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 티셔츠 경제학
피에트라 리볼리 지음, 김명철 옮김 / 다산북스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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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사진은 탄자니아의 만제스 시장에 진열되어 잇는 미국인들이 입던 헌 티셔츠

조지타운대에서 국제 비즈니스와 국제금융을 가르치던 저자 피에트라 리블리는 19992월 어느 추운 날 교정에서 반세계화시위를 하는 학생들에게 뭔가 중요한 것을 잘못 알고 있음을 말해주고 싶어 이 책을 구상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책을 쓰면서 저자는 세계화 논쟁의 양 진영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함께 인간의 생존환경 개선에 공조하고 있음을 스스로 깨닫게 되었다.

 

저자는 1999년 봄 플로리다주 포트 로더데일 해변의 월그린 매장에서 5.99달러짜리 티셔츠를 하나 산다.그 티셔츠의 일생을 추적하는 것이 이 책의 내용이다. 서부 텍사스의 목화농장에서 수확된 목화 수확물 중 면사를 짜는 린트 500그램이면 티셔츠 3장을 짤 수 있다고 한다. 나머지는 동물사료, 튀김용 기름, 셀룰로오스 등으로 소비되고. 조면기를 거쳐 볼륨을 줄이기 위해 잔뜩 압착된 린트는 트럭과캘리포이나 롱비치 항구를 통해 상하이의 면방적공장으로 보내진다. 그리고 그 옆의 재봉실에서 만들어진 티셔츠는 다시 미국으로 수출되고, 나중에 구매자가 수거함에 버리게 되면 수거업자에 의해 분류되어 아프리카까지 세계각지로 수출되어 다시 팔린다.

 

언뜻 보면 굳이 책 한 권이 필요할까? 싶은 단순한 내용인데 이 책이 빛을 발하는 이유는 이 과정에서 자유무역과 비교우위에 따른 완전경쟁시장의 작동을 막는 무수한 '정치적인' 요인들이 작동하는 구조를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가 밝힌 결론대로 "티셔츠의 일생은 분명 경쟁적인 국제시장에 의해 영향을 받지만, 그러한 영향을 촉발하는 가장 중요한 사건은 경쟁적인 시장보다는 시장을 회피하려는 수단과 더 깊은 관계가 있다. 치열한 경쟁시장은 누구든- 이를 찬미하는 사람들조차 피하고 싶어한다. 티셔츠가 생산되는 각 단계에서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승리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이렇게 경쟁을 회피하려는 노력은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에게 경쟁 그 자체보다 해로운 영향을 미친다."

 

내가 대학 새내기시절 세계화에 대해 한쪽의 이야기만 듣고 읽던 시절 저자가 이 책을 쓰고 있었던 셈인데 이미 내 생각이 돌고 돌아와 저자가 말하는 바와 유사한 생각을 갖게 된 시점에서 이 책을 만나다니. 좀 더 일찍 만났으면 좋았을 걸. 좋은 책이고번역 출판한 때가 2005년인데 벌써 절판이라는게 좀 의외다.

 

이 책을 통해서 인도 - 영국 - 뉴잉글랜드(미국) - 남부 피드먼드(미국) - 일본 - 한국/대만 - 중국 - 베트남 - 방글라데시로 이어지는 대항해시대 이후의 면직물 산업의 국제적인 흐름에 대해 정리할 수 있었던 것은 부가적인 소득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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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2002년도 농업법은 목화 재배농들에게 1파운드당 최소 72.24센트의 수입을 보장해주었다. 2004년 중반 목화의 세계 평균 가격은 1파운드 당 38센트였기 때문에 미국의 목화 재배농들은 목화의 시장 가격보다 2배 가량을 더 받았다.

