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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의 위스키 성지여행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이윤정 옮김, 무라카미 요오코 사진 / 문학사상사 / 2001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만약 우리의 언어(言語)가 위스키라고 한다면, 이처럼 고생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나는 잠자코 술잔을 내밀고 당신은 그걸 받아서 조용히 목 안으로 흘려 넣기만 하면 된다. 너무도 심플하고, 너무도 친밀하고, 너무도 정확하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우리의 언어는 그저 언어일 뿐이고, 우리는 언어 이상도 언어 이하도 아닌 세상에 살고 있다. (p.26)
하루키는 순전히 본 고장에서의 위스키를 즐기기 위해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를 찾는다. 스코틀랜드의 몰트 위스키를 맛보면서 그는 이 여행을 행복해한다. 워낙에 일본 보다 해외에서 보내는 기간이 더 긴 하루키지만, 그는 그가 하는 모든 여행에 목적을 갖는다. 우동만 줄기차게 먹어대기도 하고 동물만 보고 돌아다니기도 하는것처럼. 그리고 위스키를 먹기 위해 여유롭고 한가로운 이곳, 스코틀랜드를 찾는다. 사진만 보아도 이곳이 얼마나 여유로운지를 한 번에 알 수있다. 이런곳에서 위스키가 만들어지고 있다니.
'소위 말하는 스카치 위스키는 발아한 보리로만 만들어지는 '싱글 몰트'와 그 밖의 다른 곡물을 증류한 '그레인'을 블렌딩해서 만들어진다. 아일레이에서 생산하는 것은 대부분 싱글 몰트이다. (p.42)
사진은 '보모어 증류소의 이탄을 태우는 불길' 이다. 스카치 위스키라는 것이 아, 스코틀랜드에서 나와서 스카치 위스키구나, 하는 생각이 이 책을 읽으면서 불쑥 튼다. 그래서 스카치 위스키라고 하는구나. 마찬가지로 아일랜드에서 만들어지는 게 아이리쉬!! 그런건가, 그런거였나! 그가 찾아간 곳은 스코틀랜드의 아일레이.
싱글 몰트도 각자 저마다의 개성이 있다고 하는데, 위스케에서는 '해초향'이 난다고 한다. 이런 한가로운 바닷가 풍경을 보노라니, 이 지역에서 만들어지는 위스키에 해초향이 나지 않을리가 없다. 해초향이 난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지 않은가. 다른 모든 주류들이 그렇듯 위스키도, 하루키의 말대로, 본고장에서 가장 궁극의 맛을 자랑할 수 있는 것 같다. 그곳의 날씨와 풍경, 이 모든것들이 위스키의 맛을 최상으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그 위스키를 그대로 품 안에 가지고 와 거기가 아닌 전혀 다른 곳에서 뚜껑을 따고 향을 음미한다면, 그곳에서 맡을 수 있는 고유의 향이 나지 않을 것 같다. 그것이 자연스런 이치.
사진은 '보모어 증류소의 '플로어 몰팅'의 명인들.
보통 6월에서 9월까지는 강물의 온도가 올라가 위스키를 만들기에 적당하지 않기 때문에, 이 때의 위스키를 만드는 이 지역의 일꾼들은 할 일이 없어진다. 그들은 그 동안에 집의 페인트칠을 한다는 데, 그래서 이곳의 벽은 언제나 말끔하게 칠이 되어 있다고 한다. 다같이 일하고 다같이 한가로울 수 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마음을 훈훈하게 한다.
사진은 보모어 증류소의 플로어 몰팅 과정.
이 증류소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대두분 아일레이에서 태어나 아일레이에서 자란 사람들. 그들은 술통을 두드려 그 소리로 술이 익은 정도를 알아낼 수 있다고 한다. 위스키를 만드는 데 온 심혈을 기울이는 사람들, 그리고 그런 자신을 당당하고 자랑스레 여기는 사람들. 그들이 만드는 위스키는 당연히 맛이 좋겠지. 나야 위스키의 맛을 잘 알지 못하지만, 위스키 고유의 향을 맡고 또 마셔보면서 음미하고 싶어졌다. 이 술은, 결코 허투루 만들어진 술이 아니라는 굳은 생각.
"이렇다 저렇다 말하기 전에 먼저 마셔보라구. 우리들이 하려는 일이 무언지 위스키를 마셔 보면 알 수 있으니까." (p.82)
자부심이 묻어난다. 위스키를 마셔보면 그들이 하고자 했던 게 무엇인지 알 수 있다니.
