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는 척
안보윤 지음 / 문예중앙 / 2013년 2월
평점 :
품절


갈 수 없게 되었음을, 알랑가 몰라 - 안보윤 모르는 척

 

"나무가 '되기 위해' 씨앗이 자라는 것은 아니다. 무엇이 된 것들은 또다른 무엇이 되기 위해, 영원히 무엇이 되지 않기 위해, 끝내는 미쳐버리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목적 때문에 생을 망쳐서는 안 된다"

-이성복,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

 

여기 작정하고 불편하게, 노골적으로 적나라하게 쓴 파국의 이야기가 있다. 이야기를 살펴보기 전에 현실의 통계를 먼저 들여다보자. 보험사기는 20072045억 원에서 20093304억 원, 20114237억 원, 20124553억 원으로 5년 사이에 2배 이상 증가했다. 적발인원은 83,181명으로 보험사기에 가담한 보험설계사만 1,000명이 넘는다. 110건의 교통사고를 고의로 내 14600만 원을 보험금으로 탄 운전기사가 있는가 하면, 10대의 보험사기 범죄는 4년 전에 비해 3배로 늘었다. 이제 보험사기는 영화의 단골 소재일 뿐만 아니라 누군가의 생계 수단이다. 낙지 살인사건 등 사회면을 장식한 사건사고 뉴스가 알고 보니 '보험금을 타기 위한 치밀한 계략의 결과'였음이 밝혀지는 것도 새삼스럽지 않다. 보험금을 타내기 위해 기상천외한 해프닝을 벌이는 가족을 그린 코미디 영화 <하면 된다> 10여년의 세월 동안 빚에 쫓기는 사람들이 장애를 만들어 보험금을 타는 <피에타>, 보험금을 받기 위해 2년을 기다려 자살하려는 사람들을 다룬 <수상한 고객들>로 진화(?)했다.

 

안보윤의 신작 장편소설 모르는 척은 이처럼 현실 속 깊숙이 들어온 보험사기를 중요한 소재로 삼고 있지만, 허구적 세계를 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독자는 작가가 창조한 허구의 세계에서 의외의 일상성을 발견하고 흠칫 놀란다. 소설의 제목이자, 이 작품을 관통하는 '모르는 척'은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신종 기술이다. 굶주리는 아프리카 아이들, 지구 온난화, 전쟁, 국정원 여론조작까지 분노하거나 해결해야 할 거리는 차고 넘친다. 하지만 섣불리 분노하고 개입하다가는 내 일상이 망가지는 건 순식간이다. 정글 같은 이 사회에서 개인의 평온한 일상은 그래서, 너무 중요해서 방해받지 않아야 할 그 무엇이 된다. 일상에 대한 집착은 생각 외로 대단해서, 평범한 일상을 방해하는 존재에 대해서는 놀랄 만큼 무심해지거나 무감각해진다. 일정한 규칙이 한 번 생기고 나면, 그 규칙은 지켜야 하는 그 무엇으로 바뀌고 반복되는 일상의 기준이 된다. “진정한 폭력은 무심함과 무책임함이라는 작가의 시각은, 잔혹한 묘사로 눈을 감게 하는 장면이 상대적으로 덜한 이 작품에서 보다 오롯이 구현된다.

 

작가는 모두가 알지만 아무도 나서지 않는 사회에서 몸을 찢고 부수며 파괴되어가는 가련한 영혼의 생을 담담하고 건조하게 그려낸다. 학대, 방임, 학교폭력, 왕따 등 노출된 폭력을 세밀하게 파헤쳐 온 작가는 이번 작품에서 가난과 무관심, 무책임이라는 폭력 세트에 보험사기를 추가하고, 이 폭력에 멍들어가는 개인의 내면에까지 시선을 확대한다. 무능한 부모의 편애, 불행한 소년과 소녀의 만남 등 성장과 맞물린 이야기 전개는 설득력있을 뿐더러 자칫 단조로울 수 있는 반복적인 폭력의 서사에 힘을 불어넣는다. 미리 예고한 파국을 향해 시치미 떼고 이야기를 긴장감 있게 전개시키는 솜씨는 일품이다.

