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장난 줄 알았는데 인생은 계속됐다 - 암을 지나며 배운 삶과 사랑의 방식
양선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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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복례씨는,



끝장난 줄 알았는데 인생이 계속되기도 하고 진짜 끝장나기도 하고 그러겠지. 암을 지나며 배운 삶과 사랑에 대해 쓴 한 권의 책을 읽었다. 신문사 기자가 쓴 암 투병기. 유방암 3기를 진단받고 항암치료부터 수술, 방사선 치료까지 겪으며 거쳐온 삶의 굽이굽이가 금방 공감되도록 진솔하게 잘 드러나 있다. 죽음의 가능성을 코앞에 두고 해쳐온 그 시간이 마치 내가 겪기라도 한 것처럼 가슴이 뻐근했다.

인정하기 싫지만 사람들은 모두 죽을 운명이고, 암에 걸려 죽을 확률도 높은 편인 게 현실이지만, 인간은 생존 그 자체를 위해 진화해와서 그런지 죽음 같은 확고한 미래를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마치 자신이 안 죽을 거라고 착각하고 있을 때가 행복한 건지도 모르겠다. 암은 죽을 가능성에 대해 두려움을 한 방에 강력하게 들이미니 얼마나 무섭고 힘들까.

저자 역시 그 고통스러운 시간을 거치며 글을 쓰고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길 원했다. 무엇보다 자신이 계속되는 인생을 새롭게 받아들이고 있다. 글 전체에 눈물이 흘러넘치기도 하지만 그 안에 관계와 사랑, 깊은 깨달음도 함께 한다. 저자에게 그 많은 사람들이 곁에서 힘이 되어 다행이다, 외로움을 자처하고 남한테 폐 끼치기 싫어하는 사람들은 암 투병도 남들보다 더 힘들게 겪겠구나,는 생각에 자신의 투병 사실조차도 밝히기 원치 않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도 떠올랐다. 또 자식이나 배우자가 있어도 혼자 투병 과정을 버티는 사람들, 자식이나 배우자가 없어서 혼자 아픈 사람들, 돈 걱정 때문에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고.

저자는 먹을 걸 챙겨주는 어머니와 사랑으로 지지한 배우자와 자식들, 한없이 따뜻하고 현금까지 챙겨주며 강력한 도움을 준 회사 동료들, 오래된 친구들, 심지어 의학적 조언으로 도움을 준 의학전문기자까지 든든한 관계 안에서 고통을 버텼다. 글 끝부분에 그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이 에필로그로 담겨있는데 제목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사랑'이다. 그 사랑이 풍족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이 책은 더 외로움을 가중시킬지도 모르겠다. 저자가 받은 사랑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니.

많은 것을 잃겠지만 그만큼 기회가 올 겁니다. 관계들은 더 가까워지고 삶은 더 가슴 저미도록 깊어지고 가치는 더 명료해질 거예요. 당신에게는 이제 자신의 일부가 아니게 된 것들을 애도할 자격이 있지만, 슬퍼만 하다가 당신이 앞으로 무엇이 될 수 있는지 느끼는 감각이 흐려져선 안 돼요. 당신은 위험한 기회에 올라탄 겁니다. 운명을 저주하지 말길. 다만 당신 앞에서 열리는 가능성을 보길 바랍니다. 34쪽

아픈 사람 누구에게든 전해주고 싶은 말이다. 아서 플랭크의 <아픈 몸을 살다>는 나도 꼭 권하고 싶은 책이고. 누군가 홀로 아파하고 있다면 어떤 도움이든 될 책이다. <끝장난 줄 알았는데 인생은 계속됐다> 역시 그러한데, 구체적인 유방암 투병기로, 투병 중 실제 필요한 팁들이 꼼꼼하게 담겨 있기 때문이다. 건강을 지키기 위한 채소 먹기와 운동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또 '가슴 트고 사는 여자들의 은밀한 공감'에 나온 할머니와 '내게 담겨있는 것들을 살피며 마지막 항암을'의 권사님 얘기도 감동이었다. 나만의 루틴으로 나를 돌보기(260쪽)은 아프지 않더라도 해볼 만하다.

