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바로 살아라 - 신정일이 쓴 조선의 진보주의자들
신정일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08년 9월
평점 :
품절


 

정도전의 진보( 고려 말 공민왕부터 조선 태조까지)

 

엄청난 독서가, 올곧은 성품, 조광조와 이율곡에 이르기까지

민본정치를 잇게 한 장본인, 조선초기를 다질 때 이성계의

군사력을 등에 업고 한양천도와 토지정비 등 모든 사상적인 것을 해낸 인물.

그는 재상정치를 이상으로 여겼다는데 해당 내용은

통치자가 민심을 잃었을 땐 물리적 힘으로라도 끌어내야 한다는

길지 않은 문장과 함께 역성혁명이란 내용으로 다뤄지고 있었다.

같은 내용은 아니지만 어쩐지 연결해 봐도 좋을 듯하다.

 

아래는 그의 일화 중 하나.

정도전이 일찍이 관아에 출근하는데 신 한 짝은 희고 한 짝은

검은 것이었다. 공석에서 서리가 고하니 공이 내려다보며 한 번

웃고는 끝내 바꾸어 신지 않았다. 일을 마치고 말을 타고 갈 적에

웃으며 하인에게 말하기를 " 너는  내 신이 한 짝은 검고, 한 짝은

흰 것을 괴상하게 여기지 말라. 왼 쪽에서는 흰 것만 볼 것이요,

오른 쪽은 검은 것만 볼 것이니 무슨 걱정이 있겠느냐?" 했다.

 

그에게 묻고 싶다.

그렇다면 정면에서 보면?

 

조광조의 진보 ( 중종 )

 

아이들 역사 가르칠 때 읽었던 교재에서 조광조가 죽고 지금의

일인 듯 그가 너무 아쉬워 가슴아파했던 기억이 있다.

중종 멍청이가 조광조의 개혁을 믿고 단행하게 두었더라면

(역사적 가정은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많은 것이 바뀌었을 것이다.

 

썩어빠진 관리들의 풍조를 바꾸고 백성들을 편히 살게 하도록

많은 개혁을 실현하려 노력했던 사림인 그는 너무 직선적이고

올곧은  성격으로 중종의 배신이란 날벼락을 맞는데 사약을

들이켜도 쉬이 죽지 않자 " 사약이 떨어졌으니 더 가져오게."하여

두 번째 사약을 들이킨 후 이불을 쓰고 있었지만 죽지 않자 목을

졸라 죽였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그때 그의 나이 서른여덟.

 

정여립의 진보 ( 선조 )

 

정여립이란 인물을 처음 알았다면 일 년 가량 초등학생 역사수업을

했던 난 부끄러워야 하는 일인가?

역시 선조 멍충이가 나라를 제집 밥먹듯 먹어 치우고 있을 때

선조와 이야기 하는 자리에서도 고개를 빳빳이 들고 따지곤 했다는

정여립은 기축옥사의 주인공이다.

스승을 배신하는 것이 인륜을 어기는 강상죄로 간주됐던 시절에

이이가 죽자 그를 배신하고 이발과 금세 친하더니 실제의 그를 알고 생전에 절교했다고

당당히 화살을 되받는 그가 선조멍청이를 모실 이유가 없었는지

여타저타한 일들 끝에 대동계를 만들어 왕위세습을 부인하고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꿈꾸는 자들을 모아 호남에서 엄청난 세력을 키우며

혁명을 준비하던 중 한 사람의 배신으로 그 모든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고 하지만 

정여립이 도주 후 자결한 뒤에도 두려움을 없애려는 듯

일가나 연루된 자들을 속출하여 없애는 일을 쥐 잡는 듯했다니

그 위력이나 명성이 말로 못할 만큼 엄청났다는 사실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글의 말미에서 정여립이 죽지 않았다면 임진왜란도 없었을 것이란

소릴 하는데 글쎄 그건 별로 설득력이 없어 보이고,

정여립 당시 너무 호남을 들쑤셔서 뒤로 호남에서 인재가 나오기

힘들었다는 얘기와 함께 온갖 호남설이 나오는데 뭐 그것도

저자가 호남을 너무 좋아하거나 호남인이라 그렇지 않을까 의심이.

 

황진이의 진보 ( 중종 : 명확하지는 않음 )

 

요즘 여자들처럼 사랑하고 자유롭게 살았으며 그림과 글, 노래에

뛰어나고 엄청난 명기로 당대 유명인 중 냉철한 이성으로 여욕에 흔들리지 않을 것으로

소문 난 남자는 죄다 찾아 다니며 홀려 원 스트라이크로 자빠뜨렸다는 그녀.

