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와 도시공원
강정혜 지음 / 서울시립대학교출판부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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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쿨 입시를 준비하면서 여러 법조인들의 에세이를 읽었었는데, 사법부의 속내같은 눈에 확 띄는 에피소드가 없어서인지 대중들에게 인기가 높았던 책은 아니지만 <정의의 여신, 광장으로 나오다>가 <법정의 역사>와 함께 기억에 남더군요.
저자께서 한옥을 짓고, 꽤 오랫동안 용산 미군기지 반환부지를 뉴욕의 센트럴파크와 같은 도시공원으로 만들고자 하는 모임에서 활동하시면서 논문을 쓰신 건 알고 있었는데, 도시공원의 중요성을 정치철학적으로 제시하는 책도 쓰셨네요.
어제 읽었던 <나이 들어 어디서 살 것인가>가 고령자들을 위한 주거공간과 커뮤니티 시설이 갖춰진 공동체를 제안했다면 이 책은 가족 외의 1차 집단이 모두 무너진 자본주의에서 개인주의와 공존하는 공동체주의가 유지될 수 있는 방안으로 도시 속 공유하는 녹지공간인 도시공원의 활성화를 제안합니다.
책의 주제는 5페이지 가량의 서문으로 잘 요약되어 있으니 서문을 보고 관심이 생기신 분들께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제가 아내와 몇년 전에 가봤던 시드니시는 외곽은 물론 고밀도 중심상업지구에서 15분 이내로 걸어나오면 관리가 잘 된 평지의 도시공원을 걸으며 동물들을 만날 수 있어서 참 좋았던 기억이 나네요.
책을 다 읽고 나니 한국의 국토환경과 아파트 위주의 주거문화를 고려했을 때, 저는 사람들 사이에 상호작용이 있는 도시를 만들기 위해서는 하나의 커다란 공원보다는, 각 생활권마다 근린공원과 함께 건폐율이 낮은 아파트단지들을 잇는 회유식 산책로로 연결된 복합커뮤니티센터(도서관+공공키즈카페+데이케어센터+실내 운동시설+공연장+로컬 식료품 가게), 그리고 지자체가 임대하는 도시텃밭을 세트로 갖추게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사는 세종시 다정동에는 1만 가구에 3만 명이 조금 못되는 주민들이 살고 있는데, 도시는 이 정도 규모마다, 군지역은 읍소재지에 이런 시설을 갖추면서 축소도시로 가면 좋지 않을까요?
예전 학부시절에 지금은 은퇴하신 정치학자 김홍우 교수님의 <서양 정치사상사> 수업을 통해 영미 보통법의 법원(法源)에 대해 배웠는데, 이 책에서 중간중간 인용하는 정치사상가들의 메시지를 들으면서 1215년의 마그나 카르타보다 2년 늦게 체결된 1217년의 삼림헌장에 담긴 공유지에 대한 접근이용권이 지금의 한국사회에 반드시 필요하다는 저자의 생각에 동의하게 되었습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가 자크 아탈리식 '관계의 경제'로 삶의 방향을 틀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평생 온라인 속 관계를 주된 정체성으로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이라 오프라인에서의 관계도 중요하고 은퇴한 직장 선배들의 모습을 보면 우리 사회에 건강한 공동체 문화가 부족하다는 점을 절감하거든요. 80년대 끝자락에 농촌마을의 공동체 문화를 살풋이나마 경험해서 더 이렇게 느끼는 것인지도 모르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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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쪽
개인주의와 공동체주의는 서로 대립되는 것이 아니다. 자율적이고 주체적인 개인이 사라지면, 공동선을 이루는 공동체도 약화된다. 개인주의의 대척점에 있는 것은 공동체주의가 아니라 집단주의 또는 전체주의이다.
34쪽
공동체가 해체되고 개인이 해방될수록 국가의 권력은 더 강화되고 전체주의로 흐를 위험이 있다. 인습의 굴레에서는 벗어났으나, 고립과 외로움으로 인하여 단 하나 남은 조직인 국가에의 귀속감을 느끼면서 파시즘이나 공산주의의 발흥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49쪽
우리 사회에서는 개인주의가 점점 팽배해져 개인은 타인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자신을 이 사회로부터 소외시키면서 자신만을 모든 문제에 대한 책임 주체로 만들어 가고 있어, 결국 개인이 할 수 없는 일은 모두 국가의 책임으로 돌리고 있는 형국이다.
그러나 개인이 해결하지 못하는 모든 문제를 국가가 해결해 줄 수는 없으며, 이익은 사유화하면서 손실은 사회에 전가하는 체제는 유지될 수 없고, 국가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은 국가의 인력과 재정의 한계와 그 집행에 있어 엄청난 거래 비용이 소요된다는 현실적인 문제가 있으며, 그런 문제 전부를 국가에 맡기게 되면 국가의 개인에 대한 지나친 간섭을 자초하는 결과가 될 위험이 있다.
133쪽
이와 같이 토지 소유권이 없는 사람들은 커먼즈라는 공유지에서 땔감, 식량과 같은 자원을 의존하였고, 이곳은 그들에게 생계수단 역할을 했고 실업이나 낮은 임금에 대한 안전망의 역할을 했다.
또한 이곳은 노인들이나, 여성들과 아이들을 위한 사회적 보장의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추수가 지난 후 이삭을 줍고 땔감을 모아 겨울을 났고 아이들은 나무 열매를 줍거나 수풀 속에서 딸기류를 땄으며, 가축인 돼지, 양을 돌보거나 목초지에서 양털을 모았다.
150쪽
산림헌장은 대표적인 커먼즈인 물, 음식, 연료, 주거지에 대한 소작인들이나 평민들의 접근이나 이용을 성문으로 권리화하여 국왕에 의한 공적 통제와 귀족에 의한 사적 통제로부터 보호하였다는 역사적 중요성을 지닌다. 커먼즈에 대하여 관습 또는 관습법으로 내려오던 것이 성문법화되어 그 존재를 공시하고 명문화한 것이다.
오늘날 도시의 도시민들에게는 커먼즈의 한 종류인 공원에 대한 자유로운 접근이나 이용권이 있다는 논리와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164쪽
우리나라의 전체 국토의 63.5%가 삼림이다.
(중략)
그런데 시민들이 별도의 시간이나 비용을 들지 않고 실생활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가로수, 학교숲, 근린공원 등 밀착용 도시림(생활권 도시숲)은 전체 국토의 0.5%, 전체 도시림 면적의 3.7%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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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들어 어디서 살 것인가 - 건강하고 자립적인 노후를 위한 초고령 사회 공간 솔루션
김경인 지음 / 투래빗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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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15년쯤 후에는 제 문제가 될 일이고, 제 목표가 최대한 오래 제 집에서 살다가 죽는 것이기에 평소에 관심있었던 주제입니다. <공간혁명>을 읽고서 신기했었는데 우리나라에도 이미 신경건축학 전문가가 계셨었다니.

