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래의 기술 - 트럼프는 어떻게 원하는 것을 얻는가 - The Art of the Deal 한국어판
도널드 트럼프 지음, 이재호 옮김 / 살림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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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5대 천조국 황상께서 1987년 직접 쓰신 이 책을 안볼 수야 없지요. 더구나 뉴욕이라는 도시에서 크게 성공한 부동산 디벨로퍼의 경험담을 읽고 싶기도 했습니다.

페이지가 술술 잘 넘어갑니다. 스웨덴 이민자 출신이라 선명한 금발이었더군요. 아버지를 통해 부동산 디벨로퍼에게 필요한 조기교육도 아주 제대로 받았더라구요. 저라면 작고한 트럼프의 형처럼 무척 괴로웠을 것 같습니다.

개성도 그렇고 문체도 그렇고 오바마 전 대통령과 정반대 타입이라 재미있습니다. 둘이 어쩜 이렇게도 안맞는 타입인가 신기할 정도로요. 노무현 대통령과 이명박 대통령보다 심하게 보였습니다.

비즈니스에서는 저돌적이면서 머리도 좋은 데가 속이는 것도 능력이라고 보는 스타일이라 절대 만나고 싶지는 않지만, 기본적으로 솔직한 타입이라 이 책을 읽고나니 꽤 호감이 생겼습니다. 자신의 성공의 본질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자기객관화'가 된 사람이라 싫다거나 밉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고요. (제가 미국에 체류하는 한국인 불법체류자거나 이주노동자라면 상황이 다르겠지요. --;) 

성공한 수컷들과 쭉빵 미녀들이 모인 레 클럽(Le Club)에 가입할 때의 일화가 제일 인상깊더군요. 참고로 트럼프는 당시 클럽에서 만났던 쭉빵미녀들에 대해 대부분 보통 수준의 대화도 이어갈 수 없는 머릿속이 텅 비어있거나, 반쯤 미친, 대부분 애완동물과 다름없는 존재였다고 평합니다.(대선기간 회자된 온갖 막말의 고향을 발견한 듯한 기분이...)

동업 계약을 앞두고 파트너의 이사회 멤버들에게 공사 현장을 보여줘야 하는데 일의 진척도이 늦자 도시 내에서 구할 수 있는 모든 불도저와 덤프트럭을 2에이커 남짓 현장에 투입시켜 뭔가를 하는 척 했다는 일화에서는 UN군 묘지 방문단을 앞두고 보리싹을 심어서 뗏장을 입혔던 고 정주영 회장이 생각났습니다. ㅎㅎ

최고의 물건에 집착하는 것처럼 인사에 대한 원칙도 단순하더군요. 경쟁 회사에서 가장 우수한 사람을 빼내 와 그들이 받고 있던 것보다 더 많은 급료를 지불하고 그들의 업적에 따라 보너스와 기타 특별상여금을 지급하는 방침. 능력을 평가할 수 있는 안목이 있어야 실행할 수 있는 방법이지만요.

어느 페친님께서 '무언가를 싫어한다는 사실은 그 사람에 대해서 많은 것들을 알려주니 내색할 때 조심할 필요가 있다.'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죠.

저는 트럼프가 싫어했던(머리가 좋으니 가끔은 점잖게 안그런 척 포장도 합니다.) 센트럴파크 사우스 100번지 건물 세입자들, 행정위원회 조직, 컨설팅업체, 여론조사기관, 에드 콕 뉴욕시장, 울먼 아이스링크 공사를 발주한 공무원이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려주는 단서가 된다고 느꼈습니다.