 

시작이 어려울 뿐, 일단 한 번 보험금 수령으로 평온을 찾은 가족의 일상은 웬만해서는 바뀌지 않는다. 독재 체제의 대중동원이 꼭 대중을 속여서 이뤄진 것만은 아니듯, 이 가족의 삶도 마찬가지다. 표면적으로는 아무도 인근에게 그 역할을 강요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다음 주엔 학교 가도 된다고…… 빻은 마늘을 냄비에 밀어 넣던 어머니가 동작을 멈'추고(166) '재촉, 도 의심도 담겨 있지 않은' 차분한 목소리로(194) "안 나가니?" 등의 질문을 던지거나, '안색이 별로네'(107)란 말을 툭 내뱉거나, 냄비 옆에 대출금상환독촉, 장과 연체고지서가 놓여져(166) 있는 식이다. 한 사람의 일방적인 희생으로 버틴다는 점에서 이 소설의 가족은 전작에 등장한 '조건부 임시 동거인'(우선멈춤, 41) 가족보다도 못한, 아니 더 나쁜 관계다. 작가의 말대로 '잠깐만 멈춰서면, 잠깐만 눈을 돌리면 생각보다 많은 것들이 보이고 들리고, 또 변할'(우선멈춤 193)텐데, 이 가족들은 '못 들은 척, 못 본 척, 모르는 척'(사소한 문제들, 227)으로 일관할 뿐만 아니라 다른 방법이 대체 뭐가 있냐며 난 저 애한테 아무 말도 안 했!’(255)다고 강변하기까지 한다. '적당히 무시하고 적당히 모르는 척 넘어가는 것이 훨씬 편하고 좋다'(우선멈춤, 40) 쪽을 택한 가족의 일상은 서로의 욕망을 맹렬하게 쫓는 아침 드라마 속 막장가족보다 더 막장에 가깝다. 서로의 살을 파먹으며 '짓이겨진 뒤에야 물음표처럼 길어지며 찢어진 속날개를 내놓'(12)는 고추 속의 검고 둥근 벌레들처럼.

 

모르는 척은 타의에 의한 지속적이고 노골적인 폭력을 그린 전작들보다 잔혹한 묘사가 덜한데도 폭력과 자해가 묘하게 섞여 있어서인지 오히려 더 불편하다. “사람들은 폭력에 대해 아주 잠깐 화내고 아주 오래 잊어버리잖아요라는 작가의 말처럼, 친구의 항문에 돌을 밀어넣는 아이들처럼 원망할 대상이 명확했던 전작에서와 달리, '알기야 다 알지'(96)만 모두가 '모르는 척'하는 이 사회에서 누구 한 사람을 꼭 집어 책임을 묻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지금의 한국 사회는 '10억원이 생긴다면?'이란 물음에 '1년간 감옥에 가도 괜찮다' 고 답하는 고등학생이 절반에 육박하는 곳이다.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수단인 자기 몸뚱이로 돈을 벌겠다고 눈이 벌게진 사람들을 무슨 수로 말릴 수 있을까. 자신을 포함해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동안 '왕따조차 될 수 없었'(136)던 인근은 '흩어진 몸을 이어 붙이느라 급급해 누더기가 된 줄, '(173) 모른 채 '지금현재그리고,가 파괴된 세계'(217)에 남겨지고, '그냥 어린애일 뿐'(77)인 인호는 '말간 얼굴로 챙겨 입는 교복과 지퍼가 일곱 개 달린 책가방이 누리병원 3일로 얻어진 것임을몰랐기에 철없음을 허락'(136)받아 영어단어를 외우는 특혜를 누리며 성장한다.

 

그나마 인근을 알아주는 건 '얼굴에 구멍 한번 뚫리고 나니까, 돈이 생긴'(169) 것을 알아버린 절집 애문정이다. 문정은 '다치더라도 아주 약간만, 눈에 보이는 만큼만 다쳐'(167)야 한다며 몸을 '내버린 깡통 취급'(167)하지 말라고 충고하지만, 타인의 눈에 인근은 '철로와 기차역 주변에 넌출처럼 엉긴 지박령'이자 '태연한 얼굴로 자신의 발가락을 망치로 내려치는 악령의 모습'(177)으로 비칠 뿐이다.

 

제일 나쁜 건 있지, 기대하는 마음이 생긴다는 거야. 절대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도 당장 나한테 이득이 생기면 마음이 흔들려. 못 이기는 척, 모르는 척 받아들이게 돼. 그게 좀더 지나면 당연해져버리는 거야.” (201)

 

하나뿐인 친구였던 문정마저 '너도 이제 그만'하라고 '그만두지 않으면 사라져버'(201)린다며 떠나버린 후, '모른 척 도망만 다닌 주제에 반송장까지 끌어들'(222)인 엄마는 '한 명은, 한 명쯤은 제대로 살아야 되지 않겠'(227)냐며 '그 잘난 입 먹여 살리느라 병신이 다 된 얘'(222) 대신 인호를 대학이란 신세계로 보낸다. 탈출에 성공한 것처럼 보이는 인호와 달리 인근은 모두가 늙어 죽을 때까지’(263) 죽어야 하는, '죽은 것보다 더 나쁜'(263) 운명이다. 잠시 돌아온 문정이 '여길 떠나자. 나랑, 가자'(265)고 손을 내밀지만 이미 늦었다. 이 슬픈 프로포즈는 '손가락이 하나쯤 없어도 사는 덴 지장 없단 생각'(267)을 하는 어머니의 요구에 부딪히면서, 결국 영원히 자기 자신이 되지 않기로 한 인근이 폭탄을 터트리는 결정적 도화선으로 작용하고 만다. Boooooooooomb!

