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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몰랐던 K - ‘진짜 선진국’ 대한민국을 위한 박노자의 불편한 제안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1월
평점 :
박노자의 글을 꾸준히 읽은 지 꽤 오래 되었다. 그의 글을 읽으며 드는 감정은 늘 질투심이다. 뭐야, 한국에 대한 관심과 비판의식은 한국의 진보보다 진보적이고 한국의 노동계급보다 계급적이잖아. 레드컴플렉스도 없잖아. 자본친화적 경향에서 자유롭잖아. 게다 한국말도 나보다 잘하는 거 같네. 아우씨...부러울 수밖에 없다. 내면의 검열관 없이 한국사회에 대해 말할 수 있다니.
나도 그처럼 눈치 안보고 과격하게 말하고 싶다. 하고 싶은 말이 얼마나 많은가. 익명을 기반으로 사회적 약자만 족처대는 더러운 키보드 권력들, 치졸한 좆우월주의자들, 넘사벽 국가권력이나 경찰권력들, 그 다양한 권력이 연합해 내 머리 속의 검열관 왕좌에 또아리를 틀고 있다. 적절하게 겁줘서 하고 싶은 말을 삼키게 하려고.
그는 노동귀족이라는 말에 담긴 신자유주의의 노동계급갈라치기 전략(39쪽)이나, 어느 진보연하는 학자도 함부로 입에 올리지 못했던 이석기 전 의원의 징역 상황(59쪽)에 대해서도 거리낌없이 말할 수 있다. 심지어 이순신 장군도 깐다. 그토록 한국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자유로움이라니...그 자유로 그는 우리는 알고 싶지도 않은, 관심도 없는, 국뽕이나 차올라서 언급하는 K들 속에서 <당신이 몰랐던 K>를 쓸 수 있었을 것이다.
그의 정체성 역시 부러움의 대상이다. <당신이 몰랐던 K> 책날개에 쓰인 약력을 보면 그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아니라 소련 레닌그라드에서 태어났다. 소련에서 조선사를 전공했고 고대 가야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1년에 귀화하여 한국인이 되었고 현재 노르웨이 오슬로대에서 한국학을 가르치고 있다.
그의 이런 여러 층위의 복합적인 정체성이 세상과 사람을 바라보는 특별한 시각을 가지게 했을까? 한국에 오래 살았다고 해서 한국인이 되는 것도 아니고 한국에 대해 잘 아는 것도 아니다. 특히 오래 살았던 나라에 애정을 갖는 것이나 그 나라 말을 잘 쓰는 것, 그 나라의 사회정치적 상황에 비판의식을 갖는 것 등은 또 다른 문제다. 미국이나 유럽 출신 백인들은 한국에 산 지 10년이 넘어도 한국말을 잘 배우려 하지 않는다. 한국인들과 친해지면 한국인 역시 영어로 대화하기를 원한다고 한다. 베트남에서 산다해도 베트남어를 배우려하지 않는 한국인처럼. 언어는 권력이고 입만 열면 그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이들이 피지배자의 언어를 배울 이유는 없을 테니까.
그래서 또 놀란다. 그는 권력자의 언어에서도 자유롭다. 스스로 억압과 차별이 어떤 것인지 오랫동안 사유해왔고 한국의 보수를 극우주의자들이라고 단칼에 말할 수 있다. 누구든 이번 대선을 '현상을 유지하려는 자와 상황을 악화시키려는 자들의 대립'으로 생각할 수는 있다. 그런데 그는 공중파 라디오 방송에서 그걸 아무 거리낌 없이 말한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을지문덕, 강감찬, 이순신을 통해 남성의 폭력적 경향을 문제삼을 수 있다. 한국남성이 그랬다면 감히 위대한 장군들을 문제시한 결과로 대찬 욕을 먹어야 했을 것이고, 한국여성이 그랬다면 온라인에서 뼈도 못추리게 혐오의 난도질을 당했을 것이다.
그가 장군들까지 소환해서 비판하려 한 논지는 이 책에서 제일 좋았다. 솔직하고 따뜻하기까지 하다. 그 역시 중학교 시절 왕따 피해를 겪었는데, 그의 생각은 인간의 본능에 가 닿고 가해자를 사회적으로 이해하기까지 한다.
나는 아동기에 폭력을 당하면서 계속 그 원인들에 대한 분석을 시도하기도 했다. 대타적 폭력 충동이 인간 본성에 내재한 일부분이라는 생각을 나는 처음부터 일축했다. 나를 포함한 여러 폭력 피해자들도 분명히 가해자들과 같은 인간인데 왜 타자에게 폭력을 가하고 싶은 충동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가? 이 의문으로부터 나는 폭력이 '모든 인간들의 본능'이라기보다는 어떤 특정 상황에서 발현된다는 것을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가해자들의 가정환경과 함께 나는 가해자들이 나를 향해 내뱉는 말들도 하나하나 분석하곤 했다.
36~37쪽.
날카로운 비판과 분석에 이어진 인간중심적인 따뜻한 그의 견해에 무장해제되지 않을 수가 없다. 한국전쟁이 신분계급사회를 변화시켰다는 부르스커밍스의 주장에서 더 나아가 한국사회를 차별, 배제, 혐오의 도가니로 만드는 데 일등공신의 역할을 한 학벌사회까지 비판하는 대목에서는 절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수 세기 동안 굳어진 반상, 양천의 차별 구도가 한국전쟁과 이농, 도시화 과정이라는 외부적 쇼크 속에서만 해체될 수 있었듯이, 학벌 사회도 어떤 외부적 쇼크 없이는 스스로 해체되지 않는다.(85쪽)'는 얘기에 어찌 수긍하지 않을 수 있으리. 궁금한 것도 있다. 얼마나 한국어를 공부해야 반상, 양천이란 말을 글 속에 저리 자연스럽게 쓸 수 있을까. 심지어 그는 <맨발의 청춘>이란 영화까지 알고 있다. (109쪽)
박원순 시장 사건도 역시 자기검열 과정 없이 쓰면서 '우리는 여전히 '여혐'이 남성의 특권이 강하게 작동하는 페니스 패권의 퇴보적인 사회에서 살고 있다. (92쪽)'고 한다. 이쯤되면 그의 귀화 신분까지 부러워지기도 한다. 노르웨이와 러시아 상황을 비교해 혐오, 돈 선망, 비정규직의 처지, 표현의 자유, 장시간 노동을 비교한 점들도 흥미로워 놓칠 수 없다. 특히 '그 어느 희생자도 잊지 않고 모든 죽음에 평등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변혁의 원동력(100쪽)'이라는데, 평등의 의미를 부여하는 대상에 '죽음'까지 고려한 점은 더욱 박노자다웠다. 그다운 시선이 드러난 글 중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176쪽)' 은 글 전체를 인용한다 해도 과하지 않다.
계급, 젠더, 인종을 넘너들며 펼치는 한국사회의 다양한 모습들을 까발리면서도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 재분배를 통한 평등한 사회구조 구축에 대한 강조를 잊지 않는 박노자같은 지식인은 그저 소중하다. 소련 사회주의에 대한 경험, 노르웨이라는 선진국에서의 생활, 한국에 대한 사유가 겹쳐지며 쏟아낸 그의 뜨거우면서도 차가운 주장에 깊이 감동하며, 그같은 한국인이 있어 K에게는 또 얼마나 다행인지 존경과 감사를 넙죽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