울먼 아이스링크 공사 발주와 실패로 끝난 시공에 소요된 6년과 15개월의 사업실패 백서 작성기간을 생각해보면 허가를 받은 날부터 4개월만에  공사를 끝낸 트럼프의 추진력에 쾌감이 들기도 하고, 공룡같이 굼뜬 공공조직의 일처리한 답답함도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청 경관이나 건축인허가 담당 공무원, 공사발주와 대금지급 공무원들을 기업인에게 맡길 수도 없는 노릇이고, 민간의 대행자들에게 트럼프에게 돌아간 것같은 언론의 스포트라이트 세례를 확보해줄 수도 없는 상황이라 트럼프의 주장에 동의하기 어려웠습니다. 물론 트랙 레코드에 따른 차후 공사에 대한 인센티브 부여는 맞는 이야기지요. 하지만 뉴욕시가 발주하는 공사에서 트랙 레코드에 따른 일률적인 입찰평가 가점 산정지침을 과연 만들 수 있을 것인지 의문이 들긴 합니다.

트럼프 행정부의 성공은 트럼프가 인선하는 각료들이 작은 트럼프처럼 일하는 지에 달렸다고 생각됩니다. 트럼프는 자기가 임명한 부하들에게 일을 전적으로 맡기는 타입이긴 한데 그가 임명해야 하는 직책들은 사기업의 대표나 임원이 아니라 공공의 자리이니까요. 과연 미니미들이 기업에서 일하는 것처럼 공공조직에서 일할 수 있을까요? 트럼프 자신도 선거에서 이긴 것 외에 공공조직에서 성공을 만들어 본 적은 없는데 말이죠.

그리고 트럼프가 군사학교에서의 중고교시절 해병대 상사출신 시어도어 도비어스 선생님을 대했을 때의 모습이 그가 지금 러시아의 푸틴에게 호감을 보이고 존중하는 이유를 보여주는 것 같아서 재미있었습니다. 확실히 노련한 사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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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쪽

나는 그를 다루는 방식을 터득했다. 그 방법이란 내가 그의 권위를 존중하고 있음을 넌지시 알리는 것이었다. 도비어스는 나를 억지로 우협하지 않았다. 미묘한 균형이 지속된 셈이다. 힘이 센 사람들이 보통 그렇듯이 도비어스도 약점을 발견하면 뒤통수를 노리는 습관이 있었다. 반면 상대방이 강하지만 공격할 의사가 없음을 눈치재면 상대방을 남자로서 대접했다. 사고에 의해서라기보다는 본능적으로 이러한 사실을 간파한 뒤 우리는 아주 친해졌다.

114쪽

차를 팔고 싶을 때 5달러를 들여 닦고 광을 내고 반질반질하게 만들면 400달러를 더 받을 수 있다. (중략) 부동산 역시 다를 바가 없다. 잘 관리된 건물은 형편없이 관리된 건물보다 훨씬 가치가 나가기 마련이다.

166쪽

중요한 협상을 하려면 최고위층과 만나야 하는 법이다. (중략) 고용인은 타인의 거래를 위해서 싸움을 하려들지 않는다. 고용인은 자신의 임금 인상이나 혹은 크리스마스 보너스를 위해서는 기꺼이 싸운다.
그러나 고용인이 가장 하기 싫어하는 일은 자기가 모시고 있는 보스를 화나게 만드는 것이다. 때문에 고용인은 타인과의 협상에서 실질적인 의견을 제시하지 못한다.

342쪽

나에게는 위원회라는 것은 우유부단한 사람들이 어려운 결정을 내릴 때 위험 부담을 회피코자 만드는 조직으로밖에는 여겨지지 않았다.

372쪽

수년 동안 정치인들과 만나면서 내가 배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들을 움직이도록 보장하는 것은 언론 또는 더 특정적으로 꼽는다면 '언론에 대한 공포'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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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모되는 남자 - 남녀차에 대한 새로운 사회진화적 해석
로이 F. 바우마이스터 지음, 서은국.신지은.이화령 옮김 / 시그마북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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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아들을 키우는 어머니들에게 육아법 책보다 이 책을 권하고 싶네요. 개인적으로는 대학시절 학회 성세미나 자리에서 남성 일반을 불의한 가부장제 시스템의 수혜자로 치부하며 열변을 토했던 여학우들에게 이 책을 발제해서 성세미나 한 번 더 하자고 하고 싶습니다. ㅋㅋ


번역자가 <행복의 기원>을 쓰신 서은국 교수님이죠. 에세이라 가벼운 필치로 쓰고 있기 때문에 편하게 잘 읽힙니다. 아직 2월이지만 아마도 제 올해의 책 리스트에 올라갈 것 같네요.


