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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좋아하고 병이 있어 - 병이 망칠 수 없는 내 일상의 웃음에 대하여
신채윤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4월
평점 :
아이가 많이 아플 때, 그 아이를 자식으로, 지인으로 아끼는 친구로 둔 사람은 또 얼마나 아플까. 자식이 없으니 그 아이를 자식으로 둔 부모의 고통의 깊이 또한 상상만 할 수 있을 뿐이지만, 제일 알기 힘든 건 그 아픈 아이의 심정일 것 같다. 생명력이 넘치도록 그 시기가 설계되었는데 그 시기에 아프다면 그 아이가 바라보는 미래도 꿈도 인생도 다 달라지겠지. 게다 희귀병에 불치병이라면 많은 것들을 납득하기 어렵고 받아들이기 어려울 터, 성인들은 체념하고 말겠지만 아이는 어떻게 해야 하나.
<그림을 좋아하고 병이 있어>는 내가 읽어본 첫 10대 투병기이다. 아픈 사람의 이야기를 읽으려면 여러 번 심호흡을 해야 하는데 이 책은 더더더더 심호흡이 필요했다. '눈이 멀지도 모르는 건 내 탓이 아니야', '아빠도 위로가 필요한 사람인 거야', 벚나무의 성실함을 아는 사람', '아픈 나도 나였으므로' 처럼 각 에세이마다 소제목부터 무게감이 남다르다. 일찍 철드는 아이는 슬프다. 이미 철들고 충분히 성숙해지고 어른보다 어른스러워진 아이가 자기를 성찰하고 용기를 내 쓴 기록이니 역시 슬프다. 이 찬란한 봄날 우울해지기 싫어서 이 책을 밀어놨다가 또 생각이 나 다시 집어들곤 했다. 슬프기만 한 게 아니라 또 살아갈 의지를 가지고 일상을 꾸리는 삶이 있었으니까.
아픈 아이가 들려주는 희귀난치센타 어린이병원 얘기는 그 막막함이 더 했다. 주사를 안 맞으려 떼쓰고 울고 소리치는 아이들과 달래려 진땀빼는 부모가 있는 일반병원의 모습과 달리, 희귀난치센터 병원에서 아이들은 조용했다. 이미 큰 병원까지 오는 동안 팔을 내맡긴 채 주사바늘 들어오는 일에 무덤덤하고 익숙해졌기 때문. 우리야 어차피 이유도 모르고 내던져지듯 세상에 태어난 목숨들이지만, 이유가 뭐든 아이가 희귀난치병을 앓아야 한다는 건 너무 억울하고 불공평하다.
책을 붙들고 내가 느끼는 억울함과 다르게 그 불공평한 일상을 살아야 하는 저자는 너무 어른스러워서 오히려 거리감이 느껴진다. 특히 병을 선택한 적 없는 사람과 힘들고 고된 의사일을 선택한 사람이 주고 받는 대화(36쪽)를 통해 벚꽃 나무의 성실함을 끌어낸 이야기를 읽을 땐, 그저 읽었을 뿐인 나까지 차분해졌다.
"나, 타카야수동맥염이라는 희귀난치병을 앓고 있어. 내가 병이 있다고 말하면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기억 속 아팠던 경험들을 이야기한다(43쪽). 아픔과 관련된 이야기에는 신기한 힘이 있다. 같은 사람을 눈앞에 두고 있음에도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그와의 관계가 절대로 이전과 같지 않음을 불현듯 깨닫게 된다. 저 사람의 아픔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눌 수 있는 이야기의 결이 달라진다(45쪽). "
그러게. 아픈 사람들끼리 병 이야기하는 건 남다른 감정공유를 가능하게 한다. 저자도 '그때 힘들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을 보았을 때, 내가 혼자 아파하는 것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위로 받았다. 혼자 아프지 않도록 구명줄이 되어주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아픈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런 사람이 된 것 같아서 기쁜 마음이 조금 들었다(47쪽)'고 한다. 내가 아픈 사람이어서 들 수 있는 마음.
저자는 자기 병이 희귀하고 연구된 바가 거의 없고, 원인도 알 수 없지만 소수의 자료를 통해 수집된 '진단조건'에 의해 동양인, 여성, 20세 이하가 주로 걸린다는 결과를 통해 연구될 조건이 충분하지 않음도 포착해낸다(80쪽). 서양 백인 남자가 걸리는 병이면 달랐을지도 모르겠다. 학교 졸업 후 취업을 꿈꾸면서도 어려워질 수 있는 상황을 돌아보며 그래도 할 수 있는 다른 일을 찾으라는 충고보다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는 마음을 다잡는다. 병이라는 모래주머니가 무겁지만 그 주머니를 달고도 빨리 이동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면서(85쪽).
병은 나에게서 많은 것을 앗아갔고 나는 병에 걸린 것이 싫다. 내 아픔은 내 세상에서는 가장 큰 아픔이다. 하지만 그건 모두 다 같다는 것을 안다. 모두 자기의 아픔을 가장 아파하면서 살아간다. 그러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뿐이다. 황정은 작가의 소설 제목처럼, 사람들과 함께 '계속해보겠습니다'하고 말하는 것.105쪽
금방 나을 수 있어, 넌 의지가 강하니까, 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내려 앉았던 가슴. 나는 내가 나을 수 있을지 없을지 생각하지 않는다. 아무래도 상관없다. 아주 가끔 예상하지 못한 고통과 차별로 불편할 때를 제외하곤 병이 이제 내게 조금 특이한 무늬의 점과 같이 받아들여진다. 이게 나야, 하고.159쪽
그러니 이 책을 동정의 시선으로, 잘 이겨내고 있는 씩씩한 아이의 대단한 투병기로 읽을 이유가 없다. 우린 누구나 조금씩 아프고, 살아간다는 것이 조금씩의 병을 가지게 되는 일이니까. 나도 10년을 넘게 두 종류의 약을 장기복용하고 매년 피검사를 받는다. 일찍 철들어버린 저자도 그만큼의 인생을 더 얻었을 테니 잘 버티길 조용히 응원하면 되겠지. 저자는 아무말 없이 눈믈을 흘려주는 사람에게 마음이 갔다고 한다. '꽤 오랜 시간 동안 아파했고, 많은 눈물에 치유받은 사람치고는 뒤늦게 눈물만이 할 수 있는 말이 세상에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205쪽)'면서.
저자의 이야기는 글쓰기의 환희를 통해 자신의 성장을 말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한 사람의 고통을 내밀한 부분까지 읽어냈으니 그 속을 조금 더 깊이 이해하게 된 사람으로서 나 역시 한동안 조금 달라질 것이다. 글이란 게, 고통을 이해하려 노력한다는 게 그러하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