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리베카 솔닛 지음, 김명남 옮김 / 창비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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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스플레인이라는 말 덕분에 유명해진 책인데 정작 리베카 솔닛이 이 말을 만들어낸 건 아니고 사람들이 이 단어를 사용하는데 영향을 끼친 정도더군요.

 

제가 별로 안 좋아하는 언론 기고글 모음집인데 <멀고도 가까운>이라는 에세이를 통해 보기 드문 완성도의 글쓰기의 보여줬던지라 찾아 봤습니다.

 

다양한 소재들에 대한 생각들이 실이 베틀을 거쳐 천이 되는 것처럼 이어지는 맥락 중심의 글쓰기(물론 그 중심에는 솔닛의 작가로서의 정체성인 페미니즘이 있습니다만)가 역시 매력 있습니다제가 그동안 주로 접해온 문장들과 달라서 종종 난삽하게 느껴지기도 하고몸에 안맞는 옷을 입은 듯한 불편함은 어쩔 수 없었지만요.

 

문돌이의 페미니즘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진화심리학에 기반한 논의가 있어야 할 것 같아 앞으로 솔닛의 책을 또 찾아보진 않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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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누군가 내게 편지를 보내 대학 수업에서 있었던 일을 들려주었다강사는 학생들에게 스스로를 강간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어떤 조치들을 취하는지 말해보라고 했다젊은 여학생들은 자신이 늘 교묘한 방식으로 경계하고세상에 대한 접근을 제한하고사전에 조심하며기본적으로 아주 자주 강간에 대해 생각한다고 말했다(내게 글을 쓴 남자가 덧붙이기를남학생들은 그런 이야기를 듣고서 어안이 벙벙한 모습이었따고 한다.). 그들의 세상을 가르는 간극이 일순간이나마 갑자기 가시화된 느낌이었다.

 

107

 

베일의 역사는 깊디깊다지금으로부터 3천년도 더 전인 앗시리아 시절에도 베일이 있었는데당시에 여성은 두 부류로 나뉘었다점잖은 아내와 과부들은 베일을 써야 했고창녀와 노예 여자아이들은 베일을 쓰는 게 금지되었다베일은 일종의 프라이버시의 벽이었고여자가 한 남자의 소유라는 표지였으며휴대 가능한 감금용 건축물이었다.

(이젠 결혼식 때도 신랑이 베일을 올리는 모습을 거의 못본 것 같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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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이크아웃 네이션 - 2022 세계경제의 운명을 바꿀 국가들
루치르 샤르마 지음, 서정아 옮김 / 토네이도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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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브레이크아웃 네이션>은 모건스탠리에서 15년 넘게 일해 왔고 이 책을 펴낸 2012년 당시 신흥시장 부문 총괄사장이었던 인도계 루치스 샤르마가 앞으로의 세계 경제의 흐름을 주도할 신흥국들을 분석한 책입니다.

 

학자들이 쓴 책과 같은 통찰력을 기대하기 보다는 2012년 시점에서 경제지에 실리는 신흥국에 대한 기획기사들을 한 사람의 시각에서 정리한 책이라고 생각하고 보시면 될 것 같네요.

 

전 고등학교 시절 재미있게 읽었던 폴 케네디 교수의 <21세기 준비>와 비슷한 느낌이라 참 반가웠습니다. <강대국의 흥망>에서 일본의 부상을 예측했다가 빗나가긴 했지만 <21세기 준비>에서 폴 케네디 교수는 21세기에 가장 대비가 잘 된 국가로 한국을 꼽았었지요그 당시에 저는 이 할아버지가 한국을 참 모르네 하고 어이없어 하며 읽었는데 근 20년 후에 보니 폴 케네디 교수가 맞았죠육민혁님께서 쓰신 <글로벌 금융탐방기>와 비슷한 느낌도 있습니다.

 

저자 루치스 샤르마 자신이 말하듯 5년 이상의 장기 전망은 예상치 못한 변수로 인해 영향을 너무 많이 받기 때문에 사실상 의미가 없기 때문에 저자가 이 책을 펴낸 2012년에서 5년이 지난 2017년 시점에서 저자의 예측을 점검해보며 읽으니 재미이었었습니다.

