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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달리기
조우리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2월
평점 :
언젠가부터 돈 많은 사람이 진심으로 부러워졌다. 돈 많은 사람이 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돈 많은 부모 밑에서 태어나는 것이다. 강력한 신분계급과 그 세습이 우리 사회의 강력한 지배구조를 강화하고 빈부격차를 벌리고 있건 말건, 그냥 부자가 되고 싶다.
돈이 많이많이 생기면 공기좋은 너른 땅에 방이 100개쯤은 있는 건물을 올릴 것이다. 각각 방에는 화장실과 서재로 쓸 수 있는 넉넉한 거실, 아담한 침실이 있을 거고, 거실에는 듬뿍 햇살이 들어올 것이다. 단촐한 주방이 있을 테지만 식사는 좋은 식자재와 건강을 고려해 짠 식단이 제공되는 넓은 레스토랑에서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식당을 꽤 신경써서 만들 거니까. 방으로 배달도 되는 질좋은 술과 안주제공 서비스 및 세탁서비스도 제공할 거고. 다양한 루트의 산책로가 있는 너른 정원이 보이는 곳에 근사한 바도 만들고.
이 건물에 뭔가 새롭게 시작하고 싶은 여성들을 무료로 입주시킬 예정이다. 사람들은 최대 3년까지 집걱정 없이 자기 인생을 계획하고, 구체화시킬 행동을 하고, 살 만한 힘을 얻어 나가면 된다. 더 돈이 많다면 하와이나 칠레에 거대망원경 몇 개 사서 천문학자들에게 주고 싶고, 알렉산드리아 도서관같은 도서관도 짓고 싶다. 보이스피싱과 화장실 불법촬영 범죄를 없앨 사업에 필요한 만큼 돈을 대주고, 종편을 엿먹일 종편을 설립해 진보적 가치를 구현하려는 언론에게 돈을 펑펑 퍼줄 것이다. 크하하하하하하하 멋지지 않음? 문제는 돈이 사람을 변질시킨다는 것. 그많은 돈을 가진 내가 계속 제정신일 수 있을까? 그 돈을 가지고도 지금처럼 발랄하고 명랑할 수 있을까. 돈만 있으면 하기 쉬운 일들을 그 돈많은 재벌가 자식들은 왜 안 할까.
조우리 연작소설 <이어달리기>에서 나를 내내 매혹시켰던 건 성희의 유산이었다. 말로만 돕는 게 아니라 실제 도움이 되도록 충분히 돈을 썼다. 좋은 어른인 성희는 피 한 방울 안 섞인, 아직 어른이 되지 않은 여성들에게 아낌없이 스스로 자신만의 파도에 오르도록, 둘둘둘 커피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 되도록, 구르기에 성공하도록, 이어달리며 배턴을 전해받도록 진심을 다해 돕는다. 성희는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대가 없이 어린 여성들이 자신의 세계에 다가가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이모라 불리지만 진짜 이모의 친구였을 뿐이다. 어떤 이해관계도 없다. 착한 어른이고 시한부 삶을 정리하며 자신의 유산을 적절하게 건낼 뿐이다. 이런 어른을 만난 적 있었던가. 꿈같은 이야기들인데 그저 좋다.
존중받고 환대받은 아이들은 이어달리며 또 근사한 어른이 되어 간다. 빨간 풍선이 달린 설가타거북까지 그 관계를 이어가도록 돕는다. 여성들 사이에서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넘쳐흐른다. 그 사이 사랑과 신뢰가 있고, 편지와 미션이 있다.
성희는 1인실 침대의 머리맡에 작은 사막에서 수영과 거북이 함께 작은 사진을 담은 액자를 놓아 두었다. 기나긴 미션을 수행하고 있는 둘의 모습. 거북에게 빨간 풍선을 매어주던 날. 성희는 거북에게도 미션을 주었다. 수영이를 부탁해. 오래오래 같이 살아줘. 변함없이. 고요하게. 75쪽
성희의 마음은 담백한 행운이나 환타지 같은 환대를 믿지 않는 까칠한 심성소유자인 나의 차가운 마음마저 노골노골하게 만들었다. 자기는 죽어가면서도 거북에게 이런 미션을 주는 이모라니. 성희 이모. 부디 저의 이모가 되어주세요.
이 아름다운 이야기는 늘 성실하게 잘 듣는 역할을 하는 데 익숙한 아름에게 마지막으로 이어진다. 배턴을 건내주지 못하고 이어달리기의 고리를 잇지 못하던 아름은 끝내 미션에 성공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어지는 이야기. 그 많은 편지를 보내며 답장을 보내지 않아도 괜찮다는 성희의 이야기. 봄이 오기 전에 미리 따뜻한 마음이 되어보고 싶다면 여성들의 이어달리기에 귀를 기울여보시길.
아름이 책을 들고 성희를 찾아갔을 때, 성희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기가 어려웠다. 아름은 언젠가 성희가 그랬던 것처럼, 성희에게 책을 읽어주었다.
"이모, 나 미션 완료했어."
"그래? 어떤 보상을 주면 좋을까. 원하는 걸 말해봐."
아름은 기꺼이 대답했다.
"이모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20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