책의 마지막 장까지 저자는 어떻게든 아픈 사람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저자는 스스로도 많이 울었고 그 울음이 전염되기도 했는데 <달러구트 꿈백화점>이야기까지 끌어와 아픈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좋은 에너지를 주고자 한다. 다른 사람의 투병에 해주는 조언도 진심이 뚝뚝 묻어나 나도 모르게 따뜻한 기운을 느낀다. 본인도 많이 힘들었을 텐데 끝까지 고마운 마음. 부디 완쾌해서 할머니가 되겠다는 꿈 이루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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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의 자리
고민실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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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의 자리>는 숫자1이 되고 싶은 0의 이야기일 거라 생각했다. 유령처럼 떠도는 0이 결국 사람 1이 되어가는 거라고. 그런데 0.1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0.9까지 가더니 끝날 때쯤에 다시 0.1로 돌아가 버렸다. 0.1로 돌아와 버렸다, 라고 썼다고 고쳐쓰면서 내 자리를 떠올렸다. 마치 내가 0.1의 자리에서 주인공을 기다렸던 거 아닌가 싶었으나 그게 아니어서.

약국에 있을 때 연애나 좀 하든가, 서로 마음 있단 거 알았으면서...뭘 사다주든 트집만 잡는 엄마라면 사다주지 말든가. 혜라는 친구와 매끄럽게 친분을 유지할 수 없다면 뭐가 불편한지 말하든가...성매매한 아버지에 대한 역겨움은 어찌할 수 없을 거 같지만...약간은 답갑한 채로 방치된 듯한 주인공의 일상에 잔소리를 잔뜩 해대며 책을 읽었다. 결국 나도 그 지지부진한 대로 그저 하루하루 지낼 거란 걸 알면서도. 그래도 그녀는 시간을 내서 '어른의 수학'이란 프로그램을 듣고 f=ma를 이해하려 노력하고 집회에도 참여하며 새로운 직장에 또 이력서를 낸다. 아, 계속 유령으로 사는 건가. 소설 속 주인공을 대뜸 유령으로 낙인찍는 약사같은 1이 되느니 차라리 0이 더 근사할지도 모르겠다. 그럼 0의 자리는 뭘까. 글쎄 나는 끝내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지지부진한 채로 그래도 꾸준히 살아있는 한 여성의 외로움 말고는 별로 발견한 게 없다. 다음의 말로 추측해볼 뿐.

이미 헛된 기대를 품었다가 수없이 실망해보았다. 이번에도 어머니는 내 이야기를 캐묻는 시늉만 하다 곧 자기 이야기로 돌아갔다. 조에 비해 내가 겪은 비극은 흔하디흔하고 산개되어 있었다. 하나씩 짚어 말ㅇ하면 평범한 일상으로 보인다는 점이 비극이었다. 차라리 혜를 만나지 않았다면 더 편했을지 모른다. 나는 달라졌는데 나를 제외한 모든 것들이 그대로였다. 서른이라는 섬에 얼마나 지쳐서 도달했던가. 유혈이 되는 건 외로움에 대한 저항이 실패하는 과정이었다. 218쪽

인도-아라비아 숫자에서 가장 중요한 숫자가 뭔지 알아? 0이야. 인도에서는 신이 아무것도 없는 0에서 태어났다고 봤거든. 그리스에서도 0을 발견했지만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숫자라고 해서 받아들이지 않았어. 73쪽

숫자를 처음 생각해냈을 때 사람들은 자신의 재산을 기억하기 위해 수를 세기 시작했고, 없음을 의미하는 0은 말할 필요성이 없었다. 그리스 사람들은기원 전에 이미 0의 개념을 생각해냈지만, 0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거부했다. 7세기 무렵 인도에서 받아들여진 0은 종교적으로 이해된다. 고대 그리스에서 거부당한 0은 7세기경 인도에서 꽃을 피우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인은 종교적인 이유로 0을 거부했지만, 인도인들은 종교 때문에 오히려 0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힌두교에서는 우주가 무에서 생겨났고, 그 크기가 무한하다고 믿으며 0과 무한을 성스러운 것으로 여겼다. 628년 인도의 수학자인 브라마굽타가 쓴 책 <브라마스푸타시단타>에 실린 내용이 0을 사용한 최초의 기록이라고 한다.