 

저자가 필리핀을 가능성 있다고 본 점이나 칠레를 빼놓은 건 의문이 들긴 합니다하지만 책이 나온지 5년이 지난 시점에서 한국을 신흥국에서 가장 유망한 금메달 주자로 봤던 점이나 중국경제의 투자추세와 소위 당시 바람이 불었던 브릭스(BRIC)에 대해서 유보적으로 보면서, 2012년 기준으로 멀지 않은 시점에 원자재 버블이 꺼질 것이고세계경제는 평균적으로 연간 3% 이하의 성장률을 기록할 것이라고 예측한 거시적인 시각은 대부분 들어맞은 것 같습니다.

 

뭐 북한의 주민들을 통일이 되면 곧바로 산업에 투입될 수 있는 잘훈련된 인력으로 평가하고 있는 것처럼 기본적인 이해력이 의문가는 부분도 있긴 했지만 수십 개의 신흥국을 챙기는 입장에서 인상비평으로 인한 오류가 있을 수밖에 없겠지요.

 

나름 잠재력있는 신흥국으로 평가받는 각 나라들이 가지고 있는 장점과 약점잠재적인 기회와 취약한 리스크 등 분석한 내용들을 읽으면서 OECD통계나 산타크로체님의 포스팅에서 본 현재의 그 나라의 상황하고 비교해보니 더 재미있네요.

 

터키의 에르도안이 집권하게 된 과정과 경제발전을 추진한 전략과 영향을 미쳤던 요인들에 대한 제8장과 우리나라 기업들이 많이 투자하고 있는 베트남이 2012년 당시 일반적인 예상과 달리 과대평가되었다는 점을 지적한 부분도 인상깊었고세계적으로 볼 때 아주 성공적이지만 한국과 비교하면 모든 면에서 역부족으로 뒤지는 은메달리스트 대만의 한계도 잘 포착하고 있었습니다.(2012년엔 이미 이런 인식이 퍼진 상태였는지 저는 잘 몰라서요.)

 

또 두바이의 신기루가 꺼지고 민낯이 드러난 중동의 산유국들은 정말 암담해 보이네요아람코의 상장과 같이 마지막으로 아껴둔 카드까지 다 써버리면 세금도 안걷고 팔 물건이라고는 석유와 천연가스밖에 없는 생태학적 한계지대에 위치한 나라들이 어떻게 지탱할지 걱정될 정도입니다대체에너지로의 전환이 갑작스럽게 일어나리라 생각은 안하지만 황금의 샘이 종말을 맞이하면 이 지역의 정치적인 파국이 미칠 세계적인 영향이 어떨지 아득하네요.

 

물론 금메달리스트 한국도 산적한 문제들이 많지만 이제 대통령이 압력을 행사하더라도 기업이 뇌물을 줄 수 없는 환경을 만들었고개발독재 모델의 승계를 주장하는 정치세력이 퇴장했다는 점은 지난 5년 동안 성취한 뚜렷한 발전인 것 같습니다.

 

브라질인도남아프리카공화국처럼 총투자율이 낮고그 중에서도 도로철도항만 등에 투자된 비중이 다른 신흥국에 비해 낮은 국가들이 노동과 운송비용이 높아 국제경쟁에서 불리한 처지에 있고 그 결과로 경제성장에도 제약이 되고 있는 걸 보면 SOC 투자에 대해 지나친 거부감을 갖는 것은 다시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이 책을 보니 푸틴의 러시아가 석유천연가스광산 등에 의존하는 국영기업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데 당분간 원자재 가격 상승을 기대하긴 어렵고 5년이 지난 지금도 제조업과 금융업의 취약성은 여전한 것 같아 제가 러시아의 존재감을 너무 과대평가하지 않았나 싶은 생각도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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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

 

1988년에 개정된 (브라질)헌법은 무상 보건과 무상 대학교육을 보장해주었다또한 최저 임금 수준이 너무 높아서 근로자 세 명 가운데 한 명이 그 대상이 되고 있다경제학자들은 큰 정부가 나쁜 정부라는 의견에는 동의하지 않지만정부 지출이 1인당 국민소득의 추이에 발맞춰 나아가야 한다는 점에는 동의한다.