기존의 성차에 대한 두 가지 견해는 '남성이 여성보다 본질적으로 우월하다는 관점'이 하나, 다른 하나는 '어떤 중요 영역에서도 여성이 남성보다 열등하지 않을 분 아니라 오히려 남성보다 우월할 수 있고, 가부장제라는 시스템이 여성을 억압하고 남성끼리만 보상을 분배해왔다'는 관점이지요.


그런데 둘 다 배척하면서 남녀는 동등하지만 다르다고 봅니다, 남녀의 차이는 기본적인 호불호와 관계모형 성향의 차이와 문화 시스템의 선택으로 인한 결과라고 설명하죠. 문화('집단 전체에 공유되어 있으며, 다음 세대로 전달되는 정보들을 바탕으로 학습된 생활양식')가 남성과 여성을 각각 다른 용도로 활용한다는 발상에서 출발합니다.


저자 로이 바우마이스터 교수 본인이 요즘의 세태에 대해 약간 억하심정이 쌓여서인지 남성을 감정적으로 변호하는 부분도 좀 있긴 합니다. 하지만,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의 주장도 경청할 필요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읽는 사람이 걸러 받아들이면 되지 않나 싶네요.


아래 부분은 이 책을 다 읽고 떠오른 생각들입니다.


1. 저자는 문화의 입장에서 여성은 소중한 자원이라는 가정을 계속 고수하는데 그걸로는 가임기가 지난 여성들에 대한 존중을 설명하기 어렵다고 봅니다. 역사속의 가부장제는 바로 그런 여성, 소위 '우두머리수컷의 아내'에 대한 사회적 역할 부여 차원에서 고안된 제도가 아닐까요? 잉여생산물이라고 해봤자 수레에 싣고 옮길 수 있는 물건들 뿐인 유목민에겐 가부장제가 없죠. 하지만, 정주문명에서는 그 자리를 유지하기 바쁜 우두머리수컷이 쌓아둔 부와 권력을 유지하고 활용하는 역할이 분명 필요하니 문화와 여성의 협력이 이뤄지기 좋은 상황이었다고 봅니다. 물론 쥐뿔도 없는 집 시어머니는 노화된 몸을 이끌고 계속 노동해야하니 물론 이러한 구조형성과 무관하지만요.


2. 지구상에는 이미 인구가 많습니다. 생태학적 한계에 있는 티벳에서 일처다부제를 통해 인구증가를 통제했던 것처럼 현대문명에서 사회의 보조를 받지 않는 출산과 양육이 포르쉐나 페라리를 능가하는 사치재가 되었습니다. 이제 남성들만이 아닌 여성들도 소모되는 존재로 투입하는 문화권이 승리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어차피 전쟁도 인구 숫자는 의미없고 완편된 항공모함 전대 하나면 어지간한 나라는 다 쓸어버릴 수 있습니다.


포드의 가솔린 자동차 대량생산 이후 미국 내 수십만 마리의 말들이 경제학적으로 무가치해진 것처럼 제2의 기계시대가 임박해 있고, 인간노동력이 넘쳐난다고 우려되는 상황입니다. 감차보상금을 지급하면서 공급을 통제하는 택시총량제처럼 인간총량제가 필요한 상황이 될 수 있습니다. 선진국부터 닥치겠지만 개도국도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폭스콘의 인건비가 아무리 저렴하더라도 갈수록 진보하는 화낙(FANUC) 로봇을 계속 압도하리라 장담할 수는 없으니까요.