0이나 무한, 혹은 무한에 무한으로 가까운 수 같은 의미는 아득하다. 0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를 나타내는데 아무 것도 없는 상태를 왜 표현해야 하는지. 계산기에서 새로운 계산을 시작할 때 0으로 만드는 것이 이 기능이라고 하니 막연히 이해해본다. 자리 기호의 역할도 있다. 일의 자리, 십의 자리, 백의 자리 등 어떤 자리가 비었을 때 0을 사용하는 경우, 2022는 백의 자리가 빈 경우인 것처럼. 빈 곳이 비었다고 알려주는 역할도 중요할 듯. 비었는데 비었다는 것을 알아채기 아렵다면. 연산에서는 저자가 작가의 말에서 시리에게 물어본 것처럼 덧셈도 뺄셈도 곱셈도 무력화시킨다. 나누기는 저자의 말 안의 시리처럼 나도 모르겠다.

가끔 사진을 확대해볼 때가 있어. 점으로 존재하던 픽셀이 커다란 정사각형이 될 때까지 확대하면 사진은 전혀 다른 풍경으로 변해. 거친 사막은 부드러운 뺨이 되고, 시멘트 길의 물웅덩이는 잔잔한 호수가 되고, 시퍼런 곰팡이는 넓은 녹차밭이 되는 거야. 원본보다 흐릿하지만 덜 역겹고 덜 추해지지. 그걸 또 확대하면 마지막에 라벤더나 올리브처럼 한 가지 색만 남아. 어디선가 한 켠의 자리를 차지할 수밖에 없는 작은 픽셀이 모니터를 꽉 채우는 걸 보면 위안이 돼. 232쪽

결국 관계에 대한 이야기인 걸까. 컴퓨터의 언어가 0과 1로 이루어진 수라는 걸 생각해보면 0과 1사이의 거리를 또 생각하게 된다. 그 사이에는 얼마나 많은 관계가 있나. 0.000000000(무한반복 가능)00000000001 같은 거. 픽셀을 확대해보면 원본보다 흐릿하지만 덜 역겹고 덜 추해진다니, 너무 가까워지면 편협해지고 멀어질수록 공평해지는 관계를 추측해본다. 저자가 219쪽에서 엄마와의 관계를 그렇게 설명한다. 엄마는 난이도 최고지. 멀어지면서 솔직히 인정하는 것이다. 나는 너의 고통을 모른다고(219쪽).

그리고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쓴다. '운이 좋았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은 욕구가 얼마나 강렬한지 알았습니다(245쪽)라고. 그러니 원본에서 멀어지는 관계가 더 편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은 욕구를 느끼며 지지부진하게 하루를 살아가다가 가끔 영의 세계, 영의 자리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으로 만족하는 이야기로 저자의 메시지를 이해해 본다. 뭐 내가 사는 것도 크게 다르지 않으니. 난 지지부진 대마왕이지만 0과 1사이를 저자만큼 오래 헤매고 가끔 정착했다가 거기서 갈등하고 또 도망가기도 했다. 그러니 이 소설에 대한 몰이해나 무지가 있었다면 또 용서받고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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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좋아하고 병이 있어 - 병이 망칠 수 없는 내 일상의 웃음에 대하여
신채윤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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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많이 아플 때, 그 아이를 자식으로, 지인으로 아끼는 친구로 둔 사람은 또 얼마나 아플까. 자식이 없으니 그 아이를 자식으로 둔 부모의 고통의 깊이 또한 상상만 할 수 있을 뿐이지만, 제일 알기 힘든 건 그 아픈 아이의 심정일 것 같다. 생명력이 넘치도록 그 시기가 설계되었는데 그 시기에 아프다면 그 아이가 바라보는 미래도 꿈도 인생도 다 달라지겠지. 게다 희귀병에 불치병이라면 많은 것들을 납득하기 어렵고 받아들이기 어려울 터, 성인들은 체념하고 말겠지만 아이는 어떻게 해야 하나.

<그림을 좋아하고 병이 있어>는 내가 읽어본 첫 10대 투병기이다. 아픈 사람의 이야기를 읽으려면 여러 번 심호흡을 해야 하는데 이 책은 더더더더 심호흡이 필요했다. '눈이 멀지도 모르는 건 내 탓이 아니야', '아빠도 위로가 필요한 사람인 거야', 벚나무의 성실함을 아는 사람', '아픈 나도 나였으므로' 처럼 각 에세이마다 소제목부터 무게감이 남다르다. 일찍 철드는 아이는 슬프다. 이미 철들고 충분히 성숙해지고 어른보다 어른스러워진 아이가 자기를 성찰하고 용기를 내 쓴 기록이니 역시 슬프다. 이 찬란한 봄날 우울해지기 싫어서 이 책을 밀어놨다가 또 생각이 나 다시 집어들곤 했다. 슬프기만 한 게 아니라 또 살아갈 의지를 가지고 일상을 꾸리는 삶이 있었으니까.