 

당시엔 남자의 몸으로도 산행을 하기 힘들었다는데

금강산 깊숙한 곳 어디도 가지 않은 곳 없이 죄다 유람을 했다고 한다.

그만큼 자연을 좋아해 늘 자연과 함께 하고 싶어 했던 그녀는

30년 간의 계약 연애를 통해 결혼생활 비슷한 것도 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끝'하고 돌아섰다는 그녀가,

그녀의 그 맺음이 어쩐지 부럽기만 했다.

 

허균의 진보 ( 선조부터 광해군까지)

 

광해군의 스승이었다는 그는 파직, 등용을 반복하며 평생을

위태위태하게 살았으나 별로 그에 개의치 않는 신기한(?)태도를 보였다고.

여색을 좋아하고 삶을 너무 꾸밈 없이 살아 사림들의 미움을 사

결국 광해군의 두터운 신임에도 불구하고 허씨조선의

새로운 개혁이란 엄청난 반역의 죄와 함께 종말을 맞는다.

 

허균이 종사관이 되어 원접사 유근을 따라 의주에 도착했을 때 영위사 신흠이 날마다 같이 만났다.

허균은 옛 책들을 외우고 있었고 유교, 도교, 불교 등에 관련된 책들에 대해서도 막히는 바가

없어 아무도 당할 사람이 없었다. 신흠이 물러나와 탄식하기를

" 이자는 사람이 아니다. 그  모습도 범상치 않으니 분명 여우나 삵괭이, 뱀이나 쥐 같은 짐승의

정령일 것이다."라고 했다.

 

꼭 뭐 위인전에 삽화를 겸비해 나오는 글귀 같아 그냥 한 번 적어 봤다.

사실 허균이 이정도로 대단한 사람인 줄은 몰랐으니까. 

그는 지금의 내 표현으로 지적인 것을 통달해 천박의 경지에 이른 사람으로 보인다.

괜히 멋부리지 않고 '보지는 보지다'라고 진실을 어떤 거리낌 없이 시원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

 

이중환의 진보 ( 숙종부터 영조까지 )

 

택리지로만 알려져 있는데 역시 이 책의 저자 역시 그를

택리지 하나로 진보에 쏘옥 넣어 주셨다.

국사시간에 칠판에 갈기듯 배웠던 사실이 마음에 닿기까지는

이렇게나 긴 시간이 필요했나보다.

조만간 택리지 구입해서 꼭 읽어봐야지.

 

서른일곱부터 예순일곱까지 30년의 긴 유배 기간 동안

전국을 돌며 백성들과 친하게 지내며 그저 논 것이 아니라

깨닫고 정리해서 그것을 택리지로 완성.

전국을 팔도로 나눠 역사적 배경을 살피고 지리와 형세, 인물

전해오는 이야기를 서술하며 각 지역의 풍속과 명승지 토지의

비혹도와 토산물, 물자의 유통과 국제무역, 수리(水利)와 사람이

살 만한 곳, 거주지와 피난처, 군사요충지 등을 다루었단다.

 

택리지의 발문이라고 한다.

이 책은 살 만한 곳들을 가리려 했으나 살 만한 곳이 없음을

한탄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글을 활용하고자 하는 사람은

문자 밖에서 참 뜻을 구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는 곧 이 땅을 그렇게 돌아다녀 보았으나 진실로 살 만한 땅은

찾지 못했으며 결국 살 만한 땅은 스스로가 만들어 가는 것임을

강조한 것이란 저자의 말이 강하게 뇌리에.

 

박지원의 진보 ( 정조 )

 

40이 되도록 줄을 못타 가난뱅이 선비로 살다가 우연한 계기로

청에 가서 열하일기를 써 유명세와 부를 얻으신 지원님.

고미숙과 장정일의 책을 읽고 그에게 관심이 생기기 시작해

어디서건 이름만 들어도 반가운 난 죽음의 게으름으로 그동안

그의 글을 골라 읽을 생각을 못했다.

꼭 이 책을 접으면 택리지와 그의 글들을 찾아 구입해야겠다.

그가 조선의 진보주의자임은 굳이 강조할 필요 없는 사실이다.

 

다음은 박지원의 소단적치인.

글을 잘 쓰는 사람이면 전쟁하는 법을 알 것이다.

비유하자면 글자는 군사요, 글 뜻은 장수이다. 제목이란 적국이고,

고사의 인용이란 전장에 진지를 구축하는 것이다. 글자를 묶어서

구절을 만들고, 구절을 모아서 장을 이루는 것은 대오를 이루어

행군하는 것과 같다. 운에 맞추어 읊고 멋진 표현으로 빛을 내는

것은 징과 북을 울리고 깃발을 휘날리는 것과 같다.