(우리나라 일부 진보진영이 주장하는 건강보험의 보장성 확대반값등록금최저임금 시급 1만원 등의 정책들하고 비슷한데 과연 재원마련 방안은 있을까요참고로 브라질은 이렇게 됐습니다,)

정부 규모가 확대된 데 따른 비용을 추당하기 위해 세율을 올렸고그 결과 세금부담이 신흥국에서 가장 높은 GDP 대비 38%에 이르렀다이는 노르웨이나 프랑스 등 유럽 복지국가의 세금 부담에 맞먹는 수준이다상대적으로 빈곤한 나라에서 개인소득세와 법인세의 부담이 이처럼 과중하다는 것은 기업이 첨단기술이나 직원교육에 투자할 돈이 부족하고그 결과 산업의 능률성이 향상되지 않는다는 얘기다.

 

163

 

러시아는 2007년 연금 지급을 대폭 늘려서 실질 임금 대비 연금지급액 비중이 25%에서 40%로 급증했다현재 러시아 국민 절반 이상이 국가에서 생활비를 받고 있다그중 40%가 사회복지수당 수급자이며 12%는 정부공무원이다경제에서 국유부문의 비중이 자그마치 50%에 이른다.

(이런 은혜를 베풀었으니 그동안 푸틴을 열렬히 지지할만 하네요그런데 지속가능해보이지 않습니다.)

 

244

 

브레이크아웃 네이션을 파악하는 규칙 중 하나는 제1도시와 비교해 제2도시의 규모와 성장 정도를 알아보는 것이다면적이 큰 나라의 제2도시라면 제1도시 인구의 30~50% 정도가 거주하는 것이 보통이다이러한 인구비율은 그 나라의 경제가 얼마나 지역적으로 균형을 이루고 있는지를 반영한다.

 

266

 

금융위기가 임박하면 자금이 세 단계에 걸쳐 이탈한다먼저 대형 투자자들이 비공식 경로를 통해 돈을 이전한다신흥국들 대부분에 자본 유출을 규제하는 법규가 있기 때문이다비공식 경로를 이용한다는 말은 자본 이탈 사실이 해당 국가의 국제수지에 표시되지 않는다는 말이다하지만 국제수지 보고서를 보면 그 사실을 알아낼 수 있다. ‘오차와 누락이라는 포괄적인 항목이 두드러지게 증가하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저자는 두 번째 이탈자는 외국인 채권자들이고세 번째 이탈라자는 현지 증시의 외국인 투자자들이라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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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 투 원 - 스탠퍼드 대학교 스타트업 최고 명강의
피터 틸 & 블레이크 매스터스 지음, 이지연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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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성공한 경영자들이 쓴 책들을 별로 안 좋아합니다과연 본인이 직접 썼는지도 의구심이 나는 책들이 많아서도 그랬지만 나심 탈렙의 책을 읽고 나서부터는 그런 책들에 더 손이 안가더군요제가 스타트업을 할 것도 아니다보니 굳이 볼 필요가 있을까 싶었지만 책을 추천하셨던 페친들의 안목을 믿고 샀습니다.

 

<Zero to One>은 페이팔을 설립했고 벤처캐피털 투자자로서도 성공을 거둬온 피터 틸이 모교인 스탠포드대에서 스타트업에 대해 강의했던 수업 내용을 모은 책입니다책이란 정말 고마운 매개체입니다피터 틸의 스탠포드 로스쿨 한 학기 강의를 이 책 한 권으로 맛볼 수 있으니까요.

 

지인을 말을 들으니 스타트업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필독서라고 합니다스타트업에 관심이 없더라도 현대 지식과 산업의 최전선에서 인류의 지평을 넓혀가는 사람들이 어떻게 탄생하고 있는지 접해보기에 좋은 책입니다피터 틸이 스탠퍼드 로스쿨을 나와서 로클럭까지 했던 사람이라 그런지 글도 전달력 있게 참 잘 쓰네요.