일본여행을 자주 다니면서 70~80대 고령자들의 인구구조상 비중이나 일터에서의 빈도 등으로 인해 화장실이나 근린공원 등의 공중공간에서 고령자들의 신체적 능력과 불편함을 배려한 공공디자인과 시설물들을 인상깊게 봤었습니다. 교토대학교에서 공부하시고 오신 분이라 일본의 사례들을 많이 소개해주시네요.

실버타운 입주를 왜 추천하지 않는지에 대한 의견도 공감할 수 있었고, 우선은 노인이 거주하는 집부터, 그 다음으로는 노인들의 활동공간인 도시나 마을의 공용공간과 커뮤니티시설을 어떻게 바꿔야할지에 대한 제안들도 동의합니다.

저자께서는 2014년에 <공간이 아이를 바꾼다>는 책을 쓰셔서 학교의 건축디자인을 비판하시며 바꾸자고 하셨던데, 현실로 그다지 반영된게 없는 것 같습니다. 저자 분이 건축사 자격도 있으셔서 실제로 고령자 주택이나 데이케어센터 건물 프로젝트 결과를 보여줄 수 있었더라면, 아니면 대학교수로 안착해서 스피커를 쥐었더라면 초고령사회에 맞는 공간 솔루션을 좀 더 현실로 관철시킬 수 있지 않았나 싶어 아쉽네요.