아픈 아이가 들려주는 희귀난치센타 어린이병원 얘기는 그 막막함이 더 했다. 주사를 안 맞으려 떼쓰고 울고 소리치는 아이들과 달래려 진땀빼는 부모가 있는 일반병원의 모습과 달리, 희귀난치센터 병원에서 아이들은 조용했다. 이미 큰 병원까지 오는 동안 팔을 내맡긴 채 주사바늘 들어오는 일에 무덤덤하고 익숙해졌기 때문. 우리야 어차피 이유도 모르고 내던져지듯 세상에 태어난 목숨들이지만, 이유가 뭐든 아이가 희귀난치병을 앓아야 한다는 건 너무 억울하고 불공평하다.

책을 붙들고 내가 느끼는 억울함과 다르게 그 불공평한 일상을 살아야 하는 저자는 너무 어른스러워서 오히려 거리감이 느껴진다. 특히 병을 선택한 적 없는 사람과 힘들고 고된 의사일을 선택한 사람이 주고 받는 대화(36쪽)를 통해 벚꽃 나무의 성실함을 끌어낸 이야기를 읽을 땐, 그저 읽었을 뿐인 나까지 차분해졌다.
"나, 타카야수동맥염이라는 희귀난치병을 앓고 있어. 내가 병이 있다고 말하면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기억 속 아팠던 경험들을 이야기한다(43쪽). 아픔과 관련된 이야기에는 신기한 힘이 있다. 같은 사람을 눈앞에 두고 있음에도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그와의 관계가 절대로 이전과 같지 않음을 불현듯 깨닫게 된다. 저 사람의 아픔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눌 수 있는 이야기의 결이 달라진다(45쪽). "

그러게. 아픈 사람들끼리 병 이야기하는 건 남다른 감정공유를 가능하게 한다. 저자도 '그때 힘들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을 보았을 때, 내가 혼자 아파하는 것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위로 받았다. 혼자 아프지 않도록 구명줄이 되어주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아픈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런 사람이 된 것 같아서 기쁜 마음이 조금 들었다(47쪽)'고 한다. 내가 아픈 사람이어서 들 수 있는 마음.

저자는 자기 병이 희귀하고 연구된 바가 거의 없고, 원인도 알 수 없지만 소수의 자료를 통해 수집된 '진단조건'에 의해 동양인, 여성, 20세 이하가 주로 걸린다는 결과를 통해 연구될 조건이 충분하지 않음도 포착해낸다(80쪽). 서양 백인 남자가 걸리는 병이면 달랐을지도 모르겠다. 학교 졸업 후 취업을 꿈꾸면서도 어려워질 수 있는 상황을 돌아보며 그래도 할 수 있는 다른 일을 찾으라는 충고보다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는 마음을 다잡는다. 병이라는 모래주머니가 무겁지만 그 주머니를 달고도 빨리 이동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면서(85쪽).

병은 나에게서 많은 것을 앗아갔고 나는 병에 걸린 것이 싫다. 내 아픔은 내 세상에서는 가장 큰 아픔이다. 하지만 그건 모두 다 같다는 것을 안다. 모두 자기의 아픔을 가장 아파하면서 살아간다. 그러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뿐이다. 황정은 작가의 소설 제목처럼, 사람들과 함께 '계속해보겠습니다'하고 말하는 것.105쪽

금방 나을 수 있어, 넌 의지가 강하니까, 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내려 앉았던 가슴. 나는 내가 나을 수 있을지 없을지 생각하지 않는다. 아무래도 상관없다. 아주 가끔 예상하지 못한 고통과 차별로 불편할 때를 제외하곤 병이 이제 내게 조금 특이한 무늬의 점과 같이 받아들여진다. 이게 나야, 하고.159쪽

그러니 이 책을 동정의 시선으로, 잘 이겨내고 있는 씩씩한 아이의 대단한 투병기로 읽을 이유가 없다. 우린 누구나 조금씩 아프고, 살아간다는 것이 조금씩의 병을 가지게 되는 일이니까. 나도 10년을 넘게 두 종류의 약을 장기복용하고 매년 피검사를 받는다. 일찍 철들어버린 저자도 그만큼의 인생을 더 얻었을 테니 잘 버티길 조용히 응원하면 되겠지. 저자는 아무말 없이 눈믈을 흘려주는 사람에게 마음이 갔다고 한다. '꽤 오랜 시간 동안 아파했고, 많은 눈물에 치유받은 사람치고는 뒤늦게 눈물만이 할 수 있는 말이 세상에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205쪽)'면서.