페미니즘으로 인해 남성들은 좀 더 덜 소모될 수 있는 수혜를 얻었지만 기술진보를 선도하고 가장 많은 임금을 주는 기업들은 여성들도 소모되는 존재가 되도록 회유하고 있습니다. 직장 내 성차별의 철폐, 유급 출산휴가, 육아휴직과 유연근무제의 확충, 난자냉동비용 지원 등 말이죠. 문화는 필요하다면 육아를 전담하는 전업주부인 남성을 소방관이나 CEO처럼 매럭적으로 묘사하여 이런 우두머리암컷의 배우자 풀을 넓혀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3. 일부일처제의 정착, 안전한 피임수단을 확보한 상태에서의 성적 자기결정권의 확대, 전지구적 시장경제의 보급으로 소모되는 존재를 더 많이 갈아넣어 기술진보와 풍요로운 문화를 향유하는 경쟁친화적 문화집단이 승리하는 추세 등을 볼 때 지금까지의 선진국을 만들어낸 문화의 선택은 이제 여자들도 소모되는 존재로 만들거나 아니면 선별적으로 엘리트 이민자 남성을 받아들여 기존의 시스템을 고수하느냐의 선택이 남은 것으로 보입니다. 두 가지 전략 중 어느 쪽이 장기적으로 성공한 전략이 될지 상당히 기대되네요.


이 하는 인용한 문장들입니다. 인상깊었던 책이라 좀 많이 인용했습니다. 어줍잖은 요약보다는 낫겠지만 그래도 직접 이 책을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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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쪽


제이슨 와일더와 동료들의 DNA연구를 통해 오늘날 인류 조상의 약 67%가 여성이고 33%가 남성임이 밝혀졌다. (중략) 전문가들은 이 불균형이 더 심할 것으로 여겼으며, 대략 75~85% 정도가 여성일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일부일처제가 전세게적으로 퍼진 현대사회 이전의 대부분의 역사, 특히 선사시대에 심했을 것이며, 많은 동물 세계에서는 고작 20%의 수컷들이 90%에 육박하는 암컷들과 번식을 한다.

(전략) 결정적인 점은 남녀 삶의 보편적인 결말이 달랐다는 것이다. 성인기까지 생존했던 대부분의 여성들은 최소한 한 명 이상의 자식을 두었을 것이며, 그 후손들이 지금까지도 살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남성은 그렇지 않다. 생존했던 대부분의 남성들은 정상에 오르지 못했던 야생마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유전적 흔적을 남기지 못했다.


129쪽


진화의 핵심은 생존이 아닌 '재생산'에 있다. 진화를 이끄는 자연선택의 결론은 결국 재생산을 위함이다. (중략) 진짜 핵심은 더 많은 자손을 성공적으로 '낳을 수 있는' 자식들을 낳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이 일을 해낸다면 당신의 수명과는 관계없이 유전자를 전달하는 진화론적 관점에서 성공한 사람이다.


169쪽


여성들은 일대일로 연결된 가까운 관계의 작은 영역에 맞게 설계된 반면 남성들은 많은 사람들과 연결된 대규모 영역에 더 잘맞게끔 설계되었다. 남성들의 이런 관계는 여성들의 전문 분야는 일대일 관계만큼 친밀하거나 강렬하지는 않지만 다른 측면에서는 중요하다.


177쪽


어느 쪽도 더 우월하지 않다. 단지 다를 뿐이다. 각각의 대인관계 방식은 한 종류의 관계에 더 적합하기 때문에 자연히 다른 종류의 관계에는 덜 적합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트레이드오프(trade-off)다.


250쪽


큰 규모의 집단은 더 많은 정보와 지식을 축적할 수 있었으며, 훨씬 더 광범위한 노동분업과 전문화가 이루어졌다. 때로는 친근하고 때로는 잔인한 경쟁을 통해 새롭고 다양한 생각들을 시도할 수 있었고, 승자가 누구든 이 같은 경쟁은 집단 전체에 이득을 가져왔다.


312쪽


남편의 독점을 원하는 여성도 일부다처제 하에서 더 잘 살 수 있다. 일부다처제는 미혼 여성 수는 부족하게 하고, 미혼 남성 수는 넘쳐나게 한다. 그래서 일부다처제 하에서는 일부일처 관계의 남편을 원하는 여성도 훨씬 많은 남성들 중에서 자신의 남편을 고를 수 있다.