이 다음 책에서는 대도시와 중소도시, 농어촌 지역의 공간적 특성에 맞는 고령자 주택이나 커뮤니티센터의 공간유형을 평면도 등을 통해서 제안해주시면서 이 책 말미에 나온 것처럼 지속적으로 세대간 교류가 일어날 수 있는 공간을 디벨로퍼의 관점을 반영해서 제안해주시면 어떨까 싶습니다.

저는 치유농업의 신체적 정신적 효과를 높이 평가하다보니 자율주행차가 보편화된다면, 도시 근교의 농촌마을에 거주하는 것도 괜찮아보이는데, 노후 귀촌자가 시골에서는 기존의 마을회관이나 주민들 모임 외에 커뮤니티활동을 하는게 쉽지 않을 것 같아서요.

세종시의 복합커뮤니티센터는 저자가 제안하는 복지시설의 복합화의 좋은 사례이긴 한데, 특별회계 재원으로 만들어진 신도시가 아닌 기존의 도시나 마을에서 어떻게 설치하고 운영비용을 부담할지 가늠이 안됩니다.

이 책에서는 투입되는 비용 대비 효과에 대한 언급이 없는데, 데이케어센터 등을 실제로 운영 중인 분의 입장도 들어보고 싶고요.

저는 가급적이면 노인들 자신의 참여와 노동으로 자신들에게 필요한 시설이나 공간을 확보하도록(자신들도 일부 건축 및 유지관리비용을 지불하고)하는 것이 그 공간에 애정을 갖고 지속적으로 참여하게 만드는 인센티브라 생각이 되어서요.

제가 어느 날 갑자기 죽을 수도 있겠지만, 가급적이면 가까운 거리는 걸을 수 있는 이동능력과, 장을 봐오고 간단한 한 끼식사를 준비하는 인지능력을 유지하면서 스스로 옷을 벗고 입을 수 있어서 머리를 감고 목욕을 할 수 있는 나이까지만 천수를 누리고 세상을 떠나거나 존엄사를 선택하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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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사람들에게 집을 떠난다는 것은 그저 장소를 옮기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삶과 기억의 일부를 포기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59쪽

벤치가 없는 것은 노인에게 신체적 심리적으로 큰 부담이 된다. 쉬어갈 곳이 없다면 피로를 우려해 외출을 꺼리게 되고, 외출 빈도가 줄어들면 신체 활동이 감소하여 근력이 약해지고, 정서적으로 위축될 수 있다. 외출은 노인에게 사회적 교류와 정서적 안정을 주는 중요한 시간이다.

69쪽

아파트 단지에는 어린이 놀이터가 필수적으로 설치되지만, 실제 이를 이용하는 어린이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반면, 늘어나는 노인의 수에 비해 노인이 운동할 수 있는 전용 공간은 거의 없다.

93쪽

이러한 분리 구조는 각 시설을 특정 집단만을 위한 배타적 공간으로 만들어 다른 집단에게는 불편하고 거리를 두고 싶은 장소로 인식되게 한다. 결과적으로 복지시설은 지역 사회로부터 소외되면서 혐오시설로 여겨지기 쉽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복지시설의 복합화가 필요하다. 복지시설이 특정 계층만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 지역주민 모두가 함께 이용할 수 있는 커뮤니티 공간으로 변화해야 한다.

105쪽

고령자가 가정에서 필요한 지원을 받으며 생활하면 장기 요양시설 입소자를 줄일 수 있어 사회적 자원을 보다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 재가 서비스와 방문 의료를 통해 고령자가 집에서 자율성을 유지하며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도록 돕는 것은 더 경제적이고 지속 가능한 대안이 된다.

146쪽

(일본의 요양시설은) 1990년대부터 1인실이 도입되었고, 2003년부터는 1인실이 의무화되었다. 자신의 공간이 침대에서 침실이 된 것이다. 1인실은 입소자의 심리적 안정감을 높이고, 맞춤형 돌봄을 제공하기 위한 필수적인 조치다.