 

소설은 아무도 떠날 수 없고, 누구도 도착할 수 없고, 어디로도 이어져 있지 않은 그런 곳’(286)인 오래 전 폐쇄된 기차역에서 끝난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파국을 마주하고 그저 먹먹해진 독자 앞에 작가는 눈 하나 깜짝 하지 않고 이 소설을 들이민다. 이게 현실이야, 모르는 척 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윤미네 집 - 윤미 태어나서 시집가던 날까지
전몽각 지음 / 포토넷 / 2010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따뜻한 시선... 보다보면 마음이 찡해져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신화의 힘
조셉 캠벨 & 빌 모이어스 지음, 이윤기 옮김 / 이끌리오 / 200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실용 정부가 출범했다. 인터넷 상의 댓글들이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에서 ‘경제만 살리면 되지’로 바뀌었을 뿐. ‘더 잘살아야 한다’는 뿌리 깊은 강박과 냉소는 더 깊어진 지금 “왜 신화 같은 게 필요하냐”고, 그리스의 신들 따위가 지금 2008년을 살아가는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조셉 캠벨과 빌 모이어스의 대담집 <신화의 힘>을 권하고 싶다. 20세기 세계 최고의 신화 해설자로 꼽히는 캠벨의 입을 통해 신화에 관한 궁금증은 물론 우리가 한번쯤 생각해봤을 질문들의 답을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다.  

물론 대담집이다 보니 어떤 질문에 대한 답이 명쾌하게 나오기보다 이쪽저쪽으로 주제가 흘러다니고 있다는 느낌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어떻게 살아야 할까’란 근원적이고 막연한 질문 앞에서 캠벨의 신화 이야기만큼 갈증을 풀어주는 책은 드물다. 개인이 혼자 막연하게 궁금해하던 것, 그러면서도 진실일 것이라 믿고 있던 것들이 왜 신화에 들어있는지, 전형적인 어떤 것을 알려주는 메시지로서의 신화의 역할도 분명하다.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인간 내면의 “집단 무의식”이 바로 신화이기 때문에 인간은 공통된 의식구조를 가지게 된다고 캠벨은 설명한다. 문화적으로 아무 연관이 없는데도 같은 이야기가 그대로 발견되는, 수렵과 농경 유목 사회의 반목과 상호작용은 캠벨의 풍부한 예시로 빛을 발한다. 평생 하고 싶은 일은 하나도 못 해보고 사는 따분한 인생 대신 자신의 육신과 영혼이 가자는 대로 가는, 천복을 쫓는 삶이 신화와 함께 펼쳐진다.

더 이상 신화를 믿지 않는 현대인들이라도 개개인 자신의 인생을 살아내는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모두 자기 개인 신화 속의 영웅이다. ‘큰 나무가 빽빽한 숲으로 들어가면 신의 존재를 느끼게 된다’던 키케로의 말처럼 ‘창조의 실재에 대한 느낌’은 인간의 기본적인 정서다.  

캠벨은 담배 하나를 피워도 태양에게 첫 모금을 마시라고 보내던 수우족 인디언의 시대는 지났지만, 경제화ㆍ실용화에 집중하는 이 시대에 살아가는 현대인이야말로 ‘천복(天福)’의 정거장을 찾아야한다고 조언한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시시한 음악을 올려놓아도 좋고, 좋아하는 책을 읽어도 좋은 자신만의 ‘성소(聖所)’를 만들어 우리에게 ‘요구된 일’ 대신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

사회가 꾸는 집단적인 꿈이 신화로 발현된다는 캠벨의 지적이 맞다면, 우리 사회는 어떤 신화를 꿈꾸고 있는 걸까. 월급쟁이의 신화라 불리는 이명박 당선인과 캠벨의 신화 사이에는 어떤 간극이 있을까 곱씹어보게 만든다.