 

140

 

전 세계 여공들은 다른 대안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처음 공장을 찾는다. 대안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온순할 수 밖에 없다. 노동력 착취 공장은 이상적인 노동자의 특성을 지성이나 창조성이 아닌 온순함에서 찾는다.공장은 대안이 없는 젊은 여성들에게 선택권을 제공한다. 그리고 그녀들은 기술을 습득한 뒤에는 새로운 일자리를 찾기도 한다. 다른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 온순함을 길러온 이들은 새로운 세계를 만나 선택권을 얻고 난 뒤에는 차츰 과거의 수동적인 모습을 잃어간다. 어느 나라, 어느 공장에서든 여성들은 상관에게 맞서 자신들의 가능성을, 스스로의 선택권을 넓혀갔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섬유업계에서 이상적이라가 생각하는 노동자의 모습은 잃어갔지만, 독착성, 결단력, 팀워크를 필요로 하는 산업에는 적합한 노동자가 되어 갔다. 바닥을 향한 경쟁이 진행되는 동안 기업들은 다른 분야로 사업을 옮겨갔으며 섬유 공장들은 문을 닫았다.

 

172

 

대체적으로 의류 수업에 대한 제한 및 규제는 재무부, 상무부, 하원, 미국 통상대표부, 범정부간 협의체인 섬유협정 이행위원회는 물론 수백 명의 로비스트와 변호사들에 의해 문서화되고, 관리되고, 집행된다. 실제로 어떤 연구서는 11개의 박스와 수십 개의 화살표가 그려진 도표를 실어 섬유 및 의류 무역에 정부가 어떻게 간섭하고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2002년 초, 미국 섬유 및 의류 수입자 협회의 홈페이지에는 일, 시간, 분 초 단위로 MFA의 시한을 표시하는 시계가 있었다. 200511MFA의 만료가 예정된 시간에서 의류 수입업자들은 그들이 싸워야만 했던, 미국 역사상 가장 복잡한 무역 보호정책의 남은 수명을 정확히 계산해볼 수 있었다.

 

182

 

면직물 및 의류 수입을 제한한, 미국의 정책은 뜻하지 않게 무역 상대국으로 하여금 상품의 품질을 더욱 향상시키고, 나일론과 폴리에스테르 같은 대중적인 인조직물 및 모직물 판매에 전력을 다하도록 했다.

 

196

보호무역제도로 수천 개의 일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정작 살아남은 일자리는 각종 제도를 만들고 운영하는 데 관계한 워싱턴의 로비스트들과 관료들의 자리였다.

 

203

 

미국의 쿼터제가 가져온, 가장 부정적인 결과는 엉뚱한 사람들이 부자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쿼터는 사실상 옵션이며, 투자자라면 누구나 알듯이 옵션은 가치가 있다. 전 세계 수십 개국에 쿼터를 할당함으로써 미국은 자국 소비자에게 물건을 팔 수 있는 권리인, 가치있는 옵션을 마치 선물인 것처럼 분배해버렸다.

(중략)

만약 중국이 쿼터를 팔아 벌어들인 95백만 달러의 수입을 2003년 실직한 98,000명의 미국 섬유업계 노동자에게 나누어 주었다면, 노동자 한명 당 적어도 9,000달러 이상을 직업훈련 등에 쓸 수 있었을 것이다.

 

213

 

1600년대 후반 영국 의회는 수입 면제품 때문에 조용할 날이 없었다. 여름에는 면직물이 좋다고 합리적인 주장을 펼치는 자들과 모직업계를 옹호하는 자들이 서로 으르렁거렸다. 오늘날 미국의 사정과 마찬가지로, 모직업계는 이권을 지키기 위해 애썼다. 예를 들어 1689년 의회에 도입된 법령에 따르면 면직품은 오직 여름에만 사용할 수 있었다.(모든 성자들의 축일부터 성수태고지의 축일까지 누구나 양모 말고는 다른 어떤 의류도 착용할 수 없다.) 또한 모직업계를 보호하기 위해 사회 특정 집단의 의복을 법률로 규정하기에 이르렀다.(모든 치안판사, 재판관, 대학생, 교수들은 반드시 모직물로 만든 가운을 일년 내내 입어야만 한다.)

 

이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자, 모직업계는 사회적 약자를 대상으로 법령을 변경했다. 또 다른 법령에는 5파운드 이상의 수입이 잇는 하녀들은 오로지 모직 모자만 써야 한다는 규정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1700년대에 이르자 의회는 오직 한 집단에만 모직옷을 가용할 수 있었다. 그들은 모직물을 입어도 간지러움을 느끼지 못했고, 하녀들보다도 더 권리가 없는 집단이었다. 법령에는 다음과 같이 규정되어 있었다.