377쪽


사람들은 대개 위대함을 추구하기 위한 희생이 과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많은 여성과 남성들이 낮은 확률을 뚫고 위대한 성취를 달성하는 데 그들의 삶을 바치지 않는다는 것은 그리 놀라운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다소 비합리적인 이런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워해야 한다.


383쪽


살펴보았듯이 자연은 위대함을 추구하지 않는 남성들을 별로 필요로 하지 않으며, 야망이 없는 대부분의 남성들은 결국 생식의 종말을 맞이했다.


429쪽


대부분의 현대문화가 내놓은 해결 방법은 이혼하더라도 남성이 계속 전처와 자녀들에게 자신의 부를 전달하도록 요구하는 것이었다. 남성이 전처와 새로운 아내 모두를 재정적으로 지원할 경제적 능력이 있는 경우 이것은 일부다처제와 비슷하게 작동한다. 남편으로서 전처에게 가졌던 권리만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435쪽


문화와 여성은 이 부분에서 서로 협력할 필요가 있다. 남성이 열정적인 사랑의 최고치에 있을 때 문화와 여성은 남성의 착각이 유지되도록 해야 한다. 이 소중한 사랑이 영원할 거라는 착각 덕분에 남성은 기꺼이 영구적인 재정적 지원을 약속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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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고도 가까운 - 읽기, 쓰기, 고독, 연대에 관하여
리베카 솔닛 지음, 김현우 옮김 / 반비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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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읽는 책 중에 취향이 안맞아 읽기 힘들어 하는 분야가 시집과 내가 사적인 내용이 많은 에세이쪽입니다. 취향이 안맞아 잘 안읽다보니 점점 더 접하기가 어렵더라구요.

<맨즈플레인>으로 유명한 리베카 솔닛의 이 에세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버릴 부분이 없는 아름다은 문장과 마법같은 구조로 제가 경험하지 못했던 경지의 글쓰기를 보여줬습니다.

한 번 읽고서는 감상을 남길 엄두가 안나서 묵혀놨다가 다시 읽었고요. 지금도 그저 잘 쓴 에세이라서 또래나 손위의 지인들에게 읽도록 권하고 싶은 마음으로 타이핑하고 있네요.

이 책은 어린 시절 솔닛이 살았고 어머니가 사는 집에서 수확해온 살구 세 자루에서 시작해서 여전히 남아있는 두 개의 살구시럽병을 바라보며 끝납니다.

목차도 "살구-거울-얼음-비행-숨-감다-매듭-풀다-숨-비행-얼음-거울-살구" 순서로 시작과 끝이 목걸이처럼 이어지고요.

살구, 어머니의 치매, 유방암 수술, 친구의 죽음과 같은 가까이 있는 것들과 책을 통해서 만난 매리 셸리와 <프랑켄슈타인>, 체 게바라와 <모토사이클 다이어리>, 붓다에 관한 불교경전과 같이 멀리있는 것들이 표지에 그려진 실이 천으로 직조되는 과정처럼 이야기가 만들어집니다. 진부한 비유로 보이지만 실을 잣고, 베를 짜아내는 문장들이 너무나도 아름다워서 계속 감탄하느라 두 번째도 쉬엄쉬엄 읽게 되네요.

저도 이 책을 읽으면서 화분을 사서 베란다에 블루베리 나무를 심었고, 동네 마트에서 세 팩을 묶어 만 원에 팔던 설향 딸기를 사서 딸기잼을 담았습니다. 솔닛의 표현대로 절임은 '역사가의 요구와 요리사의 능력이 만나는 지점'인 것 같습니다. 적어도 제가 이 잼을 다먹을 때까지는 혀 끝에 닿는 딸기잼의 단맛 안에 잼을 만들 때 했던 생각들이 보존되어 있을테니까요.