‘단지 필요한 것은 실뿐인데도 우리를 구해 줄 재물, 권력, 사상을 찾아 엉뚱한 곳을 헤메’고 있는 사람들에게, 인간으로서 우리가 속한 시대의 역사를 사는 법을 익히기 위해서라도 일독을 권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녀에게 말하다 김혜리가 만난 사람 1
김혜리 지음 / 씨네21북스 / 2008년 2월
평점 :
절판


  사람은 타인을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했던가. 한이불에서 살 맞대고 몇십년을 함께 산다고 해서 서로를 다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너는 이런 사람이야, 라고 자신만만해하고 있을 때쯤 뒤통수를 치는 것이 사람일지도 모른다.  

 하물며 매체나 이미지, 그리고 캐릭터를 통해 간접적으로 만나게 되는 배우나 작가는 말해 무엇할까. 기자라는 제 3자에 의해 걸러진 그들을 만나는 ‘인터뷰’ 역시 그러하다. 인터뷰 하나 읽고 그 사람을 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만한 착각도 없을 터이다.

 오랜만에 그 착각을 다시 하게 만드는 책을 만났다. 인터뷰라는 특성의 한계는 여전하지만, 그래서 더 매력적인 책, 『그녀에게 말하다』-김혜리가 만난 사람이란 부제가 붙어있다. ‘김혜리가 만난 사람’은 저자가 몸담고 있는 씨네 21의 고정코너 이름(김혜리 기자가 만난 사람)과 유사하다. 그 잡지에서 가장 먼저 챙겨 읽거나, 가장 나중에 읽게 되는 코너다.

전문 인터뷰어(intervieer)로 활동하는 사람들의 책을 간간이 읽어 왔지만, 직접 구입한 것은 처음이다. 쉬우려면 얼마든지 쉽지만, 어려우려면 또 그만큼 어려운 것이 인터뷰다. 인터뷰가 그저 질문 몇 개 던지고 답변을 받으면 그만, 이라고 생각했던 어린 시절의 치기와 질문지를 받아 지면을 메꾸는 기자들의 행태가 겹쳐져 인터뷰란 방식은 내게 그렇게 미운오리새끼가 되어 있었다. 정해진 답변을 늘어놓는 성의없는 인터뷰만큼 재미없고 따분한 것도 없다. 지루한 질문지에 그저그런 답변을 적어주는 일 역시 마찬가지겠지만.

이 책은 총 21명과 만난 인터뷰의 기록이다. 이창동이나 송강호 등의 영화인을 비롯해 구본창, 정구호, 황두진 등 예술이란 이름으로 커버되는 모든 종류의 사람들을 만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니, 각자의 분야에서 최고라 할 수 있는 ‘쟁이’들이자 고수들이다.

‘내가 읽은 최고의 인터뷰집’이라고 감히 말하는 뒷면의 주례사 비평이 아니라 해도 나 역시 일단은 그 리스트에 이 책을 올려둘 참이다. 1주에 한번씩 책을 내야하는 주간지 기자의 짧은 호흡에서 이렇게도 진중하고 긴 글이 나올 수 있다니 놀랍다. 인터뷰이(interviewee)와 관련된 모든 글과 영상을 찾아서 읽고 보고 생각하고 나와서 던지는 질문들이란. 툭툭 내뱉는 것처럼 보이지만 질문자와 답변자 모두의 내공이 느껴진다. 아무렇게나 칼을 휘두르고 있는 것처럼 조이지만 칼이 멈추면, 상대방이 쓰러져버린다고나 할까. 날카롭거나 신경질적이지 않게, 저돌적이지 않게 은근하고 조용하게, 둔하게. 인터뷰이만큼 인터뷰어가 함께 드러난다.

 지승호 같은 전문 인터뷰어의 글도 좋지만, 김혜리의 글은 좀더 다른 느낌이다. 지승호의 글이 날것 그대로, 지인과 시시콜콜 수다를 떠는 듯한 인터뷰이를 드러낸다면, 김혜리의 글은 인터뷰어와 인터뷰이가 함께 슬몃 다가오는 느낌이다.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지만 서로에 대한 호감과 진심이 느껴진다고나 할까. 남녀가 사귀는 것보다 더 좋다는 직전의 기분좋고 설레이는 밀고 당기기의 기분.