 

"어떤 시신이건 오로지 양모 외에는 매장될 때 어떠한 수의도 입힐 수 없다." 이와 관련된 짤막한 시가 지어졌다.

 

"살아 있는 이들은 견딜 수 없었기에

결국은 죽은 이가 입어야만 했네."

 

246

 

어떤 구제 티셔츠는 특히 유럽, 뉴욕, LA에서 인기가 좋다. 예를 들어 서니의 고객들은 1970년대 락밴드 티셔츠에 기꺼이 고액을 지불한다. 따라서 작업자들은 이런 티셔츠를 잘 골라내어 '빈티지'로 분류해놓아야 한다. 롤링 스톤스의 티셔츠를 아프리카로 보내는 것은 모두에게 손해가 되는 일이다. 아프리카 소비자들은 롤링 스톤스를 모를 뿐 아니라 눈에 띄게 낡고 찢어진 티셔츠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최상급의 롤링 스톤스 티셔츠(예를 들어 1972년 밴드 퉈)는 빈티지 상점에서 300달러 가량에 팔린다. 만약 그런 티셔츠가 아프리카향 화물에 섞인다면 스터빈 일가는 큰 손해를 보게 된다.

 

269

 

어떤 사람들은 자선의 목적으로 기증된 옷은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무료로 기증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수입을 금지해도 미툼바 거래를 근절할 수 없듯이 이러한 생각은 실효성이 없다. 아무리 막는다 하더라도 기증된 옷들은 은밀하고 재빠르게 미툼바 시장으로 보내어진다. 조사 결과, 기증된 옷은 진정 옷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전달되기보다는 바로 미툼바 시장으로 보내어짐이 밝혀졌다. 또한 아시아 난민들에게 전달되어야 하는 옷들도 속속 시장으로 향한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한편 바람직하든 그렇지 않든 자선활동은 필요한 사람에게 옷을 공급한다는 측면에서 시장을 따라가지 못한다. 에드 스터빈과 제프리 밀론지 같은 사람이 없다면 기증된 옷들은 대부분 창고에서 썩기 마련이다. 순수한 자선활도에 의해서는 기증된 옷을 분류하고, 등급을 매기고, 배분하는 일을 제대로 해낼 수 없기 때문에 대부분의 재난 구호 조직들은 옷을 재난 지역에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

 

275

 

미국의 지독한 소비열은 구제옷의 공급뿐만 아니라 해상 운송비에도 영향을 미친다. 2003년도 미국의 무역적자는 5,320억 달러를 넘어섰으며 이로 인해 미국으로 들어오는 화물 운송비가 미국에서 나가는 화물 운송비보다 비싸지게 되었다. 또한 미국에서 나가는 화물운송비는 다른 지역의 화물 수요도 반영한다. 그러므로 미국과 커다란 무역불균형을 보이는 나라는 화물 운송비 역시 불균형을 보이게 된다.

 

2003년 미국의 대중국 무역적자는 1,240억 달러로, 중국으로부터의 수입이 중국으로의 수출보다 약 5배 많았다. 5만 파운드의 옷을 실을 컨테이너를 뉴저지에서 중국까지 실어 나르는데 약 400달러가 드는데 이는 브루클린에서 뉴저지 항까지의 트럭 운송비가 비슷한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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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 푸드 룰 - 세상 모든 음식의 법칙
마이클 폴란 지음, 서민아 옮김 / 21세기북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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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타임즈에 기고하는 믿고 보는 저널리스트 마이클 폴란의 책. 저자는 <마이클 폴란의 행복한 밥상>을 펴내기 위해 2년 동안 영양소에 대해 연구했는데 '대체 뭘 먹어야 하나'는 굉장히 복잡할 수도 있는 문제의 해답이 단 9개의 단어만으로 충분히 결론 내려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음식을 먹어라. 너무 많이 먹지 마라. 되도록 식물을 먹어라."

 

이 책은 제3개의 장 64개 조문으로 이뤄진 <인간 식생활 기본법>이라고 이해하는게 좋다. 책 자체가 국회의원이 제출하는 법률제정의안 정도의 내용과 분량이기도 하고. (조문의 체계상 같은 조의 항으로 들어가야 할법한 조문들도 보이는데 그건 뭐 중요한 건 아니다.)