"모두들 아일레이 위스키의 특별한 맛에 관해 이런저런 자잘한 분석을 하지. 보리의 품질이 어떻다느니, 이탄의 냄새가 어떻다드니 하고. 분명 이 섬에서는 질 좋은 보리가 나지. 물맛도 훌륭해. 이탄도 풍부하고 향이 좋아. 그건 틀림없는 사실이야.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아일레이 위스키의 맛을 설명할 수 없어. 그 매력은 해명할 수가 없는 거지. 가장 중요한 것은 말이지, 무라카미씨, 가장 나중에 오는 건 사람이야. 여기 살고 있는 우리가 바로 아일레이 위스키의 맛을 만드는 거야. 섬사람들의 퍼스낼리티와 생활양식이 이 맛을 만들어 내는 거지. 그게 가장 중요해." (p.87-90)
이 지역의 모든 특성들이 좋은 위스키를 만들었다.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이 위스키를 만드는 사람들.
이제 그는 아일랜드로 넘어왔다. 이곳 역시 조용하고 한적하기는 마찬가지. 그는 '수줍고도 온화한 분위기' 라고 표현했는데, 양과 소도, 레스토랑도, 길의 고양이도 그 표현 그대로를 닮아 있다.
하루키는 오후 네 시쯤 숙소에 짐을 풀고 펍을 찾아가 맥주를 마신다고 했다. 이 사진도 역시 펍 에서 찍은 것. 사람들이 저녁 식사를 하기 전 들러서 간단히 술을 마시는 곳. 한가로운 곳에서 여유롭게 사람들에게 원하는 술을 제공한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펍을 찾는 사람들중 어떤 이들은 그 펍의 단골이다. 주머니에서 동전 몇 개를 꺼내 올려두고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아도, 바텐더는 그 동전들을 쓸어 담고 손님들이 원하는 위스키를 정확히 따라주기도 한다.
혼자서 펍을 찾고 레스토랑을 찾는 것, 그곳에서 조용히 책을 읽으며 맥주나 와인을 한 잔 하는 것은 내 로망이기도 한데, 아직까지 실천해 본 적은 없다. 그러나 나를 아는 이가 하나도 없는 곳으로 간다면, 어쩐지 용기를 내어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하루키처럼 레스토랑에 가서 저녁을 먹기 전 펍에 들려도 좋을 것이고, 잠이 안 오는 밤에 읽고 싶은 책을 한 권 들고 나가 펍에 들러도 좋을 것이다. 간단히 샌드위치를 부탁해도 되겠지. 꼭 책을 읽지 않아도 좋다. 혼자서 술을 마시는 시간은 무척 행복하지 않을까. 스코틀랜드에서의 사진들 중에서는 유독 이 펍에서의 바텐더와 손님들 사진이 마음에 든다. 술을 즐길 줄 아는 사람들이 나는 좋다.
이 책의 가장 큰 수확은 뭐니뭐니해도 하루키의 젊은 날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게 아닐까. 이 사진을 보고 너무나 젊어서 놀랐다. 대체 이 책은 언제적의 책인 걸까. 내 책장에 꽂힌 시간도 오래되었지만, 그보다 훨씬 오래 쓰여진 책이겠지. 초판 1쇄는 2001년 5월인데, 그보다 더 오래 된 책이겠지.
얼마전에 켄 로치 감독의 영화 [앤젤스 셰어]를 보다가 싱글 몰트도 저마다의 향이 있고 그것을 감별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걸 알게 됐는데, 이 책을 보니 그 영화가 떠오른다.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의 사람들은 저마다 마셔보면 이 술이 어떤 술인지를 맞힐 수 있다고 했는데, 나도 이 곳에 가서 싱글 몰트의 맛을 알고 돌아오고 싶다. 굳이 알지 않아도 술을 즐기는 데 불편함은 없지만, 향을 알고 또 맛을 알고 음미할 수 있다면, 즐기는 게 더 큰 행복으로 다가오지 않을까.
하루키는 이 책으로 술을 잘 즐기지 않는 사람들도 위스키를 마셔보고 싶어했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술을 잘 즐기지 않는 사람이 이 책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나로서는 퍽 즐거운 독서였다. 술을 즐기기 때문일까. 푹 빠져서 책장을 넘겼다. 언젠가 한 번쯤은 이 조용한 곳에 가서 소며 양이며 그리고 바다를 넋놓고 바라보다가 한적한 펍으로 들어가 싱글 몰트를 주문하는 거다.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기 전에, 펍에 있는 많은 종류의 위스키를 종류별로 다 마셔보고 싶다. 돌아올 때의 나는 술을 즐길 준비가 철저하게 되어있겠지. 생각만 해도 취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