앞뒤의 조응이란 봉화를 올리는 것이고,

비유란 기병이 기습 공격을 하는 것과 같다.

 

정약용의 진보 ( 정조 )

 

얼마 전 마무리 된 이산에서 그를 너무 괴짜로만 표현하려고 해

짜증이 다 났었는데 이것으로써 다시 새길 수 있을까.

 

정조의 총애를 받아 평생을 관리로 지냈을 것이란 생각이 자연히 들겠지만

실제 그가 관리로 지낸 시기는 겨우 1789년부터 1799년 정도의 약 십년이다.

나머진 대부분이 유배생활인데 유교 중심의 조선에서 천주교를 대놓고 믿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거기다 당시는 신유사옥으로 300이 넘는 사람을 죽이는 말도 안

되는 짓거릴 버젓이 해내는 시기였다.

 

다음은 유배지에서의 편지.

 

폐족의 자제로서 학문마저 게을리 한다면 장차 무었이 되겠느냐.

과거를 볼 수 없는 처지가 됐지만 이는 오히려 참으로 독서할 기회를 얻었다 할 것이다.

너희들이 만일 독서하지 않는다면 내 책들은 쓸모가 없어질 것이고,

내 글이 전해지지 못한다면 후세 사람들이 다만 사헌부의 탄핵문과 재판 기록만으로

나를 평가할 것이다. 

 

최제우의 진보 ( 고종, 실제로는 대원군  )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를 굉장히 신성한 무엇으로 그렸다.

나라의 시조에게도 신성한 신화가 필요한데 조선 말기를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동학농민혁명의 뿌리인 그를 표현하기 위해선

아마도 신화의 어머니 정도는 필요했으리라 본다.

 

동학의 내용은 천주교와 거의 같지만 무속적 접신이 있다는 것이

조금 다르고 그는 주술적 효험이 없음을 부정적으로 보았다 한다.

동학은 전래의 유교, 불교, 도교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야말로

동학의 일부분이라 했으며 유교의 윤리와 불교의 각성,

도교의 기를 기르는 과정이 자연스러운 품성이자 동학에 포용되는 것이라고,

이는 곧 동학 아래 또는 속에 유불선이 있다 이거다.

 

다음은 최제우 처형의 일화.

최제우는 1864년 3월 10일 대구 장대에서 유교의 가르침을 어지럽히고

나라의 정치를 문란케 했다는 죄목으로 처형됐다.

전해오는 이야기로 최제우의 목을 아무리 칼로 내리쳐도 목이 떨어지지 않았다 한다.

경상감사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놀라서 어쩔 줄을 모르고 있자 최제우가 이렇게 말했다.

" 나에게 맑은 물을 한 그릇 가져오라."

그렇게 최제우가 청수淸水를 마신 다음에야 순조롭게 형이 집행됐다.

이 때문에 천도교에서는 지금까지도 청수가 교주의 맑은 피를 의미하고 있다. 

그 때 최제우의 나이 41세였으니 깨달음을 얻고 동학을 전파한 지 햇수로 불과 4년만이었다.

 

김개남의 진보 ( 고종 )

 

동학 2대 교주였던 최시형 대의 사람인데 전봉준, 손화중과 더불어3대 지도자로 불리는

인물임에도 전봉준은 많이 알려져 있는 한편 농민군 최정예부대 김개남은 

역사 속에 묻혀 있었다고.

저자는 그 이유를 국문에서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 온전히 남아 있는 전봉준과 달리 즉결처형 됐고,

한 사람을 영웅화 하는 시대적 풍조로 인해 전봉준의 그늘에 가린 탓도 있고,

김개남을 급진주의자 또는 강경파로만 몰아붙였기 때문이라 말하고 있다.

 

이상 사회를 건설한다는 의지로 개남開南으로 이름까지 고친 그를 진보의 대열에 넣은 것과

저자가 앞에서 새로운 세상을 구축하고 싶어 했던 정여립과 허균을  소개한 것으로 보아

저자는 썩은 세상을 뒤집어 엎는 인물에게 점수를 좀 많이 주는 편인 듯싶다.

그게 바로 책의 뒤에 말한 죽음 앞에서도 똑바로 살아라 인가.

 

김옥균의 진보 ( 고종 )

 

조선 보수주의 입장에서 그는 일본에 조선을 팔아 먹은 개아들놈에 불과하고

진보주의 입장에서는 일본의 도움을 받아 자주개혁을 하려 했다가 당한 불쌍한 사람에 속할 것.

어차피 근대화 된 나라를 따라 변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을 진대, 그게 청에 붙고

일본에 붙는다 해서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란 생각이 든다.