읽기와 쓰기, 그리고 생활과 인간관계 등 여러 실타래를 풀어 짜낸 이 이야기를 통해 에세이의 가치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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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쪽

우리가 책이라고 부르는 물건은 진짜 책이 아니라, 그 책이 지닌 가능성, 음악의 악보나 씨앗 같은 것이다. 책은 읽힐 때만 온전히 존재하며, 책이 진짜 있어야 할 곳은 독자들의 머릿속, 관현악이 울리고 씨앗이 발아하는 그곳이다. 책은 다른 이의 몸 안에서만 박동하는 심장이다. 어린 시절의 나는 쉬지 않고 책을 읽으며 말은 거의 하지 않았다. 의사소통의 가치를 회의했고 무시당하거나 벌을 받을까 봐, 무언가를 들킬까 봐 늘 두려워했다. 이해를 받고 용기를 얻고, 다른 사람에게 나를 알리고, 확신을 얻어야겠다는 생각은 좀처럼 들지 않았고, 내가 다른 사람에게 줄 만한 걸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책을 읽고, 많은 양의 글을 쓸어 담았다.(중략)

글쓰기는 누구에게도 할 수 없는 말을 아무에게도 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모두에게 하는 행위이다. 혹은 지금은 아무에게도 할 수 없는 이야기를, 훗날 독자가 될 수도 있는 누군가에게 하는 행위이다. 너무 민감하고 개인적이고 흐릿해서 평소에는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말하는 것조차 상상할 수 없는 이야기를. 가끔은 큰 소리로 말해 보려 노력해 보기도 하지만, 입안에서만 우물거리던 그것을, 다른 이의 귀에 닿지 못했던 그 말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적어서 보여 줄 수 있음을 알게 된다. 글쓰기는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침묵으로 말을 걸고, 그 이야기는 고독한 독서를 통해 목소리를 되찾고 울려 퍼진다. 그건 글쓰기를 통해 공유되는 고독이 아닐까. 우리 모두는 눈앞의 인간관계보다는 깊은 어딘가에서 홀로 지내는 것 아닐까? 그것이 둘만으로 구성된 관계일지라도. 말이 전하기에 실패한 것을 글이, 아주 길고 섬세하게 전할 수 있는 것 아닐까?

나는 침묵에서 시작했다. 읽을 때만큼 조용하게 글을 썼고,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이 내가 쓴 것을 조금씩 읽었다. 몇몇 독자들이 나의 세상으로 들어오거나, 나를 그들의 세상으로 끌여들였다. 나는 침묵에서 시작했지만, 결국 긴 여정을 거쳐 아주 멀리서도 들리는 하나의 목소리를 내기에 이르렀다. 그 목소리는 처음엔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아서 읽을 수밖에 없었지만, 곧 큰 소리로, 더 큰 소리로 말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125쪽

파이는 오븐에서 꺼내자마자 만든 사람이 바로 먹을 수 있지만, 책은 쓰이고 몇 달 혹은 몇 년 후에, 그것도 작가가 없는 곳에서 읽힌다. 작가 본인도 자신이 무엇을 만들어 냈는지 절대 알 수 없다.
(중략)
요리란 그 재료를 먹어 버림으로써 사라지게 하는 일, 음식을 먹는 이의 몸 안에 묻는 흥겨운 장례식이다. 그렇게 먹는 이의 몸 안에 들어간 음식은 변신을 거쳐 다음 생을 맞이하고, 분비물을 통해 다시 흙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무언가를 보존하는 일은 그 변신 과정을 무한히 연기하는 일이다. 어쩌면 절임이란 역사가의 요구와 요리사의 능력이 만나는 지점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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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의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체 게바라 선집 2
체 게바라 지음, 홍민표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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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베카 솔닛의 <멀고도 가까운>에 체 게바라의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이야기가 나오길래 찾아봤습니다. 한국어판 서문을 쓴 체 게바라의 차녀 알레이다 게바라도 의사이자 작가라 신기했네요.

의대생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가 친구 알베르토 그라나도와 1951년부터 약 8개월 동안 아래 지도에 나온 남미 곳곳을 다닌 여행기인데 둘이 타고 간 오토바이 포데로사2가 중간에 퍼지는 바람에 반절은 히치하이킹으로 여행했더군요.