저자의 이야기는 글쓰기의 환희를 통해 자신의 성장을 말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한 사람의 고통을 내밀한 부분까지 읽어냈으니 그 속을 조금 더 깊이 이해하게 된 사람으로서 나 역시 한동안 조금 달라질 것이다. 글이란 게, 고통을 이해하려 노력한다는 게 그러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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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가 삶이 될 때 - 낯선 세계를 용기 있게 여행하는 법
김미소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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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겹의 경계에 서서 자신의 언어를 찾는 사람의 기록인 이 책은, 그 경계가 다층적인 만큼 복잡하며 언어를 찾는다는 점에서 또 새롭다. 모국어라고 다 내 언어는 아니다. 서울사람이 쓰는 말이 표준어라면, 다른 곳에서 사는 사람에게 표준어는 자기 것이 아니기도 하다. 언어에는 권력과 소외가 있고, 지배와 억압도 있다.

자기 전시회에서 초대받은 사람 중 진짜 창녀를 찾아내면 돈 120만원을 주겠다고 한 예술가의 사례 얘기를 하다, 한 분이 어린 시절에 눈웃음친다고 창녀 같다는 소리를 들은 경험을 들려주었다. 진짜 창녀는 뭐고 창녀 같다는 뭘까. 창녀를 찾아내 돈을 준다는 기획은 창녀와 여성을 골고루 모욕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정작 창녀사용자는 남성들이지만 모욕은 창녀와 창녀같다는 소리를 들을까 위축되는 여성들 몫이다. 창녀가 뭔 줄도 모르면서 창녀같다는 소리를 들을까봐 일부러 웃지 않고 찡그리고 다녔다는 그 모임참여자는 아직도 웃을 때마다 창녀같다는 소리가 귓전에 울린다고 한다. 창녀 같다는 언어는 그렇게 힘을 발휘한다.

<언어가 삶이 될 때>를 쓴 저자는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어를 모국어로 하고 있고, 아버지가 베트남 출신 여성과 재혼하면서 새엄마의 언어와 섞이고, 새엄마가 낳은 아이들의 언어도 고민했다. 미국에서는 외국인으로 영어를 배워 학위를 받고, 또다른 외국인인 일본인에게 또다른 언어일수밖에 없는 영어를 가르친다. 일본에 살면서 영어로 밥벌이를 하지만 생활을 위해 일본어를 익혀야 하는 일본어 학습자이기도 하다. 다른 나라, 다른 언어를 가르치고 배우며, 또 일하고 생존하며 언어의 힘을 골고루 경험했다. 이런 사람에게 '언어가 삶이 된다'는 의미는 뭘까.

저자의 삶을 따라 책을 읽다 보면 외국어를 익혀야만 하는 입장에서 차분하고 설득력있게 동기부여되는 이야기를 만난다. 다만 저자는 영어로 대학당락이 결정되고 영어로 취업과 승진까지 영향을 받으며, 영어를 잘한다는 속된 자부심과 영어를 못한다는 처절한 굴욕감으로, 식민지 모국어 획득을 위해 애타게 노력하고 좌절해왔던, 평범한 한국인과는 많이 다르게 영어로 자기 삶을 꾸려왔다. 미국백인 위주의 영어학습 시장(78쪽)이나 피할 수 없는 식민지 주민의 영어울렁증, 차별을 담고 있는 언어습관(107쪽), 문화와의 연관성, 정체성과의 관계 등 저자의 생각은 재밌고 타당성있게 읽힌다. 언어가 삶이 되는 과정을 나름의 어려움 속에서 찾아가며 해방의 길에 들어서고 있다. 저자에게 언어는 굴레이자 해방일 수 있는 것이다(166쪽). 특히 다양한 문화적 환경과 차별, 배타성을 겪으며 인격수련 과정도 겪어서 그런지 새로운 삶을 위해 언어를 배워야 하는 사람에겐 훌륭한 가이드가 되는 책이다. 결국 언어습득에서 목적이 얼마나 중요한지 일깨워주면서 '되고 싶은 나'와 '되어야 하는 나'의 중요성(123쪽)도 알려준다.

