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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의 자리
고민실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4월
평점 :
<영의 자리>는 숫자1이 되고 싶은 0의 이야기일 거라 생각했다. 유령처럼 떠도는 0이 결국 사람 1이 되어가는 거라고. 그런데 0.1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0.9까지 가더니 끝날 때쯤에 다시 0.1로 돌아가 버렸다. 0.1로 돌아와 버렸다, 라고 썼다고 고쳐쓰면서 내 자리를 떠올렸다. 마치 내가 0.1의 자리에서 주인공을 기다렸던 거 아닌가 싶었으나 그게 아니어서.
약국에 있을 때 연애나 좀 하든가, 서로 마음 있단 거 알았으면서...뭘 사다주든 트집만 잡는 엄마라면 사다주지 말든가. 혜라는 친구와 매끄럽게 친분을 유지할 수 없다면 뭐가 불편한지 말하든가...성매매한 아버지에 대한 역겨움은 어찌할 수 없을 거 같지만...약간은 답갑한 채로 방치된 듯한 주인공의 일상에 잔소리를 잔뜩 해대며 책을 읽었다. 결국 나도 그 지지부진한 대로 그저 하루하루 지낼 거란 걸 알면서도. 그래도 그녀는 시간을 내서 '어른의 수학'이란 프로그램을 듣고 f=ma를 이해하려 노력하고 집회에도 참여하며 새로운 직장에 또 이력서를 낸다. 아, 계속 유령으로 사는 건가. 소설 속 주인공을 대뜸 유령으로 낙인찍는 약사같은 1이 되느니 차라리 0이 더 근사할지도 모르겠다. 그럼 0의 자리는 뭘까. 글쎄 나는 끝내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지지부진한 채로 그래도 꾸준히 살아있는 한 여성의 외로움 말고는 별로 발견한 게 없다. 다음의 말로 추측해볼 뿐.
이미 헛된 기대를 품었다가 수없이 실망해보았다. 이번에도 어머니는 내 이야기를 캐묻는 시늉만 하다 곧 자기 이야기로 돌아갔다. 조에 비해 내가 겪은 비극은 흔하디흔하고 산개되어 있었다. 하나씩 짚어 말ㅇ하면 평범한 일상으로 보인다는 점이 비극이었다. 차라리 혜를 만나지 않았다면 더 편했을지 모른다. 나는 달라졌는데 나를 제외한 모든 것들이 그대로였다. 서른이라는 섬에 얼마나 지쳐서 도달했던가. 유혈이 되는 건 외로움에 대한 저항이 실패하는 과정이었다. 218쪽
인도-아라비아 숫자에서 가장 중요한 숫자가 뭔지 알아? 0이야. 인도에서는 신이 아무것도 없는 0에서 태어났다고 봤거든. 그리스에서도 0을 발견했지만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숫자라고 해서 받아들이지 않았어. 73쪽
숫자를 처음 생각해냈을 때 사람들은 자신의 재산을 기억하기 위해 수를 세기 시작했고, 없음을 의미하는 0은 말할 필요성이 없었다. 그리스 사람들은기원 전에 이미 0의 개념을 생각해냈지만, 0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거부했다. 7세기 무렵 인도에서 받아들여진 0은 종교적으로 이해된다. 고대 그리스에서 거부당한 0은 7세기경 인도에서 꽃을 피우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인은 종교적인 이유로 0을 거부했지만, 인도인들은 종교 때문에 오히려 0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힌두교에서는 우주가 무에서 생겨났고, 그 크기가 무한하다고 믿으며 0과 무한을 성스러운 것으로 여겼다. 628년 인도의 수학자인 브라마굽타가 쓴 책 <브라마스푸타시단타>에 실린 내용이 0을 사용한 최초의 기록이라고 한다.
0이나 무한, 혹은 무한에 무한으로 가까운 수 같은 의미는 아득하다. 0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를 나타내는데 아무 것도 없는 상태를 왜 표현해야 하는지. 계산기에서 새로운 계산을 시작할 때 0으로 만드는 것이 이 기능이라고 하니 막연히 이해해본다. 자리 기호의 역할도 있다. 일의 자리, 십의 자리, 백의 자리 등 어떤 자리가 비었을 때 0을 사용하는 경우, 2022는 백의 자리가 빈 경우인 것처럼. 빈 곳이 비었다고 알려주는 역할도 중요할 듯. 비었는데 비었다는 것을 알아채기 아렵다면. 연산에서는 저자가 작가의 말에서 시리에게 물어본 것처럼 덧셈도 뺄셈도 곱셈도 무력화시킨다. 나누기는 저자의 말 안의 시리처럼 나도 모르겠다.
가끔 사진을 확대해볼 때가 있어. 점으로 존재하던 픽셀이 커다란 정사각형이 될 때까지 확대하면 사진은 전혀 다른 풍경으로 변해. 거친 사막은 부드러운 뺨이 되고, 시멘트 길의 물웅덩이는 잔잔한 호수가 되고, 시퍼런 곰팡이는 넓은 녹차밭이 되는 거야. 원본보다 흐릿하지만 덜 역겹고 덜 추해지지. 그걸 또 확대하면 마지막에 라벤더나 올리브처럼 한 가지 색만 남아. 어디선가 한 켠의 자리를 차지할 수밖에 없는 작은 픽셀이 모니터를 꽉 채우는 걸 보면 위안이 돼. 232쪽
결국 관계에 대한 이야기인 걸까. 컴퓨터의 언어가 0과 1로 이루어진 수라는 걸 생각해보면 0과 1사이의 거리를 또 생각하게 된다. 그 사이에는 얼마나 많은 관계가 있나. 0.000000000(무한반복 가능)00000000001 같은 거. 픽셀을 확대해보면 원본보다 흐릿하지만 덜 역겹고 덜 추해진다니, 너무 가까워지면 편협해지고 멀어질수록 공평해지는 관계를 추측해본다. 저자가 219쪽에서 엄마와의 관계를 그렇게 설명한다. 엄마는 난이도 최고지. 멀어지면서 솔직히 인정하는 것이다. 나는 너의 고통을 모른다고(219쪽).
그리고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쓴다. '운이 좋았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은 욕구가 얼마나 강렬한지 알았습니다(245쪽)라고. 그러니 원본에서 멀어지는 관계가 더 편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은 욕구를 느끼며 지지부진하게 하루를 살아가다가 가끔 영의 세계, 영의 자리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으로 만족하는 이야기로 저자의 메시지를 이해해 본다. 뭐 내가 사는 것도 크게 다르지 않으니. 난 지지부진 대마왕이지만 0과 1사이를 저자만큼 오래 헤매고 가끔 정착했다가 거기서 갈등하고 또 도망가기도 했다. 그러니 이 소설에 대한 몰이해나 무지가 있었다면 또 용서받고 싶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