181쪽

순환 산책로는 하루 30~40분 정도로 완주할 수 있는 1,000~2,000m의 길이로 설계하는 것이 적당하다. 이 정도 길이는 노인이 반복해서 걸을 수 있는 거리로, 꾸준히 신체 활동을 이어가는 데 큰 도움이 된다.

206쪽

셰어 가나자와의 주요 특징 중 하나는 세대 간 봉사활동을 통해 자연스럽게 교류를 유도한다는 점이다. 이곳에 입주한 학생들은 저렴한 임대료 혜택을 받는 대신, 단지 내 어린이와 고령자를 대상으로 매월 30시간의 봉사활동을 수행해야 한다. 이를 통해 각 세대가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며 자연스럽게 상호 의존적인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단지 내에 입주한 외부 사업자들도 지역 사회와의 유대 강화를 위해 최소 1가지 이상의 지역 공헌 활동을 자발적으로 계획하고 실천해야 하는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223쪽

복합화된 복지시설은 지역 경제 활성화에도 보탬이 될 수 있다. 온천, 식당, 까페 등 상업시설을 함께 운영하면 주민들의 자발적인 방문이 늘어나며, 이는 수익 창출로 이어져 시설 운영의 지속가능성을 높인다. 특정 계층에 한정된 기존의 복지시설과 달리, 복합공간은 모든 주민이 이용할 수 있어 경제적 안정성과 사회적통합을 동시에 추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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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인칭 가난 - 그러나 일인분은 아닌, 2023 우수출판콘텐츠 선정작 온(on) 시리즈 5
안온 지음 / 마티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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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가 페친님들께서 추천하신 책이라 염두에 뒀다가 보게 되었습니다. 23년말에 출간되어서 5쇄를 찍을 정도로 잔잔한 반향을 불러온 책이었더군요.
성인이 될 때까지 기초생활수급자(2023년말 기준 전국민의 4.9%)로 살아온 자신의 경험과 가족사를 서술하며, 당시 자신의 기분과 감정을 전해주는 시나 소설의 문장들을 인용하는데, 공들인 편집 덕분에 메시지가 더 깊이 전달되네요.
저자 안온님은 기초생활수급자로 살아오면서 많은 물건과 경험들을 포기해야했고, 당사자가 다 알아보고 신청하는 각종 복지제도와 혜택들에 대해서 아쉬워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책을 쭉 보니 '일인칭 가난'의 힘듬은 기초생활수급자 시절이 아니라, 집에서 벗어나기 위해 타지로 대학 진학을 하면서 독립생계를 꾸리면서 스무살도 되기 전부터 학비와 생활비를 직접 벌고, 그 와중에 알콜중독자인 부친과 장애인인 모친까지 챙기면서 살아온 기간에 대한 서술이 보여준다고 생각됩니다.
대학 장학금 수여 조건인 학점을 유지하면서, 과외를 하고, 주4회 12시간씩 무한리필 고깃집에서 서빙과 주방일을 해온, 그러다 학원강사일까지 하면서 잠잘 시간과 과제와 시험공부할 시간을 배분해야하는 고난의 행군이 길어지면서 건강하던 20대의 신체가 어떻게 망가져가는지를 서술해주는데, 26세가 맞나 싶을 정도로 쉰다고 쉽사리 나아질 것 같지 않은 질병의 이름들이 왜 계속 나오는지요.
제가 꾸준히 보고 있는 카카오웹툰 '평범한 자매'님의 <반지하 셋방>의 작가님의 경험과 겹쳐보이는 부분들도 보이더군요. 자살생존자(자살자의 유가족)들이 겪는, 족쇄와 같은 심리적 괴로움이 어떤 것인지도 조금 알게 되었고요.
미미한 금액이지만 저자 인세에 기여한 보람을 느낀 책구매였고, 이 책을 내신 저자 안온님의 마음이 치유되고, 생활도 좀 더 안정되었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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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0쪽
타인의 사정을 세심히 헤아리기엔 살아내느라 시간과 여력이 없었고, 빈곤 관련 제도의 부조리와 불평등을 조망하고 비평하기엔 내가 수급자여서 경험한 '배려'와 '낙인'으로부터 한 발 떨어져 있을 수 없어서, 그래서 이 책의 주어는 '가난'이 아니라 '나'다.
(중략)
부자가 되려는 사람들은 그토록 많은 책을 쓰고 팔고 사는데, 가난이라고 못 팔아먹을까. 더 쓰이고 더 팔려야 할 것은 가난이다.
116쪽
나는 가난을 말할 때 가족을 맨 뒤에 배치한다. 가족이 그 모양이니까 그렇게 됐지 따위의 말을 듣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불행한 가족과 가난을 세트 취급하는 클리셰가 지겹다. 내 가난은 가족이 아니라 교통사고, 알코올중독, 여성의 경력 단절과 저임금, 젠더폭력 및 가정폭력과 세트였다. 날 불행하게 했던 것은 교통사고, 알코올중독, 여성의 경력 단절과 저임금, 젠더폭력 및 가정폭력이(었)다.
122쪽
사실 진짜 부족한 것은 시간이라는 자원이었다. 다음날의 노동력을 재생산하기 위해 질 좋은 식사를 할 시간, 질 좋은 수면을 할 시간, 질 좋은 대인관계를 통해 정서적 안정을 되찾을 시간이 없었고, 미래를 계획할 시간도 없었다.
(중략)
사회적 관계를 만들고 유지하는 데에도 돈과 시간은 필수다. 내가 각종 행사를 거절하는 상용구는 하나였다. 시간이 없어서요. 이 말은 곧 돈이 없어서요, 와 동의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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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울게요, 안 죽었으니까
김진주 지음 / 얼룩소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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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출간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서 오늘 다 읽었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누구나 범죄피해자가 될 수 있으니 동료 시민들을 위한 백신같은 책을 써주셨어요.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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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울게요, 안 죽었으니까
김진주 지음 / 얼룩소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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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나왔다는 사실을 최근에 알게 되서 구매했습니다. 얼룩소는 올해 1월 15일 서비스를 종료했지만, 얼룩소의 실험과 함께 이 책을 출간한 출판사라는 사실은 영원히 기억될 겁니다.

