면 딩 나는건 당연한거고,그건 내가 오늘도 파도로 뛰어들었다는 증거라는 P의말...
다섯명의 등당인물은 모두 '딩'난 인생을 살고있다.
소설이 지원에게서 주미에게로, 주미에게서 재인에게로,제인에게서 영식에게로,영식에게서 쑤언에게로,그리고다시 쑤언에게서 지원으로 넘어가는 방식이 너무 좋았다.
상처를 입고 살지만 함께 아파해줄 사람이 있다는거..온기를 나눌 존재가 있다는거..
주미를안고 엉엉 울었다는 영식이의 마음이 너무나 이해되서, 그 작은 아이가 주는 따뜻함이 너무 느껴져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나도 딩났다! 그래도 따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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