 

마이클 폴란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명확하다. 음식을 먹는 데 있어서 대단한 비결이나 풍부한 지식은 필요하지 않다. 몇가지 기본 원칙만 지키면 되고 그 원칙은 선조들의 경험에 기대는 편이 TV광고보다 훨씬 낫다는 정도인 듯.

제1장 무엇을 먹어야 할까? (음식을 먹는다.)

 

- 제1조 음식을 먹는다. '음식처럼 생긴 먹을 수 있는 물질'을 먹지 않는다.
- 제19조 공장에서 만든 음식은 먹지 않는다.

 

제2장 어떤 종류의 음식을 먹어야 할까? (대체로 식물을)

 

- 제23조 육류는 입맛돋우기용 또는 특별식으로 이용한다.
- 제24조 네 다리(포유류)로 서 있는 것보다 두 다리(가금류)로 서 있는 것을 먹는 게 좋고, 그 보다는 다리 하나(버섯과 채소류)로 서 있는 것을 먹는 게 좋다.
- 제32조 기름기가 많은 작은 생선을 무시하지 않는다.
- 제34조 음식에 직접 설탕과 소금을 넣는다.
- 제39조 직접 요리해 먹는다면야 정크 푸드를 얼마든지 먹어도 좋다.
- 제40조 보충제를 챙겨 먹는 사람처럼 행동하되, 보충제는 먹지 않는다.
- 제43조 저녁을 먹을 땐 와인 한 잔을 마신다.

 

제3장 어떻게 먹어야 할까? (너무 많이 먹지 않는다.)


- 제44조 비싸게 사서 적게 먹자.
- 제46조 배부르기 전에 수저를 놓는다.
- 제47조 심심할 때 먹는 게 아니라 배가 고플 때 먹는다.
- 제49조 천천히 먹는다.
- 제52조 접시와 컵을 더 작은 것으로 구입한다.
- 제58조 먹는 건 식탁에서만 이뤄져야 한다.
- 제61조 밥그릇을 깨끗이 비우지 않는다.
- 제62조 공간에 여유가 있다면 채소밭에, 그렇지 않으면 창가화단에 채소를 심는다.
- 제63조 요리를 한다.
- 제64조 가끔은 법칙을 어긴다.

 

난, 제62조와 제63조는 잘 따르고 있지만, 제23조와 제61조는 꽤 자주 위반하고 있는 것 같다. 이 법의 제정된다면 (나도 그렇지만) 사람들에게 순응성이 좋을 조문은 제43조와 제64조일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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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 피버 피치 - 개정판
닉 혼비 지음, 이나경 옮김 / 문학사상사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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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바웃 어 보이>로 유명한 닉 혼비의 에세이 <피버 피치(Fever Pitch)>. 2005년에 초판이 나왔는데 난 9년만에 나온 제2판을 읽었다. 축구에 대한 책이 아니라 팬이 된다는 것에 대한 책.

 

중동 산유국의 왕족, 러시아 올리가르히, 신흥국의 대부호들의 타이쿤 게임이 되어버린 EPL판에서 근면성실로 악전고투하며 버티는 중산층 개룡남같은 아스널과 아르센 벵거에 대해 자세히 다뤘을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 2판에서 보강된 내용에만 약간 등장.

 

책을 다 읽었어도 그나마 관심있는 기아 타이거즈의 주전 라인업도 모르는 나로서는 와닿지 않더라.

 

그저 닉 혼비의 아스널을 정치인, 종교로 바꿔 생각하며 읽으니 끝까지 읽을 수는 있었다. 막장드라마를 본방사수파, 훌리건과 정치인빠, 광신도들 중에서 사회에 피해를 덜 주는 집단이 어딜까? 본방사수파 다음이 훌리건이라고 생각되는데 그런 단정을 하기에 앞서 언제 EPL 시합을 구경해야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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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 홍위병
션판 지음, 이상원 옮김 / 황소자리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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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S에 대해 딱히 기대를 하는 건 없지만 적당한 탐색거리를 지닌 잠망경과 1인 라디오방송을 결합한 것 같은 페이스북은 내게 잘 맞는 것 같다.