뿐만 아니라 문법실용서의 가치도 있다. 특히 한국인이 이애하기 어려워하는 영어식 시제 설명(197쪽)은 눈에 쏙쏙 들어온다. 쉐도잉같은 영어학습법에 대한 생각도 영어학습자에겐 여러모로 도움이 된다. 또한 이 책은 외국어를 배워야만 하거나, 해외생활을 해야 하는 사람에게는 유용한 지침서일 뿐 아니아 위안과 응원이 될 수도 있다. 여러 집단의 틈새에 서 있거나 외국어를 배우면서 원래 언어를 빼앗긴 기분으로 살아가고 있다면, 새언어를 배우는 건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가고 이 세계에 참여하는 것임(276쪽)을 인식하는 데 큰 도움이 될 책이기도 하다. 저자도 그 바람을 직접 얘기하고 있다.

"외국어 두개로 삶을 꾸려오면서 또 외국인으로 살아가면서 아래의 두 문장 사이에 갇힌 느낌이었습니다. 오드리 로드의 "주인의 도구로는 결코 주인의 집을 부술 수 없다"와 벨 훅스의 "우리는 억압자의 언어를 취한 후 그 반대로 만든다. 우리는 언어를 반지배적 말로 만들고, 언어 속에서 우리를 해방시킨다" 라는 문장입니다. 외국어를 배우다 보면 종종 외국어가 "주인의 도구" 혹은 "억압자의 언어" 처럼 느껴집니다. 영어를 못하면 죄인이 된 것 같고 영어 원어민과 영어로 대화를 못 하면 잘못한 것같은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이 언어가 필요합니다. 주인의 도구이고 억압자의 언어로 느끼더라도, 우리에게는 이 언어를 써서 이 언어의 원래 주인들이 보지 못했던 것을 볼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이 언어의 원래 주인들이 쓰지 못했던 방식으로 언어를 전복시킬 수도 있고요. 이것이 비원어민의 특권입니다. 여러분이 한국어 원어민의 특권을 돌아보는 동시에, 타 언어 비원어민의 특권을 한껏 누렸으면 좋겠습니다. "

억압자의 언어를 취한 후 그 반대로 만든다, 는 언어에 이미 매혹되었다. 그러게, 그게 비원어민의 특권이기도 하겠지. 또 한국어 원어민으로서 특권도 돌아보아야 하고. 아, 갑자기 낯선 곳을 여행하고 새로운 언어를 배우고 싶은 욕구가 솟구친다. 난 새언어를 배우기엔 이미 알고 있는 언어도 까먹을까 걱정이 크고 해외생활을 계획해보기는커녕 계약기간에 따라 환경이 변하는 불안한 주거환경에 시달려야 하는 처지지만, 어린 시절부터 경계에 선 자신을 돌아보고 낯선 세계를 용기있게 여행하며 자기 삶을 꾸려온 이 젊은 여성의 기록에 나 역시 응원받는 기분이었다. 용기 있게 낯선 세계에 부딪힌 사람의 기록은 늘 힘이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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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 엔딩 이후에도 우리는 산다 - 오늘도 정주행을 시작하는 당신에게
윤이나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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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마흔이 되어서도 이야기에서 인생을 배우고, 일흔이 되어도 그럴 생각이지만 일흔까지 살 수 있을지 알 수 없다는 게 재미있고,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눈을 보살피며 살아가기로 한 작가가 라식 수술 후 시력이 가장 좋았던 1년 반 동안 보고 사랑한 작품들에 관해 쓴 장르 불명 인터렉티브 옴니버스 에세이'다. 흠...일흔까지 살 수 있을지 알 수 없다는 게 재밌다고? 무슨 이유에서건 주위 동갑 나이대가 마구 죽어나가지 않은 한, 일흔까지 살 수 없음 혹은 있음에 대한 고찰이 어려운 나이, 그래도 알 수 없다는 게 재밌지는 않을 거 같은데..그냥 넘어가 주자.

