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여성 사건사
길밖세상 지음 / 여성신문사 / 2001년 5월
평점 :
품절


27개의 사건을 통해 현재의 여성의 모습이 되기까지의 과정과 원인 등을 밝혀 내겠다고 시작되는 이 책은 2001년에 나왔는데 나는 9년이 지난 이제서야 '여성'이라는 존재에 관심을 갖기 시작해 우연히 책을 독서 목록에 넣게 되었다. 

우리는 일제 강점기를 무슨 꽉 막힌 강제 무력 사회로 착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 그 때만큼 서구 문화가 자유롭게 쏟아져 들어오던 시대는 그 이전에는 없었다.
여성 교육도 마침 시작되었지만 뿌리 깊은 유교로 무장한 조선은 여성의 교육을 가정의 테두리에
못박아 여성주의적인 지식화를 이루는 새로운 힘이 되지는 못했다.

글과 글 사이에 연결 고리가 따로 존재하지 않는 두 번째 이야기는 공창제.
이는 100년 전에 합법화 됐던 성매매를 말하는데 1931년에는 먹고 살기 힘들던 조선인 여자들 중
5072명이 창기가 되어 '여성의 정조를 지킬 수 없는 존재'로 낙인 찍혀 사는 반면 '사회의 해독'이라고 정의되는 이중적 시선 속에 살아야 했다. 그들은 국가가 만든 법의 테두리 안에서 포주에게 빚을 지고 시작해 불어나는 이자 때문에 줄지 않는 빚을 갚았고, 가족들은 결국 딸을 팔아 터무니 없는 금액을 손에 쥐고 나라와 포주에게 속았다는 사실을 알고도 딸을 데려오지 못하는 악순환 속에 살았다고.

그러고 보면 당시의 소설이나 영화에 흔히 비슷한 줄거리가 등장했던 걸로 보아 그 수가 얼마나 많았는지 직접 5072라는 숫자를 마주하지 않아도 쉽게 짐작하고도 남겠다. 거기다가 당시에 생긴 사창이 현재까지도 꽤 많이 남아 있고, 비슷한 빚 갚기 형태가 그리 멀지 않은 시절까지 이어졌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것도 인신매매 등을 통해서 말이다. 

-1930년대 말 세계전쟁을 도발한 일본은 군의 위안과 성병 관리를 위해 위안부를 조직적으로 동원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값싸고 손쉽게 동원할 수 있는' 조선인 여성들이 대거 동원되었으며, 다시 한 번 인신매매가 기승을 부렸다. 국가가 나서서 여성을 동원하여 군대의 성노예로 삼는다는 발상, 그 배경에는 이렇듯 공창제가 있었다- 며 공창제를 마무리하고 있다.

1920년대의 단발 유행은 단순한 유행이 아닌 자신의 의사를 적극적으로 표현하려는 행위였지만,
1930년대 중 후반 전시체제의 분위기와 함께 주춤해질 수밖에 없었다고 하는데 당시의 상황이 조금 더 경렬하게 이어졌다면 여성이 대접 받는 세상이 조금 더 일찍 도래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쉽다.

여성이 가이드 걸, 버스 걸, 티켓 걸 정도로 사회진출을 했던 시절에는 '직업 여성'들이 가정에서도 모범이 되기를 요구했고 이들의 사생활이 사회가 허용한 범위를 벗어났다 생각되면 '과격 주의', '파격 주의' 라는 비난을 퍼부었다는 것, 물론 지금은 사회적 비난이 아닌 가정 내에서의 비난에 불과하겠고, 또 그게 전부가 아닌 일부에 그치는 것이겠지만, 그리고 한 순간에 바뀔 수 있는 문제가 아니란 것도 잘 알지만 그놈의 남성 중심의 세상은 참으로 지긋지긋하다.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에 대한 것이 나와 있었다.
'남녀 칠세 부동석'을 미덕으로 알고 살아오던 사람들에게 거리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여성들은 굉장한 호기심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남성들은 일상생활에서 부딪치는 직업 여성들을 먼저 성적 대상으로 의식했는데, 이는 여성과 인격적 관계를 맺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자신들이 보호할 여성은 어머니, 아내, 딸뿐이라는 이중적인 성윤리 속에서 부하직원으로, 점원으로, 전화 교환수로 만나는 여성은 '함부로 해도 좋은 여성'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러한 인식의 밑바탕에는 여성이 남성보다 열등하다는 편견과 '여자는 밖으로 내돌리면 안 된다'는 오랜 선입관이 깔려 있었다. 따라서 직업 여성들은 직장 곳곳에서 성폭력과 성희롱에 시달려야 했는데, 당시 잡지에서 이를 '무경비 지대에 버리운 직업여성의 정조'라고 표현했다는 사실은 이 문제가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한 당시의 해결 방식은 여성에 대한 단속을 더욱 단단히 하는 것이었다.
1935년 한 신문은 직업 부인의 성공 조건으로 '남자들이 잡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항상 주의하시는 분','남자들과 너무 함부로 놀지 않는 분'이라는 항목을 꼽았다. 이 사실은 직업 여성을 둘러싸고 스캔들이 터지는 근본 원인을 여성 탓으로 몰고 갔다는 혐의가 짙다. 