2025년 제 첫 번째 올해의 책이고, 두루두루 널리 알리고 싶습니다. 많이 읽어주세요. 제 주변의 변호사님들도요.

회복적 사법에 대한 책들은 몇 권 읽었지만, 범죄피해자가 겪는 PTSD를 비롯한 정서적, 현실적 어려움들을 알려주고, 피해자의 입장에서 겪는 형사사법시스템의 불합리함과 대처방법에 대한 책은 처음입니다.

성실한 청년이었던 '부산 돌려차기남 사건'의 범죄피해자인 저자가 사건 당일인 2022. 5. 22.부터 수사와 1년 4개월의 가해자에 대한 형사재판의 확정까지, 범죄피해자로 겪은 대한민국의 수사와 형사사법시스템을 문제점들을 담담히 서술합니다. 읽으면서, 제가 강력범죄 피해자가 아니었던 게 참 운이 좋았구나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구형과 선고를 구별하지도 못했던 저자가 항소심에서 했던 피해자 최후진술 발언, 국회 법사위 의원들 앞에서 형사사건 피해자에 대한지원체계를 어떻게 개선해야할지 일련의 정책을 주문하는 부분을 보면서 한 사람의 의지가 얼마나 위대한지 느끼게 되었습니다.

로스쿨 입학 직전에 법제사나 법철학 책을 읽긴 했지만, 공부하면서는 공부량을 채우기 급급해서 고민없이 받아들이고 외우기만 했었습니다. 그런데, 책 중간에 저자와의 대담자로 등장하시는 법률사무소 법과 치유의 오지원 대표변호사님 말씀들을 들으면서 수사의 기밀성과 피해자의 알 권리의 균형, 피해자의 형사절차 참여권과 진술의 오염우려 사이의 긴장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수 있었습니다.