이 책은 OTT 플랫폼 서비스에서 본 드라마와 영화, 다큐 같은 영상 매체에 대한 저자의 생각, 그 컨텐츠가 주는 저자의 희노애락, 줄거리가 저자의 내면에 일으킨 각종 감상과 이에 따른 기억, 경험들이 뒤섞여 있다. 영상매체에 대해 쓴 책이라...이 나무로부터 온 고전적인 매체인 종이책 앞에서 Vedio killed the radio star...라는 노래가 절로 흥얼거려졌다. OTT서비스야말로 종이책을 죽이고 있는 거 아님? 근데 OTT컨텐츠에 대해 쓴 종이책이라고? 한 쪽 귀로 듣자 마자 다른 한 쪽 귀로 흘러나가 버리는 유튜브와 다르게 종이책을 들고 근엄하게 읽었다.

한때 정말 열심히 토막살인이나 잔인한 장면이 나오는 거 빼고는 장르 불명 영상을 두루두루 열심히 즐겼다. six feet under(나의 최애), 윌 앤 그레이스, 명탐정 몽크, 오티스의 상담소, 길모어걸스, L Word, how to get away with murder, 하우스 오브 카드, 섹스 앤더 시티, 오렌지 이즈 더 블랙, 위기의 주부들, 로스트, 멘탈리스트, 그레이 아나토미, 라이투미, 코스모스 등등 다 셀 수도 없는 온갖 영상을 통해,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형태의 갈등과 혐오, 취향과 문화, 배신과 사랑, 운명과 우연, 삶과 죽음 등의 이슈 앞에서 넋을 잃었다. 특히 미국 문화와 사회, 경제, 법률 체계, 미국 변호사들의 일상, 미국 일반인의 성생활과 고민, 정치 시스템과 권력의 의도뿐 아니라 성소수자 문제, 동성애에 대한 편견, 심리학, 부모자식 갈등, 우정, 성교육에 미국 유머까지 다 저절로 받아들였다. 온갖 종류의 미국식 자료들이 넘쳤다. 지금도 넘치고 있겠지. 이런 게 문화제국주의 아니겠음? 나도 모르게 미국식 사고를 습득하고 그게 쿨한 줄 아는 거. 그래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이 싸우면 저절로 정해진 한 쪽을 편드는 거.

안그래도 아까운 내 인생인데, 멍하게 눈만 뜨고 영상에 집중하는 데 냅다 갖다바친 시간이 얼마나 될까. 조금 후회는 된다. 그러나 정말 뭘 해야 할지 모르는 시간에, 특히 큰 충격이나 고통이 휩쓸고 간 후 그 후유증이 가시지 않았을 때, 뭔 드라마건 막장이든 뭐든 따지지 않고 내 시간을 몽땅 가져갔으면 했다. 그렇게 견뎌야만 하는 긴 시간이 있을 때, 넷플릭스에 감사헌금이라고 내고 싶은 심정. 그저 내 머리 속에 가득찬 우울한 생각들을 잡아두고 다른 데 몰두할 게 있어서. <해피엔딩 이후에도 우리는 산다>는 저자도 그랬나 보다.

"살면서 처음으로 우울한 감정이 발목까지 차올랐음을 느꼈을 때, 그 감정에 누구면 몸이 반쯤은 잠기게 된다는 걸 알았다. 그때 하루에 세 편씩 봤던 영화가 우울로 가득 찬 웅덩이를 천천히 말려주었다. 아무도 아니라서 무엇도 될 수 없었던 시절에 본 드라마가, 뮤지컬이, 앞이 보이지 않는 다음으로 한 발자국 내딛게 만들어주었다. 몇십 권의 만화책을 단숨에 읽고 나면 다른 세상에 다녀온 것만 같았고, 한곡의 노래를 몇백 번 들으면서 삼키고 소화한 감정도 있다."