 

엔지니어 페친님께서 아침을 맞으며 <문명6>의 오프닝 곡을 들으신다는 글을 봤던 기억이 나네요자신의 일을 하면서 인류가 성취한 지평을 넓히고 있다는 사명감에서 나오는 기분 좋은 투지가 참 멋지게 보였습니다이 책을 읽은 내내 비슷한 느낌을 받았기에 서평이 아닌 저자에 대한 경의를 바치는 글을 남기고 싶습니다.

 

책을 다 읽고 나니 제로 투 원이라는 제목의 의미가 더 와 닿더군요피터 틸의 통찰력있는 조언들이 곳곳에 있어서 다 적자니 인용할 곳이 너무 많네요그냥 책을 읽어보시길 권합니다사이즈도 작고 250페이지 남짓이라 금방 읽을 수 있으니까요.

 

저는 맺는 말인 시간이 흐른다고 미래가 되지는 않는다’ 장이 특히 좋았습니다실제로 인류의 미래를 현실로 만들어가는 최전선에 있는 사람이 이렇게 겸손하고 창조의 기본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미래학을 가지고 약장사하는 사짜들은 얼마나 강심장이기에 아무 말이나 주워섬기고 다니는지 원.

 

이 책을 읽었다고 해서 미래를 보는 관점이 불명확한 낙관주의자로 분류되는 제 자신이 바뀌지는 않겠지만 실제로 세상을 바꿔나가는 분들에 대해 존경할 줄 아는 공공기관 문돌이가 되려고 합니다개별 컨설턴트에 가까운 제 업이 주는 허무주의를 일상의 안락함으로 극복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도 더 필요한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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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 요리 본능 - 불, 요리, 그리고 진화
리처드 랭엄 지음, 조현욱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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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가 유인원에서 진화하게된 도약의 발판을 '화식(익혀먹음)'으로 논증한 뛰어난 번역서적이다. 그런데 이 책이 수준 미달의 편집자를 만나서 흙 속의 진주처럼 묻혀버렸다. 처음에는 번역자의 기본기 부족이라고 생각했는데 옮긴이의 후기를 보니 출판사 편집자의 고집이 문제였던 것 같다.

 

<Catching Fire: How cooking made us human?> 이라는 훌륭한 제목을 뜬금없이 <요리본능>이라고 옮기다니. '화식'이나 '익혀먹기'이라고 표현하기가 어렵고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면 차라리 '조리'라고 하던가. 이 책의 뒷표지를 보면 내 판단이 지나친 억측은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모두 요리사다!!'라는 뜬금없는 카피나 아래 문장 모두 함량미달이다. 게다가 최재천 교수의 추천사도 평소 그의 글과 달리 절반쯤은 쓸데 없는 소리고. 게다가 가장 어이가 없는 건 다른 ...추천자인 에드워드 권의 추천사다. 도대체 이 책하고 연관되는 내용이 하나도 없다. 이 책을 읽지도 않은 상태에서 쓴 게 뻔히 보이는 추천사를 그대로 실은 편집자를 도무지 이해하기가 힘들다. 에드워드 권의 이름이 주는 후광을 이용하려고 했다지만 이런 똥글을 그대로 실어주는 건 패기를 넘어 자기 일을 내팽겨친 수준이라고 생각된다. 정말 좋은 책에 어울리지 않는 표지에 화가나서 말이 길어졌네. 이 글도 좀 길지만 평소에 생식을 하시거나 이를 좋게 생각하시는 분들은 꼭 한번 읽어보시기 바란다.

 

침팬지를 연구한 영장류 인류학 전문가인 리처드 랭엄은 인류와 침팬지와 인류의 조상이 갈라진 가장 큰 원인을 '알려진 모든 인간사회에서 익히지 않는 음식만 먹고 사는 사회는 없다.'는 사실에서 실마리를 잡았다. 그는 다음과 같은 화식가설로 약 200만년 전 하빌리스 중 일부가 성공적으로 이뤄낸 극적인 진화의 도약을 설명했다.