'개혁'보다는 ' 자주'가 더 중요한 단어니 말이다.

일제 강점기 때문에 더 큰 욕을 먹을 수밖에 없던 비운의 정치 혁명가들의 삼일은

그래서 더 의미가 깊다.

도대체 순수한 의도에서 도움을 주는 이나 나라는 없는 것인가?

 

다음은 저자가 생각하는 갑신정변.

 

갑신정변의 의미: 지식인층, 즉 위로부터 시작된 최초의 개혁운동이었지만

근대 한국사에 한 획을 그은 민중운동.

 

갑신정변이 높게 평가 받는 이유

1. 한민족이 새로운 개혁을 단행하기에 가장 적절한 시기에 가장 체계적이고 열정적으로

봉건 체제를 청산하고 자주적 근대 국가를 건설하려 했던 시도.

2. 한국 근대사에서 개화 운동의 위상을 정립한 사건, 갑신정변이 지향했던 자주적인 근대국가,

시민 사회를 기반으로 한 자본주의 경제, 근대적 문화와 자주적 국방 등은

이후 모든 개화 운동과 민족 운동들이 추구한 바.

3. 반침략 독립운동에 새로운 차원을 만들어냈다.

갑신정변은 당시 중국의 조선 속국화 정책에 대한 과감한 도전.

4. 근대 민족주의 운동의 발전에 하나의 이정표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다.

한국 근대사에서 이후의 모든 민족주의 운동은 갑신정변을 계승, 비판하면서 이루어짐.

 

강일순의 진보 ( 고종 )

 

동학농민혁명에 진하게 가담하지 않았지만 동학을 제대로 이해했고

실패를 미리 예견했다는 분으로 저자의 마지막 진보 내용을 채워주기에 적절한 인물 같다,

역시 새로운 사상과 세상을 부르짖고 도인들을 만나며 민중을 억압 속에서 구출하고 싶어

연구하는.

끝까지 잘 읽고도 작가에게 짜증이 나버리고 말았다ㅡㅡ;

어쩐지 진보에의 다양성이 떨어지는 듯해서, 조선 역사 속에서 진보란 주제에 끼워 맞출 인물을

찾자면 더 많이 찾을 수도 있었을 텐데 새로운 세상을 열고 싶던 진보들은 그냥 같이 한 인물처럼

엮어서 구별했으면 좋았을 텐데, 흠, 만날 쓰지도 못하면서 주둥일 놀리는 나보다

나은 사람이겠지만 그래도 아쉬운 건 아쉽다고.

 

다음은 이런 인물을 진보에 넣으시는 건 좀 심하단 생각에.

" 내가 서천 서역 대법국 천계탑에 내려와서 삼계三界를 둘러보고 천하에 돌아다니다

이 곳 동쪽 땅 모악산 금산사 미륵불상에 임하여 30년을 지내면서 최수운에게

천명과 신교神敎를 내려 큰 도를 세우게 했다.

그런데 수운이 유교의 테두리 밖으로 벗어나 진정한 법을 펼치고

신도神道와 인문人文의 푯대를 세우며 도의 참 빛을 열지 못했다.

하여 갑자년에 천명과 신교를 거두고 신미년에 스스로 세상에 내려왔노라.....

나는 삼계 대권을 주재하여 조화로써 천지를 개벽하고 불로장생의 선경을 열어

고해에 빠진 중생을 건지려 하노라."

 

이런 강일순이 주장한 것 중엔 다음과 같은 것도 있다.

 

" 시속에 남조선 사람이라 하나니 이는 '남은 조선 사람'을 이름이다.

동서 각 교파에 빼앗기고 남은 못난 사람에게 길운이 있다는 말이니라...

선량하다보니 괄시받고 소외되고 뿌리 뽑히고 수탈당하고

남은 절대 다수의 민중 속으로부터 남조선 사상이 나타날 것이다."

아마도 이 사람을 증산교의 사이비 교주가 아니라

노스트라다무스 같은 예언가로 보고 싶은 게 작가의 솔직한 마음이 아닐까.

 

" 하늘이 일을 꾸미지만 그것을 이루는 것은 인간이다"라는

사상이 당시로써 앞선 생각임은 사실이지만, 동학농민혁명이 실패로 끝나고 실의와

좌절에 빠져 있던 조선 민중들에게 꿈을 진하게 심어 주었고 한 종교의 교조이자 사상가로서

오늘날에도 일부(무시할 수 없는 숫자)에게 영향을 준다지만,

이상하게 그것을 종교로 승화하려는 것은 내게 매우 고까운 일로만 온다.

어쩌면 작가가 증산교인일 수도 있다는 생각까지.

아, 위험하다.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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