비록 영화로도 만들어지기는 했지만 왜 별로 유명하지 않았나 의문이었는데 읽어보니 스물 셋의 체는 붙임성좋고 풍이 좀있는 평범한 중산층 젊은이 같았습니다. 혁명가의 불꽃이 보인다고 하기는 좀. ㅎㅎ

의사행세와 이를 기사로 실어준 신문덕분에 경찰서와 병원에서 숙식을 해결한 무용담보단 단돈 3만원 갖고 고철 자전거를 타고 떠난 노숙왕님의 <도전 땅끝, 망할 여행기>가 훨씬 재미있었거든요.

노숙왕님 여행기 맛보기 하실 분은 아래의 링크를 참조하셔요!

http://cafe.naver.com/biketravelers?iframe_url=http%3A%2F%2Fcafe.naver.com%2FArticleRead.nhn%3Fclubid%3D12007870%26articleid%3D6556%26networkMemberId%3Dvouwa%26networkSearchKey%3DArticle%26networkSearchType%3D7%26networkSearchPage%3D3

체의 여행기에서 등장하는 당시 세계 최대의 노천구리광산이었던 칠레의 추키카마타 광산에 대해 알게 된 것도 수확입니다. 아래 링크의 설명이 유익하더군요.

http://travellog.co.kr/entry/%EC%B9%A0%EB%A0%88-%EC%84%B8%EA%B3%84-%EC%B5%9C%EB%8C%80-%EB%85%B8%EC%B2%9C-%EA%B5%AC%EB%A6%AC%EA%B4%91%EC%82%B0-%EC%B6%94%ED%82%A4%EC%B9%B4%EB%A7%88%ED%83%80

세상에 400톤 짜리 몬스터 트럭이 다 있고 트럭 한 대 값이 400만달러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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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쪽

이밖에도 위생관념이 희박해서 화장실이 매우 더러웠다. 사용한 화장지를 바닥이나 비치된 통에 버리는 게 칠레인의 습관이었다.
(ㅠ.ㅠ 지금 우리나라도..)

211쪽

미라에서 병원 환자들이 우리에게 베풀어준 멋진 환송회로 우리는 여행을 계속해나가기에 충분한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들은 저희에게 캠핑용 가스 스토브를 주고 100솔이라는 돈까지 걷어서 주었습니다. 그들의 경제적인 여건을 고려하면 이것은 큰 돈입니다. 그들 중 몇몇은 작별인사를 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고마워하는 것은 저희가 가운을 입지 않고 장갑도 끼지 않은 채 마치 건강한 사람들을 대하듯이 자신들과 악수도 하고 앉아서 이런저런 얘기도 하고 함께 축구를 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모든 일들이 무모한 허세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평소 마치 동물처럼 취급받아 왔던 이 불쌍한 사람들에게는 단지 정상인들처럼 대우받았다는 사실이 주는 심리적 고양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나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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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 마음 - 나의 옳음과 그들의 옳음은 왜 다른가
조너선 하이트 지음, 왕수민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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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에 일가견있는 분들께서 다들 손꼽아 추천하셨던 책이라 전부터 꼭 읽고 싶었는데 이번 연휴를 맞아 드디어 다 읽었습니다. 빌렸다가 그냥 반납한 게 두 번은 있는 것 같은데 왜 이런 책을 못알아보고 그랬는지 한탄스러울 지경이네요. 소장하고 싶은 책이라 새로 살 예정이고요.

 

책의 내용들도 좋지만 전문성의 수준을 희생하지 않는 가독성 측면에서 이런 책은 정말 드물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뛰어났습니다. 요즘 학문들이 워낙 깊게 파고 들어가다보니 일반인에게 자기의 연구내용에 대해서 쉽게 그리고 핵심 내용을 고스란히 전달하는 건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조너선 하이트는 마치 독자 스스로 진화심리학 중 도덕심리학을 전공하고자 하는 석사과정 신입생이 되어서 랩에서 어떤 연구를 해왔는지 지도교수인 그로부터 차근차근 설명을 듣는 것처럼 느끼게 해주더군요(대학원 지도교수가 실제로 이런 설명을 해주는지는 모르지만요).