영장류의 경우 대부분의 신체기관은 체중을 이용하여 그 크기를 거의 정확히 예측할 수 있는데 소화관은 섭취하는 먹을거리의 종류에 따라 편차가 크다. 인간의 경우는 소화관이 다른 영장류의 60% 남짓에 불과하다. 대신 인간의 뇌는 신체비율 대비 매우 크고 대사량과 무관하게 섭취하는 칼로리의 20%이상을 소모한다. 날기 위해 소화관을 짧게 하고 어깨근육에 투자한 새의 경우처럼 일종의 교환(trade-off)을 선택한 것이다. 먹을거리를 가능한 잘게 부수고 불의 열기로 익히면 영양소 흡수율이 평균적으로 23.4%가량 향상되고, 소화에 소모되는 칼로리가 10%정도 감소한다. 인간은 질기거나 단단한 먹을거리들을 불로 익힐 수 있는 덕분에 하루에 6시간 이상 음식을 씹으며 보내는 침팬지보다 훨씬 작고 나약한 턱근육과 작은 어금니에도 불구하고 성인이 하루 중 음식을 씹는 시간은 1시간으로도 충분하다. 단단한 근육결합조직인 콜라겐이 6~70도에서 부드러운 젤라틴으로 변성되는 예처럼 소화비용은 불을 이용한 조리를 통해 극적으로 줄어든다. 또한 횃불을 통해 인간이 밤시간에 자신을 천적들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무기를 갖게 되어 숲이 아닌 평지에서도 잠을 잘 수 있게 된다. 이로 인해 나무를 타는데 유리한 신체는 땅을 파서 구근류를 찾는 팔근육과 직립해서 걷는 능력이 발달하였다. 인간은 불 덕분에 털이라는 효율적인 단열시스템이 없이도 생존할 수 있었기 때문에 털이 없는 피부를 가지게 되었고, 그 대가로 얻은 빠른 체열발산능력덕분에 포유류 중에서도 월등한 지구력을 가지게 되었다. 밤새 꺼트리지 않고 불씨를 유지하며 포식자의 출현을 경보하는 불침번의 필요성은 사회성있는 개체의 자연선택을 촉진하였다. 섭취 및 소화시간의 극적인 단축은 장시간의 사냥시간 투자를 가능하게 만들었고, 고기의 획득가능성과 성별 분업의 효율성을 높였다. 익힌 이유식은 영유아의 성장속도를 빠르게 하였고, 젖떼는 시기를 앞당겨 여성의 가임 터울을 단축시켜 인구증가에 기여했다.

 

리처드 랭엄은 인간의 가족의 구성도 배타적인 성적 파트너로서의 결합보다 남자는 주로 수렵을 통한 단백질 취득, 여자는 채집을 통한 탄수화물 취득이라는 차이와 불을 지키고 사냥을 마치고 왔을 때 고열량의 식사를 제공해줄 수 있는 조리서비스의 제공을 더 우선시하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앞부분들처럼 명쾌하게 납득이 되지 않긴 하다. 하지만 조리의 접근성과 투입시간 및 노동량이 줄어들고 있는 현대사회에서 고전적인 성별분업의 필요성이 낮아지고 있는 건 사실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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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쪽

 

북극 지방은 땔감이 부족하기 때문에 불로 요리하는 것이 그리 쉽지 않았다. 여자들은 여름에는 잔가지로 불을 피우고 겨울에는 바다표범이나 고래의 기름으로 불을 땐 돌 냄비에 요리를 했는데, 겨우 불을 피워 눈을 물로 녹인 다음에도 고기를 익히는데 또 한 시간 이상이 걸렸다. 이렇게 요리가 어려웠지만 고기는 늘 푹 익혔다. 스테판손은 1910년에 남긴 기록에서 이렇게 말했다. "도시 사람들은 피가 뚝뚝 흐르는 스테이크를 게걸스럽게 먹지만 이누이트가 덜 익은 고기를 먹는 것을 나는 본 적이 없다."