 

특히 일면식도 없는 관계인데도 내가 모르는 좋은 책을 추천해주는 눈 밝고 고마운 분들을  이렇게 쉽게 만날 수 있는 장소를 달리 알지 못한다. 심지어 그런 분들은 나보다 훨씬 바쁘게 살면서도 더 풍부하고 깊이있는 책을 읽으셔서 나처럼 읽는 책마다 포스팅하며 다른사람들을 타임라인을 도배하는 행동도 하지 않는다.

 

이 책은 1966년 열두 살의 나이로 문화혁명을 맞이했던 션판이 1984년 미국 유학길에 오르기까지 겪은 인생의 항로와 그가 만났던 동시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책 전체가 최상급의 블랙 코메디이고, 동시에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중국버전이기도 하다.  어떻게 동시에 이 두가지를 담고 있는지. 이 글을 쓴 사람이 정말로 솔직하게 썼기에 가능한 아이러니라고 생각된다.

구한말부터 최소한 1987년까지 굴곡진 현대사를 겪어온 이웃나라사람이기에 션판과 그의 주변사람들의 생존에의 열망과 머리싸움, 인내심이 얼마나 강인한 것인지 우리네 윗세대들을 떠올려가며 공감할 수 있었다.

 

중국의 부정부패가 개혁개방으로 인한 자본주의의 병폐라고 하는게 얼마나 잘 모르는 소리인지. 그리고 '꽌시'문화의 기원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꽌시' 챙기는게 비효율적인 에너지 낭비고 나 살고싶은 대로 알아서 사는게 최고이라는 인식이 확산되서 개인으로서 행복한 사람들이 많은 사회가 되기까지 중국이나 우리나라나 아직 갈 길이 멀어보인다.(그나마 우리가 앞서가고 있지만.) 상처가 아물고 사람들이 트라우마를 떨쳐내기까지 시간이 걸리는 건 알겠지만 그걸 내가 꼭 이해해줘야할 의무는 없다. 이런 책을 읽어서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만 공감은 안되는게 내 문제다.

 

이 책을 정독하게 되면 아래 인용한 413쪽이 남다르게 읽히리라 생각해서 길지만 인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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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3쪽

 

여권 발급처 관리들을 상대로 한 전쟁이 곧 시작되었다. 그 전쟁은 실제 전쟁에 필요한 요소들을 모두 요구했다. 단호감, 용기, 위험 부담의 감수, 전략, 무기 등등. 나는 전통적인 중국식 '무기'를 모두 동원했다. 수류탄(술), 권총(담배), 지뢰(훈제 소시지), 시한폭탄(훈제 닭) 등이 그 싸움에서 특히 효과적이었다. 물론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무기의 종류가 달라졌다. 치밀한 사전 준비도 필요했다. 적을 만나기 전 나는 미리 상대가 좋아하는 담배나 술 종류를 확인했다. 술도 안 마시고 담배도 안 피우는 사람이면 어떤 고기를 좋아하는지 알면 되었다. 때로는 선물을 거부하는 '청렴한' 관리도 있었다. 이 경우에는 우회 전술이 사용되었다. 제일 친한 친구나 상사를 공략하는 것이다. 제 아무리 청렴하다 해도 친구나 상사의 부탁을 거절할 사람은 거의 없었다. 노련한 장군이자 전략가로서 나는 치밀하게 계획을 진행시켰다. 적에게 너무 많은 것을 노출시켜도 안 되었다. 그저 내 뜻대로 움직이도록만 만들면 될 일이었다.

 

첫 단계는 내 인적 관계망을 가동해 여권 발급처 관리인 커와의 연결선을 찾는 것이었다. 연결선은 루루에게서 시작되었다. 루루가 어머니 친구이자 시내의 제3인민병원에서 일하는 의사 무 선생님을 소개시켜준 것이다. 중요한 연결점이었다. 중국의 관계망 게임에서 가장 유용한 것이 바로 청진기(의사)와 운전대(운전사)였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은 사회 관계망의 신경줄이나 다름없었다. 무 선생님은 도와주겠다고 했다. 

