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말과 꿈 ㅣ 트리플 16
양선형 지음 / 자음과모음 / 2023년 2월
평점 :
전에 <날개절제술>을 읽었습니다. 자음과모음 출판사에서 기획한 트리플 시리즈 중 하나였습니다. 꽤 흥미롭게 읽어서 다른 책도 구경해 보자는 마음으로 검색을 했습니다. 그 중에서 <말과 꿈>의 표지가 절 사로잡았습니다. 점과 선으로 이루어진 티셔츠를 입고 있는 누구, 그 누구는 표정도 몸도 드러내지 않습니다. 마치 태양처럼 형태를 이루며 어딘가를 비춥니다. 과연 어디를 향해서 빛을 비추고 있을까요? 소설을 읽으면서 그 빛의 도착지를 찾고 싶은 마음에 읽었습니다.
이 책에 실린 단편 소설 중에서 무엇을 골라 이야기해야 할지 많이 고민했습니다. 빛의 도착지가 비교적 선명하게 들어나는 <말과 꿈>을 다룰지 <「퇴거」와 나중에 함께 묶인 다른 산문들>(이하 <퇴거>)을 다룰지를. 전자는 공감을 얻는 리뷰를 쓰기에 좋을 것 같고, <퇴거>는 메시지를 함께 찾는 리뷰를 쓰는데 적합해 보였습니다. 고민 끝에 <퇴거>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되도록 구체성을 띠는 리뷰를 쓰는 노력을 기울여야 하므로 꽤 어려운 도전이 될 것 같습니다.
<퇴거>의 줄거리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나’는 내 친구를 향한 감정들입니다. ‘나’의 집에서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활동만 하는 친구를 보면 안타깝습니다. 추운 겨울 수도관이 얼었다며 밖에서 뜨거운 물을 붓는 친구를 보면 고맙습니다. ‘나’가 생계를 유지하려고 일하며 보내는 시간이 몇 시간인지 생각하면 집에만 있는 친구가 얄밉기도 합니다. 사람 대 사람의 관계에서 다양하게 감정이 탄생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아웃풋으로 이어지기는 어렵습니다. 친구는 ‘나’가 그럴 수 있도록 해 주는 원동력이 되어 줍니다.
‘나’는 집에서만 글을 씁니다. 친구 옆에서는 글을 쓸 수 있습니다. 왜 친구가 떠나지 않는지 걱정되고 궁금하기도 하지만, 글을 쓸 수 있다는 이점이 몹시 매력적이라서 ‘나’가 먼저 이제 나가달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 대목에서 <아티스트 웨이>(줄리아 카메론 지음, 2012, 경당)라는 책이 떠올랐습니다. <아티스트 웨이>에서는 모든 사람의 마음에는 억압받는 어린 아티스트가 존재하며, 그 어린 아티스트에게 주의를 기울이며 돌봐야 한다고 합니다. <퇴거>의 ‘나’의 친구는 어쩌면 ‘나’의 어린 아티스트가 아닐까요?
‘나’가 언제 어떤 이유로 친구를 만났는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친구라고 부르는 것으로 보아 ‘나’와 비슷한 연령대라고 추측합니다. 그렇다면 어린 시절에 발견한 친구이겠지요. ‘나’는 그 친구를 지금까지 키워왔습니다. 아르바이트를 하루에 세 탕이나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간신히 생계를 유지하면서도요. 왜 그랬을까요?
‘나’는 고된 하루하루를 보냅니다. 쉬고 싶은 마음과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의 비율이 늘 불규칙하게 변화합니다. 이런 일상을 반복하면서 ‘나’는 친구가 자신처럼 활동하며 독립적 활동을 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기를 원합니다. 동시에 친구가 먼저 ‘나’를 떠나기를 바라기도 합니다. 오랜 시간을 공들여 키워온 친구의 숨을 자신이 멎게 하는 형식을 갖추기 싫어서입니다. 나쁜 사람이 되기가 싫어서 친구가 먼저 떠나기를 바라는 ‘나’가 진정 나쁜 사람일지도 모르겠군요.
어쩌면 ‘나’는 줄곧 원했을지도 모릅니다. 친구가 무럭무럭 성장할 수 있었던 환경과 친구가 기뻐했던 활동을. 그러나 시간의 흐름 속에서 ‘나’는 친구와 관계를 유지할 힘이 서서히 빠집니다. 애써 친구를 붙드는 이 선택이 옳은지 의문스럽기도 합니다. 이제 친구, 네가 날 붙잡아 주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빛에 담겨 있지 않을까요? ‘나’ 간절한 기도처럼 느껴집니다.
내 상상 속에서 친구가 살았던 나의 방은 네 벽면이 유리로 만들어진 밀실이다. 나는 그 투명한 큐브 앞에서 친구의 사소하고 무기력한 생활을 온전히 관찰할 수 있다. 친구는 나를 의식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미 친구가 떠나버린 밤, 나의 세간들이 누구의 손길에도 어지럽혀지지 않고 정갈하게 비치되어 있는 바로 그곳 - P14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