 

58쪽

 

생식주의자가 잘 살아가기 어려운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들이 번성할 수 있는 것은 품질이 예외적으로 높은 음식을 손쉽게 구할 수 있는 현대 환경에서뿐이다. 그러나 동물들은 야생의 먹을거리를 날로 먹으면서도 잘 살아간다. 진화 식단의 단점에서 시작된 의심은 옳았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하다. 우리에게는 무언가 이상한 점이 있다. 우리는 다른 동물들과 다르다. 대부분의 환경에서 우리는 익힌 음식을 필요로 한다.

 

127쪽

 

다른 자료들을 보면 주위 생태계의 변화가 영구적이면 그곳에서 서식하는 종에게도 영구적인 변이가 일어난다는 것을, 게다가 그 변화는 빠르게 일어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가장 명확히 보여주는 사례는 해수면 상승으로 인해 섬에 고립된 동물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중앙아메리카 본토 보어뱀은 벨리즈 연안의 섬으로 이주 한 지 8,000년이 채 지나지 않아 포유동물을 잡아먹는 식습관이 완전히 바뀌어 새를 잡아먹게 되었다. 따라서 새를 사냥할 수 있는 나무 위에서 더 오랜 시간을 보내게 되었고, 몸통이 가능ㄹ어지고 암컷과 수컷 간의 몸집 차이도 없어졌으며 체중은 과거의 5분의 1로 줄어드는 등 확연히 눈에 띄는 변화를 보였다.

 

177쪽

 

연구가 잘 이루어진 9개의 집단을 분석한 내용을 보면, 여자들이 구해온 음식에서 얻을 수 있는 열량의 비율은 16퍼센트에서 최대 57퍼센트에 이르렀다. 평균적으로 볼 때 여자들이 공급한 열량은 3분의 1, 남자들이 공급한 열량은 3분의 2를 차지했다. 그러나 이러한 평균치 만으로는 남녀가 제공하는 양식의 가치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남녀가 각각 구해오는 양식의 상대적인 중요성은 1년 중 어느 시기냐에 따라 달라지고, 남녀가 제공하는 식량 모두가 서로의 건강과 생존에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253쪽

 

오늘날 서구 사회에서 음식의 영양 성분 표시체계의 근간을 이루고 있기도 한 약정은 바로 애트워터 시스템이다. 이 체계를 발명한 윌버 올린 애트워터는 1844년에 태어나 19세기 말 코네티컷에 있는 웰슬리안 칼리지의 화학 교수가 되었다. 애트워트는 가난한 사람들이 한정된 자원을 가지고 먹을 것을 충분히 얻을 수 있도록 한다는 뜻깊은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먼저 다양한 음식들이 제공하는 열량을 각각 알아내는 일부터 시작했다.

 

261쪽

 

<국가표준 식품영양 DB>와 <음식의 성분>에 씌어진 자료를 모은 과학자들은 날음식이 익힌 음식에 비해 체내에서 실제로 생산하는 에너지가 더 적고, 날음식의 비율이 높을수록 신체에서 이용되지 못하고 배출되는 비율도 높아진다는 것을 분명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구시대적인 근사치 측정 기술에 갇혀 있었고, 그 결과는 거짓말을 낳았다. 영양 성분표의 자료는 음식의 입자 크기는 중요하지 않고 음식을 익히는 것은 에너지 가치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가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 반대가 진실임을 증명하는 증거 자료들이 풍부한데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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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약파기
윤형중 지음 / 알마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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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인 한겨레신문의 윤형중 기자님은 <공약파기>에서 지난 두 번의 정권이 대통령 선거를 하면서 발표한 공약집이 어떻게 이행이 되었는지를 추적하고 있습니다. 원래 소위 진보정권시기까지 다루고자 했는데 책의 분량이 넘쳐서 지난 두 정권으로 한정하셨다고 하네요.

 

지난 3월에 나온 따근따근한 신간이고 대통령 탄핵으로 인해 5월 대선을 앞둔 한국 유권자들에게 꼭 필요한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책이 언론에도 좀 더 반향을 일으키면 좋겠는데 언론계에서 의외로 현직 동업자가 쓴 책을 조명하는데 인색하지 않나 싶었던 터라 걱정됩니다.