 

무 선생님께 신세를 진 환자 중에 텐진 부시장의 비서인 주 여사가 있었다. 무 선생님은 주 여사가 휴가를 내고 싶을 때마다 진단서를 써주었다고 했다. 소개 편지와 선물을 들고 찾아가자 주 여사는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걱정 말아요."라고 말했다. "무 선생님의 친구는 곧 제 친구지요." 주 여사는 책상에 앉아 전화번호가 잔뜩 적힌 커다란 공책을 꺼냈다. 그러고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주 여사의 친구 지 여사는 교통경찰인 차이 반장을 알고 있었다.

 

몇 번 저녁식사를 대접한 후 나도 차이 반장과 안면을 텄다. 그리고 관계망이 완성되었다. 차이 반장이 여권 발급처의 커와 아는 사이였던 것이다. 커의 형제 한 사람이 교통 단속에 걸렸을 때 봐준 적이 있다고 했다. 차이 반장은 내 여권을 빨리 처리해달라고 부탁해주기로 약속했다. 관계 하나하나마다 비싼 돈이 들었지만 나는 후회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차이 반장과 저녁식사를 하고 나자 수중에 겨우 30위안이 남았을 뿐이었다. 저금을 다 써버린 셈이었다.

 

두 주 뒤인 9월 말, 배지 부장이 당장 여권 발급처로 가라고 했다. 커는 웃는 얼굴로 나를 맞이했다. "차이 반장의 친구라고 왜 진작 말하지 않았소?" 그가 다정한 목소리로 살짝 나무랐다. "미리 알았다면 훨씬 쉬웠을 텐데 말이요. 자, 여기 여권을 받으시고. 당신은 정말 운이 좋구먼. 미국으로 가려는 사람들의 여권 발급 절차를 일시 중단하라는 정부 지시가 지금 막 내려졌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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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 언더그라운드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열림원 / 199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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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알목록 중 한 권인 하루끼의 논픽션. 1995년 3월 20일 일본 도쿄의 지하철. 사린가스를 유출시킨 사람들과 그로 인해 가스에 중독되어 피해를 본 62명과의 인터뷰를 모은 책이다. 가독성이 떨어지는 빽빽한 체험담들이 589쪽까지 계속 이어지는데 그들이 기억하는 그 날의 사건에 대한 얼개들은 대부분 비슷해서 읽으면서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았다.


하지만 휴일과 휴일 사이에 낀 월요일 아침에 만원 전철에 몸을 싣고서 짐짝처럼 출근하던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과 그들이 일과 자신의 생활에 대해 가지는 마음가짐이 하루끼가 기록을 통해 비슷하지만 각자 다른 색깔로 나타난다. 보통 언론에서 나오는 사망자 O명, 부상자 OO명이라는 단신기사나 피를 흘리는 사람, 온 몸에 호스를 달고 있는 중환자실의 풍경, 울부짖는 희생자 가족의 절규 등등 맥락과 구체적인 상황을 생략한 진부한 화면에서는 찾을 수 없는 이야기들이 있다.


사린 가스 배포 사건 이후로 9개월 후부터 1년 9개월 동안 진행된 인터뷰를 통해 펴낸 이 책이 작년 4월 16일의 사건을 겪은 우리 나라에도 필요하다. 쌍용차 해고자들에 대한 <의자놀이>도 비슷한 책이었지만 분량이 너무 짧았다.


그리고 하루끼의 이 책은 자기 이야기를 한 62명에 대해서는 물론 자위대나 공직에 있다는 이유 또는 철도회사에 재직하고 있다는 이유 등으로 인터뷰를 한사코 회피한 이야기하지 않은 사람들의 침묵도 그림자처럼 비추고 있다. 이런 일에서는 절대 나서지 않는 사람들.


저자 서문에 해당하는 "지표 없는 악몽 - 우리는 어디로 향해 나가가려 하는가"를 600페이지 이상의 인터뷰들을 읽은 뒷 자리에 배치한 덕분에 하루끼가 왜 이 책을 쓰게 되었는지 보다 깊이있게 이해할 수 있었다.

좀 더 쓰고 싶은데 출근시간이라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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