당시 여인들과 달리 매우 앞선 생각을 지녔었다는 화가 나혜석의 이야기가 끝나고 전쟁 미망인에 대한 얘기가 다른 부분에서와 같이 당시 신문에 게재된 글이나 여느 작품 속에 등장했던 것들과 함께 제시되고 있다. 그 때부터 우리 사회는 자신의 잘못이 조금도 동원되지 않은 일방적 피해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과 태도가 매우 개떡 같았음을 알 수 있고, 여전히 그렇다는 것 또한 매우 충격적이다. 

황산덕 교수의 입에서 시작된 빨갱이 드립.
그는 '자유부인'을 쓴 정비석을 향해 '야비한 인기욕에만 사로 잡히어 저속 유치한 예로 작문을 희롱하는 문화의 적이요 파괴자요 중공군 50만 명에 해당하는 적이 아닐 수 없다'며 주절댔는데,
작가는 '자유부인'에 수없이 등장하는 '땐스야 말로 민주 혁명의 제일보'이며 '민주주의 세상에서는 비록 대통령이라 하더라도 자유를 침범할 권리가 없다'는 구절에서 보듯이 등장인물들의 개인적인 행위는 새로운 국가 건설 과정에서 무수히 사용되었던 거대담론 속에서 이해되고 있었고, 그런 수사를 입음으로써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황산덕이 소설에 쓰었던 바로 그 정치적 용어를 동원해 [자유부인]을 성적 타락을 부추기는 빨갱이로 등치시켰던 것은 아이러니컬한 논법이 아닐 수 없다고 말한다. 더욱 웃기는 것은 황산덕의 모든 비판이 '감히 대학교수를 미천한 양공주 앞에 굴복'시킨 이야기에만 관심을 가졌던 것인데, 이처럼 모든 빨갱이로 몰아부치기 드립은 근거가 미약하기 때문에 오는 말도 안 되는 괴변에 불과하다는 것, 그것도 예나 지금이나 똑 같이. 

지금도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탤런트 견미리의 이름이 반갑다.
바로 호주제 때문인데, 재혼 후에도 아이들 성을 바꿀 수 없게 하는 법을 폐지하자고 적극적으로 나섰다는 것이다. 제공 받은 씨를 뱃속에서 길러 낳아 세상에서 키우고 교육하는 등 대부분의 육아를 담당하는 것은 거의 여자임에도 아빠의 성을 무조건 따라 남자만의 자식인양 구는 그 법.
물론 지금은 양쪽 어디건 상관없어져서 부모의 성을 모두 사용하는 이름까지 등장하고 있지만,
이놈의 몹쓸 법은 아직도 멀었다.

'부녀 회장'의 유례는 생각해 본 적도 관심이 간 적도 없는데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새마을 운동 이후 사회에 나설 수 없던 여성들이 사회적 일을 시작하자 자연스레 활동 조직이 필요하게 되었고, 그래서 생긴 것이 바로 부녀회. 초반 남자들의 곱지 않은 시선과 집안 남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노력 끝에 사회적 인정을 획득했다. 하지만 이것이 여성의 지위향상까지 가져다 주지 못했는데 그녀들의 노동이 그것이 사회와 국가의 이익에 봉사했을 때에만 의미 있는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1975년 겨울 결혼한 여성의 강제 퇴직 문제로 한국 사회가 시끄러웠다고 한다. 은행 여자 직원들을 시작으로 이 문제는 사회적 이슈가 되기시작했다. 이 역시 쉽게 풀리지는 않았는데 결혼 퇴직제가 없어진 후에도 좌천이나 인간적 모욕 등 여자들의 사회 생활은 고통의 연속이었다. 남녀 고용 평등법이 제정된 후에도 여성의 사회적 차별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모집, 배치, 교육, 승진, 승급 등 모든 과정에서 배제되는 불합리나 IMF 시 여성의 명예 퇴직 등은 그 현상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성고문'이란 말의 의미를 알지 못하던 국민 학생이었던 내가 이 단어를 기억하고 있다는 것은 당시 사회 분위기가 어땠는지 능히 짐작할 만하다. 그런데, 과연 추행이 아닌 강간에까지 갔더라면
'처녀성'에 촛점을 맞추던 일반 시민이나 언론의 반응이 조금이라도 달라졌을까? 그리고 그녀 또한 그런 강력한 법적 호소를 할 수 있었을까? 의문이다.
공공연하게 행해졌을 여성 운동가들의 '성고문 사건'을 모두 혼자의 일로 뒤집어 쓴 채 구속된 문기동의 죄는 어디 쯤에 있는 것일까?

1992년 9세부터 아버지에게 성폭력을 당한 김보은의 남자친구와의 합작 살인 사건.
그 때까지 우리 사회는 성폭력에 대해 저항의 증거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가해자 판결이 달라졌었다는 사실이 글을 통해 다시 떠올랐다. 이를 테면 저항하다 칼이라도 맞아야 가해자의 잘못을 인정한다는, 시도나 의도 따위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은, 피해자의정신적 피해 쯤은 그저 개인의 문제이니 알아서 할 일이라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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