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읽는 인도 이야기 <인도수업>. 인도 북부에서 3개월 지낸 시간의 기억이 무럭무럭 뭉게뭉게 마음에서 올라온다. 벌써 10년이 지난 기억. 저자는 인도로 떠난 지 20년 만인 2013년에 귀국했다고 한다. 공대 나와서 무슨 일로 인도까지 가서 20년씩이나 지냈을까. 캘커타대학에서 용수보살의 중관사상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고 한다. 음...무슨 말인지 모른다. 단순한 인도기행이 아니다. 그야말로 <인도수업>이다. 불교가 탄생하던 시절의 인도와 지금의 인도는 다르다는 것(29쪽), 매번 부처님 고향 가지고 싸우던 일이 그것 때문이었구나. 여러 언어를 가지고도 불편함 없이 잘 살아가는 인도사람들(32쪽). 철길을 건너는 소를 살리기 위해 기관사가 탈선까지 하는 나라인데 고급레스토랑에선 소고기스테이크를 판다(35쪽). 호주나 뉴질랜드 산 소는 신성하지 않다고 한다. 아우 진짜. 이 인도스러운 뻔뻔함. 진짜 못말린다. 저자의 표현은 인도를 이해하기에 유용하다. 일단 살고 보고 그 정당성을 치장한다.신성함 뒤에 감추어진 '일단 살고 보는', 그리고 그 정당성을 치장하는 자세를 이해하면 참과 거짓의 경계마저 허무는 인도인의 삶이 조금 더 눈에 들어온다.브라만 거지와 호텔 이발사가 카스트로 섞일 수 없다. 직업의 분화라고 아무리 변명해도 카스트는 인간차별, 인간혐오의 그림자가 짙다. 하긴 인도인들의 정당성 치장 정도를 고려하면 별다를 것도 없다. 인도에서 지내던 시절, 인도남자들은 내게 인도가 여성들이 가장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곳이라고 했다. 유엔 통계까지 들이밀어도 여성들이 얼마나 행복한지 우기고 정당성을 치장한다. 예수님도 힌두교 제자 중 한 사람이라고 우기고 나서 정당성을 치장하니 빨리 포기하면 시간도 절약된다. 바라나시는 겨울철에 가면 제대로 알 수 없으니 우기 성지순례를 권하는 조언(51쪽)은 챙겼다. 바라나시는 언젠가 꼭 가보려 마음먹고 있으니까. 부처님이 6년간 고행한 후 깨달음을 얻었다는 보드가야는 성지순례하는 관광객으로 늘 붐비는데, 부처님이 깨달은 이 곳에 과거엔 납치가 주요사업이라 할 정도로 치안이 엉망이었다 한다 (75쪽). 부처님의 깨달음은 어디가고 사람들은 또 '일단 살고 보기 위해' 열심이다. 그래도 저자가 부처님의 연기법에 대해 차분하게 설명해주시니 마음이 차분해진다. 불교에 대해 암것도 모르는데.삼예논쟁을 통해 정리된 티벳 불교, 생활불교의 특징을 지닌 티벳 밀교의 이야기를 지나 불살생과 육식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위구르족을 도축장에 수입해 살생을 대신했다는 얘기, 티벳의 영광을 과장한 그레이트 티벳 얘기가 이어지면서 계속 불교에 대한 가르침이 나온다. 쩝. 어렵다. 투크르로 넘어가면서 내용은 좀더 어려워진다. 그래도 중요한 가르침 하나는 챙겼다.티벳속담 가운데 '잡으려면 야크를 잡아라'라는 게 있다. 살생할 수밖에 없다면 자그만 축생들을 잡아 많은 살업을 짓지 말고 고산 들소 한 마리를 잡아 불필요한 살생을 피하라는 뜻이다. 인도 다람살라에서 이 이야기를 들려준 티벳 스님은 이 때문에 달걀을 먹지 않는다고 했다.곡물 구하기가 어려워 육식을 할 수밖에 없는 티벳에서 불자라면 결국 고민을 해결할 방법을 찾아야 했을 것이다. 꼭 필요한 살생이라도 그것을 최소화하기 위한 방법. 야크라는 하나의 생명을 달걀로 치면 수백의 생명이 될 수도 있을 테니. 다만 무정란인 계란이 생명이라면 이 생명은 어떻게 생존을 유지해야 하는 걸까. 닭 오십 마리 먹느니 소 한 마리 먹으면 마흔 아홉의 목숨을 아끼는 걸까. 부질 없는 생각도 따라온다. 핵심은 살생을 되도록 피하라는 말씀일 테다. 인도에서 살며 잠시 한국에 다녀갈 때 버스 터미널에서 마주친 한 젊은 친구가 물었다."도를 아십니까?"''야, 지금 인도에서 왔다!"그러자 놀란 표정으로 인도의 도 상황을 묻더니 잠시 후 불쌍한 표정으로 오늘 한 끼도 못 먹었다며 자장면이나 사 먹을 수 있게 돈을 좀 달라고 했다. 먹고 사는 게 곧 도이지 다른 게 도이겠는가. 그러게, 그러하니 도에 열나 정진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