 

책의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눠집니다. 제가 이 책을 더 각별하게 읽었던 건 이 책을 읽으면서 제 도덕관이 얼마나 편협한지 제대로 깨닫게 되어서인 것 같습니다. <바른 마음> 5장은 제가 WEIRD(Western, Educated, Industrialized, Rich, Domestic)에 속하는 한정된 문화권(Rich는 전세계 평균기준으로 --;;) 속에 사는 사람이고 세상에는 다른 도덕체계가 많다는 사실을 거부할 수 없게 무장해제 시켰습니다.

 

9장을 읽으면서 인간의 진화가 현생인류의 출현이후에 멈추거나 느려지기는커녕 오히려 문화와 공진화하면서 가속도가 붙어왔다는 사실도 새롭게 알게 되었고요.

 

10장에서 하이트는 군집스위치라는 개념을 통해 왜 인간의 마음은 90%가 침팬지이고 10%가 벌이라고 묘사했는지 설득력있게 설명합니다.

 

그동안 저는 도킨스에 감화되어 신무신론자의 주장을 따라왔습니다. 그래서 종교는 일종의 바이러스 또는 기생충으로 자신의 이익을 위해 숙주인 인간의 인지 체계의 부산물을 이용하고 있기 때문에 과학자와 인문주의자를 비롯하여 이 전염병에 걸리지 않아 여전히 이성적 사고를 할 수 있는 소수의 사람들은 힘을 합쳐 주문을 깨고, 망상을 걷어내고, 신앙을 종식시켜야 한다는데 동의해왔지요. 하지만 종교는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구성원의 헌신을 이끌어내고 무임승차자를 억제하는 집단선택에서 효율적으로 작용해온 도덕의 외골격이라는 제11장에 나오는 하이트의 설명을 반박하기 어려웠습니다.

 

12장의 정치심리학 분석을 통한 좌파와 우파의 도덕체계 분석은 이미 제 자신이 약 2년 전부터 기존의 전형적인 진보주의자의 도덕매트리스에서 점차 벗어나오고 있었음을 확인하는 데 큰 도움을 줬습니다. 그런데 하이트가 말하는 것처럼 진보주의자가 보수주의자를 이해하는 것은 반대의 경우보다 어려운 것 같습니다. 그만큼 제가 더 노력을 해야겠지요. 이 부분에서 페이스북을 통해 참 많은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댓글없이 좋아요만 누르고 있는 우파 페친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책을 읽고 보니 부정청탁금지법이라는 진보주의자의 정책이 좋은 의도에도 불구하고 보수주의자들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우리나라의 사회적 자본을 훼손하지 않을까하는 걱정이 스쳐가네요. 공공기관에 대한 경영평가가 좋은 취지와 긍정적 효과(비정규직 차별에 대한 감점부여, 양성평등 취업규칙 개정유도 등)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에게 아무런 효용이 없는 무의미한 사업 겉포장 병풍치기에서 한몫받으며 먹고사는 사람들을 만들어낸 것을 봐왔습니다. 

 

국립대학 학자들에게 외부강의를 사전에 신고하게 하고 20~30만원의 허용된 수입금을 초과해서 수령하지 앟았는지 감시하고, 공무원들이 자신이 발주하는 프로젝트의 성공을 위해 입찰응모예정자들을 만나서 과업지시서의 완성도를 높여가면서  민원인과 결탁하지 않았는지 의심하는 주변의 의심을 해소해야하는 상황까지 감당하게 만드는 것들. 이런 규제들이 공동체에의 헌신과 고귀함에의 헌신이라는 사회적 자본을 감소시키는 부분이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연구의 성과를 사회에 나누지 않는 학자, 절차만 지키는 공무원으로 과연 충분한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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