인터뷰이가 아닌 인터뷰어에게 호감을 느끼게 되는 신기한 경험, 나도 그녀에게 인터뷰당해보고 싶다는 욕심이 절로 생긴다. 인터뷰는 카메라와 녹음기를 앞에 두고 만나는 사람에게서 진심을 이끌어내는 힘든 작업이지만 그만큼 흥미로운 인간에 대한 탐구이기도 하다. 그녀의 두 번째 인터뷰집이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의 핫드링크 노트
프티그랑퍼블리싱 엮음, 박규리 옮김 / 나비장책 / 2007년 11월
평점 :
품절


 

 학교 앞에서 3000원~3500원이면 밥 한 끼를 따뜻하게 먹을 수 있었던 때였다. 언제부턴가 학교 앞에 커피 전문점이 하나둘씩 생겨나기 시작했다. 가격은 1700원부터 3000원이 훌쩍 넘는 것도 있었다.

 ‘곧 없어질 것’이란 내 예상과 달리 이통사 할인 혜택을 등에 업은 패밀리레스토랑의 급성장과 발맞춰 스타벅스를 위시한 외국계 커피 전문점들은 소위 ‘쿨’한 감성들의 hot place로 떠올랐다. 혼자 와서 2시간 넘게 죽치고 앉아 있어도 흘낏흘낏 처다본다거나 이제 그만 나가라는 주인의 은근한 압박을 견디지 않아도 된다는 것 외에도 뭔가 있어보인다는 ‘간지’가 한몫했다. 게다가 노트북을 펴놓고 이어폰을 끼고 뭔가에 몰두하고 있는 이의 옆모습은 그야말로 잡지 화보에나 나올 법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지금은 너무 흔해졌고, 본고장인 미국에서도 스타벅스를 살리겠다며 초대 CEO가 구원투수로 투입되고 있지만 처음 그 문화는 너무도 ‘쿨’한 동경의 세계, 그 이상이었다.

 같은 커피를 마셔도 다르게 느껴지고, 뉴욕이나 런던 한복판에 와있다는 착각에 빠질 수도 있을 터. 사이즈부터 시럽을 넣을지, 500원을 더 내고 저지방 우유를 넣을지의 복잡한 주문방식도, 이름도 생소한 여러 가지 커피를 고르는 것도 ‘자기 취향이 그만큼 확실하고 또 그만큼 존중받는다’는 것으로 격상됐다. 까다롭게 주문하면 “아 그냥 대충 먹어, 왜 그렇게 까다롭게 굴어”라고 타박받던 문화는 Old-Fashion한 구닥다리로 취급할 수 있었으니.

 커피와 관련해 이런저런 책들이 많이 나왔지만 ‘나의 핫드링크 노트’처럼 따뜻한 책은 처음이다. 한 장 한 장 읽다보면 이런저런 사회적인 맥락은 별 의미가 없어진다. 그저 따뜻하게 우려낸 차 한잔을 손에 감싸쥐고 여유를 즐기는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고 유년의 기억으로 대표되는 추억의 회로에 반짝 불이 들어온다. 

 물론 이 책의 감성과는 무관하게 커피를 둘러싼 사회적 논의는 무성하다. 직장인 한 사람이 커피 값으로 지출하는 돈이 월평균 2만원에 가깝다는 통계도 나왔다. 2006년을 강타했던 ‘된장녀’ 논란도 빠질 수 없다. 하지만 외신에서 “한국의 외로운 2ㆍ30대 젊은이들은 주로 카페(스타벅스ㆍ커피빈)에서 커피 한잔과 베이글 등을 먹으면서 공부나 일을 한다”고 언급할 정도로 사회적인 현상이 되어버렸다.

 별다방, 콩다방으로 대표되는 외국계 커피 전문점의 위세 속에 맥도날드, 롯데리아 등 패스트푸드점의 영역 넓히기, 할리스 등으로 대표되는 국내 체인의 사업 확대. 이런 일련의 흐름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소규모의 카페들까지…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는 있겠지만 확실히 한국의 차(커피) 문화 저변이 넓어지고 진일보한 것만은 사실이다. 에스프레소 기계 판매가 새로운 혼수품에 추가됐다는 이야기까지 들리는 것을 보니…

 이상할 정도의 열풍과는 달리 관련 책은 그다지 많지 않다. “우리 까페나 할까”란 제목의 책부터, ‘스타벅스를 마시는 여자, 스타벅스 주식을 사는 여자’란 책까지… 정작 중요한 알맹이는 뺀 느끼한 책들의 홍수 속에서 ‘나의 핫드링크 노트’는 비현실적인 재료와 레시피를 앞에 두고도 기분좋은 세계여행을, 그리고 차를 마시는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책이다. 자연스레 역사와 기후, 그리고 문화를 ‘차’라는 기호식품을 통해 알게 되는 기분은 달콤하면서도 쌉싸름하다. 다만 요리책과 에세이의 그 어디도 아닌 중간쯤에 서 있는 듯한 책의 컨셉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