 

저자는 머리말에서 저는 한국 정치가 구조적으로 바뀌려면,그 중심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제안하는 것은 간단합니다. 정치의 중심에 정책, 선거의 중심에 공약을 두자는 것입니다.” 저자 자신도 기자지만 정치의 중심을 파워게임으로, 선거의 중심을 인물과 판세로 경마장식으로 보도하는 기성언론의 정치보도에 진지한 문제제기를 하고 있는 책입니다.

 

저도 처음에는 에이 공약이야 뭐 어차피 표를 얻기 위해 부풀리고 지킬 수 있는 이상으로 호언장담하는 거 다들 아닌거 아냐? 하는 마음으로 심드렁하게 읽기 시작했죠. 그런데 윤형중 기자님을 따라 공약의 이력을 추척해보니 해도 정말 너무 했고, 과연 대의제 민주주의의 꽃인 선거를 이런 식의 공약(空約)으로 치러도 되는 건지 같이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이 분의 다음 책도 기대되네요.

 

박근혜 전 대통령이야 뭐 할말 없지만 그래도 이명박 전 대통령은 많은 공약들을 정량적인 숫자로 제시한 점을 높이 평가하고 싶습니다. 이번 대선 때 TV토론 포맷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공약집을 텍스트로 해서 각 후보자들이 직접 선정한 시민 패널과 전문가들의 질문에 답변하는 방식의 개인별 토론회도 도입하면 어떨까요?

 

그리고 저는 다음 대통령이 지난 두 전직 대통령처럼 화려한 공약들을 내세우기 보다는 지금 유효한 천 개가 넘는 법률들 중에서 우리 사회를 발전시키기 위해서 필요하지만 사실상 규범력을 상실한 법률의 집행을 실효성있게 하는 게 우선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어차피 국회 선진화법으로 야심한 공약 이행을 위한 추진력 확보도 어렵고, 대연정이나 의원빼가기 등 정치공학적인 논의에 매모될 필요 없이 국회가 제정한 법률을 집행하는 행정부의 수반으로서 역할만 제대로 해달라는 거죠.

 

레퍼런스는 없지만 정치인들의 말바꿈과 정책백서나 보도자료들이 대강 얼버무리고 언급하지 않는 정책집행 실적의 이면을 차근차근 헤쳐 나가는 좋은 책입니다. 오는 5월에 한 표를 행사하길 유권자들께 권하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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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

 

이미 존재하는 법이 현실에서 규범력을 회복하는 것이 경제민주화의 첫걸음이다. 이는 거꾸로 말해 제도화가 경제민주화를 담보하지 못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한국의 노동법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것처럼, 공정거래법이나, 유통법, 상생법 등도 많은 경우 지켜지지 않고 있다. 따라서 정부는 입법 성과에 대한 자화자찬을 할 것이 아니라, 법이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를 꾸준히 모니터링하고 냉철하게 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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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정부가 최저임금 위반 사업장에 대한 관리감독과 신고접수를 맡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 현장에서는 정부의 관리감독을 체감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2006년부터 2014년까지 최저임금 위반 사업장 가운데 사법처리가 된 이들은 전체의 0.12%에 불과할 정도다. 나머지 99.88%는 시정명령에 따라 임금 미지급분을 주고서 아무 처벌도 받지 않았다. 적발되는 일이 드문데, 적발이 되더라도 처벌을 받지 않는다. 기업들로서는 최저임금법을 지킬 이유가 거의 없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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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정책을 기획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이 재원 대책이다. 해마다 4조원이 넘게 들어가는 정책을 새로 만들며 이명박 정부는 재정부담을 지방교육청(3~5)과 지방정부(0~2)에 떠넘겼고, 박근혜 대통령은 선거 때엔 내가 내줄게라고 말했다가 당선 이후엔 그냥 네가 내라로 표변했다. “아까랑 말이 다르지 않냐고 지방교육청이 따지자, 박근혜 정부는 그럼 네가 반드시 내야 한다는 법을 만들 테니, 그 법을 지켜라고 윽박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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