그러게. 사실 지금도 그렇다. 다리 오무릴 줄 모르는 윤모씨의 권력을 잊기 위해 앨리슨 벡델의 그래픽 노블을 찾아보고 '들개이빨' 시리즈를 다시 읽는다. 그나마 차분해지면 800쪽이 넘는 <진리의 발견>을 읽는다. 정말 아무 생각도 하기 싫을 땐 남 먹는 거 쳐다보는 게 추접스럽다고 느끼면서도, 열심히 뭘 먹는 누군가의 입과 그 입에 음식을 가져가는 손움직임의 반복을 멍때리고 본다. 가끔 항암투병하느라 음식 제대로 못 먹는데 먹방에서 맛있는 밥먹는 사람을 보고 위로받았다는 댓글을 보면 먹방의 위대함에 숙연해지곤 한다. 이랑의 '늑대가 나타났다'는 거의 매일 수십번씩 듣고, 일부러 현생에 집중하지 않으려고 '우주 다큐'같은 걸 시시때때로 틀어놓는다. 증세가 더 심해지면 'six feet under'를 전 시즌 다시 봐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해피엔딩 이후에도 우리는 산다>는 명랑한 편이다. 특히 '아이 메이 디스트로이 유', '더 체어', '올리브 키터리지'에 영업당했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넘쳐나는 컨텐츠 소개 컨텐츠에 저자 자신의 이야기를 잘 버무려놨다는 점이다. 큰어버자 영정 사진 찍던 얘기, 장례식장에서도 노트북 펴고 쓰는 글 얘기, 뉴욕에서 글쓰며 살고 싶다는 꿈, 노화에 대한 통찰, 주식과 코인 투자, 보드 타다 다친 부위의 멍 색깔의 다채로움, 게임중독, 요즘 애들 얘기까지 생뚱맞은 듯하면서도 다 우리 이야기이기도 한 일들이 잘 어우려져 있다.

특히 이 책의 제목이 좋았다. 저자는 ' 매일이라는 일부가 모여야만 인생이라는 이야기의 엔딩을 볼 수 있다는 것이 픽션과 현실의 차이다. 그리고 그게 바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이후에도 우리가 계속 살아야 하는 이유다'라고 생각한다며 '픽션에서도 현실에서도, 그 어떤 이야기에서도 해피엔딩을 기대하지 않는다'고 한다. 나같은 찌질한 사람은 다른 이유로 슬픈 결말이 좋다. 그래도 내 인생은 저렇게 망가지진 않았잖아,라는 생각에 후딱 눈물을 닦아 버리고 현생을 살러 금방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해피엔딩은 그 비현실성 때문에 다 끝난 영상 앞에서 투덜대다 못해 더 비판적이 되고, 찌질한 현생의 비극성까지 고조시킬 수 있다. 그러니 해피엔딩 이후에도 잘 살 수 있디면 더 강한 사람이겠지. 슬픈 엔딩을 보고서는 잘살아보세~하기 훨씬 더 쉽다. 이렇게 찌질한 게 현생이다. 나만 그렇다면 니들의 행운이고. 어쨌든 해피엔딩, 땡큐!

저자는 이런 얘기도 한다. '에세이를 쓰는 건 역시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을 했다. 나의 이야기라서 그렇다... 에세이의 사전적 정의는 '무형식의 산문'으로 누구나, 거의 모든 소재를 가지고, 어떤 형식으로든 자유롭게 쓸 수 있는 문학의 한 갈래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에세이는 쓰기도 읽기도 쉬운 글로 여겨지는 경향이 있는데, 바로 그 이유로 에세이는 쓰기 어렵다. 에세이 작가는 인터넷 서점의 독자평에 '그냥 일기'라거나 '그래서 어쩌라고'라는 댓글이 달릴 것을 각오해야 한다....에세이를 쓴다는 것은 어떤 형식으로든 자유롭게, 결국 나의 이야기를 쓴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자기 이야기만 써놨다'라는 말은 책을 정확히 본 것이라고 말해줄 수밖에 없다(12쪽).' 전적으로 동의한다. 김훈의 자전거나 개이야기, 밥벌이며 글쓰기에 대해선 너 얘기는 너 일기장에 쓰삼, 이라고 하지 않는다. 여기엔 권력의 문제도 있다. 저자는 직면한다. 그러니 응원할 수밖에. 자기 얘기 쓰기가 얼마나 어려운데, 어차피 남의 이야기 읽으려고 픽션이든 논픽션이든 읽는 거면서, 지 얘기는 한 줄 쓸 용기도 없는 주제에, 자기 얘기를 쓰고 출판까지 결심한 용기 앞에서 건방진 댓글 쓰지 말고, 그럴 시간 있으면 본인의 일기라도 써보도록.

팝콘과 시원한 음료수가 금방 떠오르는 표지. 읽어보시고 두루두루 영업당하시길. 시간을 탕진해야 할 사람들, 시간을 탕진해야 시간이 가니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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