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언어가 삶이 될 때 - 낯선 세계를 용기 있게 여행하는 법
김미소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3월
평점 :
여러 겹의 경계에 서서 자신의 언어를 찾는 사람의 기록인 이 책은, 그 경계가 다층적인 만큼 복잡하며 언어를 찾는다는 점에서 또 새롭다. 모국어라고 다 내 언어는 아니다. 서울사람이 쓰는 말이 표준어라면, 다른 곳에서 사는 사람에게 표준어는 자기 것이 아니기도 하다. 언어에는 권력과 소외가 있고, 지배와 억압도 있다.
자기 전시회에서 초대받은 사람 중 진짜 창녀를 찾아내면 돈 120만원을 주겠다고 한 예술가의 사례 얘기를 하다, 한 분이 어린 시절에 눈웃음친다고 창녀 같다는 소리를 들은 경험을 들려주었다. 진짜 창녀는 뭐고 창녀 같다는 뭘까. 창녀를 찾아내 돈을 준다는 기획은 창녀와 여성을 골고루 모욕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정작 창녀사용자는 남성들이지만 모욕은 창녀와 창녀같다는 소리를 들을까 위축되는 여성들 몫이다. 창녀가 뭔 줄도 모르면서 창녀같다는 소리를 들을까봐 일부러 웃지 않고 찡그리고 다녔다는 그 모임참여자는 아직도 웃을 때마다 창녀같다는 소리가 귓전에 울린다고 한다. 창녀 같다는 언어는 그렇게 힘을 발휘한다.
<언어가 삶이 될 때>를 쓴 저자는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어를 모국어로 하고 있고, 아버지가 베트남 출신 여성과 재혼하면서 새엄마의 언어와 섞이고, 새엄마가 낳은 아이들의 언어도 고민했다. 미국에서는 외국인으로 영어를 배워 학위를 받고, 또다른 외국인인 일본인에게 또다른 언어일수밖에 없는 영어를 가르친다. 일본에 살면서 영어로 밥벌이를 하지만 생활을 위해 일본어를 익혀야 하는 일본어 학습자이기도 하다. 다른 나라, 다른 언어를 가르치고 배우며, 또 일하고 생존하며 언어의 힘을 골고루 경험했다. 이런 사람에게 '언어가 삶이 된다'는 의미는 뭘까.
저자의 삶을 따라 책을 읽다 보면 외국어를 익혀야만 하는 입장에서 차분하고 설득력있게 동기부여되는 이야기를 만난다. 다만 저자는 영어로 대학당락이 결정되고 영어로 취업과 승진까지 영향을 받으며, 영어를 잘한다는 속된 자부심과 영어를 못한다는 처절한 굴욕감으로, 식민지 모국어 획득을 위해 애타게 노력하고 좌절해왔던, 평범한 한국인과는 많이 다르게 영어로 자기 삶을 꾸려왔다. 미국백인 위주의 영어학습 시장(78쪽)이나 피할 수 없는 식민지 주민의 영어울렁증, 차별을 담고 있는 언어습관(107쪽), 문화와의 연관성, 정체성과의 관계 등 저자의 생각은 재밌고 타당성있게 읽힌다. 언어가 삶이 되는 과정을 나름의 어려움 속에서 찾아가며 해방의 길에 들어서고 있다. 저자에게 언어는 굴레이자 해방일 수 있는 것이다(166쪽). 특히 다양한 문화적 환경과 차별, 배타성을 겪으며 인격수련 과정도 겪어서 그런지 새로운 삶을 위해 언어를 배워야 하는 사람에겐 훌륭한 가이드가 되는 책이다. 결국 언어습득에서 목적이 얼마나 중요한지 일깨워주면서 '되고 싶은 나'와 '되어야 하는 나'의 중요성(123쪽)도 알려준다.
뿐만 아니라 문법실용서의 가치도 있다. 특히 한국인이 이애하기 어려워하는 영어식 시제 설명(197쪽)은 눈에 쏙쏙 들어온다. 쉐도잉같은 영어학습법에 대한 생각도 영어학습자에겐 여러모로 도움이 된다. 또한 이 책은 외국어를 배워야만 하거나, 해외생활을 해야 하는 사람에게는 유용한 지침서일 뿐 아니아 위안과 응원이 될 수도 있다. 여러 집단의 틈새에 서 있거나 외국어를 배우면서 원래 언어를 빼앗긴 기분으로 살아가고 있다면, 새언어를 배우는 건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가고 이 세계에 참여하는 것임(276쪽)을 인식하는 데 큰 도움이 될 책이기도 하다. 저자도 그 바람을 직접 얘기하고 있다.
"외국어 두개로 삶을 꾸려오면서 또 외국인으로 살아가면서 아래의 두 문장 사이에 갇힌 느낌이었습니다. 오드리 로드의 "주인의 도구로는 결코 주인의 집을 부술 수 없다"와 벨 훅스의 "우리는 억압자의 언어를 취한 후 그 반대로 만든다. 우리는 언어를 반지배적 말로 만들고, 언어 속에서 우리를 해방시킨다" 라는 문장입니다. 외국어를 배우다 보면 종종 외국어가 "주인의 도구" 혹은 "억압자의 언어" 처럼 느껴집니다. 영어를 못하면 죄인이 된 것 같고 영어 원어민과 영어로 대화를 못 하면 잘못한 것같은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이 언어가 필요합니다. 주인의 도구이고 억압자의 언어로 느끼더라도, 우리에게는 이 언어를 써서 이 언어의 원래 주인들이 보지 못했던 것을 볼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이 언어의 원래 주인들이 쓰지 못했던 방식으로 언어를 전복시킬 수도 있고요. 이것이 비원어민의 특권입니다. 여러분이 한국어 원어민의 특권을 돌아보는 동시에, 타 언어 비원어민의 특권을 한껏 누렸으면 좋겠습니다. "
억압자의 언어를 취한 후 그 반대로 만든다, 는 언어에 이미 매혹되었다. 그러게, 그게 비원어민의 특권이기도 하겠지. 또 한국어 원어민으로서 특권도 돌아보아야 하고. 아, 갑자기 낯선 곳을 여행하고 새로운 언어를 배우고 싶은 욕구가 솟구친다. 난 새언어를 배우기엔 이미 알고 있는 언어도 까먹을까 걱정이 크고 해외생활을 계획해보기는커녕 계약기간에 따라 환경이 변하는 불안한 주거환경에 시달려야 하는 처지지만, 어린 시절부터 경계에 선 자신을 돌아보고 낯선 세계를 용기있게 여행하며 자기 삶을 꾸려온 이 젊은 여성의 기록에 나 역시 응원받는 기분이었다. 용기 있게 낯선 세계에 부딪힌 사람의 기록은 늘 힘이 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