저자의 문제제기 이후로 형사사법체계의 범죄피해자 구호 및 보호제도들이 그 전에 비해 그나마 빠르게 바뀌고 있는 상황이어서 다행입니다.

부산 돌려차기남이 만기출소하는 20년 후에는 범죄피해자가 가해자의 출소일을 데스노스에 적힌 보복살인 예고일처럼 두려워하며 살지 않는 세상이 오도록, 저자 분은 지금 본업인 프리랜서 디자이너로 일하면서 다른 범죄피해자들 역시 두려움에 떨지 않는 세상이 오도록 범죄피해자 지원 모임을 개설해서 그들을 지원하는 활동을 하고 계십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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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쪽

이 책에는 뉴스에선 다 담을 수 없었던 피해자로서의 이야기를 낱낱이 적었다. 어느 불행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닌 여러분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아쉽게도 범죄를 피할 수 있는 방법 따윈 없다. 우린 모두 예비 피해자다. 대신 책을 읽고 나면 범죄피해에 잘 대응할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그러니 바이러스에 걸리지 않기 위해 백신을 맞는 것처럼 이 책을 예방주사처럼 여기며 읽어주셨으면 좋겠다. 아끼는 지인들에게도 추천해주셨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네가 꼭 끝까지 읽었으면 좋겠다.

142쪽

알고 보니 내 가해자는 <그것이 알고 싶다>에 출연한 게 두 번이었다. '부산 돌려차기 사건'이 두 번째였고, 성매매 매수남들을 대상으로 폭행, 협박, 갈취를 해서 재판에 불려간 <그것이 알고 싶다> 889회, '비열한 거리 2부-범죄소년'이 첫 번째였다. 문신을 보여주며 모텔 사장님들에게 윽박지르는 모습은 거의 복사 붙여넣기 수준이었다. 초범이라고, 촉법이라고 감형된 남자아이는 결국 전과 18범이 됐다.

264쪽

(저자가 개설한 대한민국 범죄피해자 커뮤니티의) 한 스태프는 엄청나게 열성적이었는데 자신도 범죄피해자라고 했다. 나보다 선배였다. 재판을 이미 끝내고 민사까지 끝냈다고 한다. 그래서 내심 부러웠는데 오히려 더 힘들다고 했다. 보복 때문에 힘든 걸까 했는데 민사때문이었다. 민사를 승소했는데 왜 힘들다는 건지 이해를 못했는데 변호사의 성공보수 때문이었다. 가해자에게서 민사를 승소했는데, 그 승소한 금액만큼의 몇 퍼센트를 변호사에게 줘야 했다. 그런데 문제는 가해자가 개털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가해자한테 받은 돈이 없더라도 채권은 발생한 것이기 때문에 돈을 줘야 했다. 가해자에게 받은 게 하나도 없는데 되려 성공보수 때문에 투잡을 뛰고 있었다.
(중략)
심지어 이 피해자는 소득이 높아 범죄피해를 지원받지도 못한다고 했다. 소득이 높으면 범죄피해를 안 당하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 이 피해자는 소득의 거의 대부분을 변호사 성공보수를 갚는 데 쓰고 있었다.

270쪽

지금은 범죄피해자 관련 기금을 벌금의 8퍼센트로 징수해서 운영되고 있다. 하지만 이는 현저히 적은 액수이다.

292쪽 저자가 가해자에게 쓴 '회복편지' 부분

"꼭 20년이 지나고 출소해서 갚지 않은 검찰, 국민건강보험공단의 구상권을 열심히 갚길 바라. 다시 범죄 저지르면 내가 또 찾아갈거야. 걱정하지 마, 내가 죽더라도 나 같은 피해자들이 널 쫓아다닐 거야. 20년이 지나면 많은 게 바뀌어 있을 거야. <쇼생크 탈출>의 브룩스 같은 결말을 짓지는 않을까 심히 걱정된다. 내가 너무 면회를 가고 싶었는데 다들 말려서 이 책으로 대신하는 거 서운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난 이 세상에서 네가 살아 있으면 하는 유일한 존재이니 죽을 때까지 함께하자.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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