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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 엔딩 이후에도 우리는 산다 - 오늘도 정주행을 시작하는 당신에게
윤이나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3월
평점 :
이 책은 '마흔이 되어서도 이야기에서 인생을 배우고, 일흔이 되어도 그럴 생각이지만 일흔까지 살 수 있을지 알 수 없다는 게 재미있고,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눈을 보살피며 살아가기로 한 작가가 라식 수술 후 시력이 가장 좋았던 1년 반 동안 보고 사랑한 작품들에 관해 쓴 장르 불명 인터렉티브 옴니버스 에세이'다. 흠...일흔까지 살 수 있을지 알 수 없다는 게 재밌다고? 무슨 이유에서건 주위 동갑 나이대가 마구 죽어나가지 않은 한, 일흔까지 살 수 없음 혹은 있음에 대한 고찰이 어려운 나이, 그래도 알 수 없다는 게 재밌지는 않을 거 같은데..그냥 넘어가 주자.
이 책은 OTT 플랫폼 서비스에서 본 드라마와 영화, 다큐 같은 영상 매체에 대한 저자의 생각, 그 컨텐츠가 주는 저자의 희노애락, 줄거리가 저자의 내면에 일으킨 각종 감상과 이에 따른 기억, 경험들이 뒤섞여 있다. 영상매체에 대해 쓴 책이라...이 나무로부터 온 고전적인 매체인 종이책 앞에서 Vedio killed the radio star...라는 노래가 절로 흥얼거려졌다. OTT서비스야말로 종이책을 죽이고 있는 거 아님? 근데 OTT컨텐츠에 대해 쓴 종이책이라고? 한 쪽 귀로 듣자 마자 다른 한 쪽 귀로 흘러나가 버리는 유튜브와 다르게 종이책을 들고 근엄하게 읽었다.
한때 정말 열심히 토막살인이나 잔인한 장면이 나오는 거 빼고는 장르 불명 영상을 두루두루 열심히 즐겼다. six feet under(나의 최애), 윌 앤 그레이스, 명탐정 몽크, 오티스의 상담소, 길모어걸스, L Word, how to get away with murder, 하우스 오브 카드, 섹스 앤더 시티, 오렌지 이즈 더 블랙, 위기의 주부들, 로스트, 멘탈리스트, 그레이 아나토미, 라이투미, 코스모스 등등 다 셀 수도 없는 온갖 영상을 통해,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형태의 갈등과 혐오, 취향과 문화, 배신과 사랑, 운명과 우연, 삶과 죽음 등의 이슈 앞에서 넋을 잃었다. 특히 미국 문화와 사회, 경제, 법률 체계, 미국 변호사들의 일상, 미국 일반인의 성생활과 고민, 정치 시스템과 권력의 의도뿐 아니라 성소수자 문제, 동성애에 대한 편견, 심리학, 부모자식 갈등, 우정, 성교육에 미국 유머까지 다 저절로 받아들였다. 온갖 종류의 미국식 자료들이 넘쳤다. 지금도 넘치고 있겠지. 이런 게 문화제국주의 아니겠음? 나도 모르게 미국식 사고를 습득하고 그게 쿨한 줄 아는 거. 그래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이 싸우면 저절로 정해진 한 쪽을 편드는 거.
안그래도 아까운 내 인생인데, 멍하게 눈만 뜨고 영상에 집중하는 데 냅다 갖다바친 시간이 얼마나 될까. 조금 후회는 된다. 그러나 정말 뭘 해야 할지 모르는 시간에, 특히 큰 충격이나 고통이 휩쓸고 간 후 그 후유증이 가시지 않았을 때, 뭔 드라마건 막장이든 뭐든 따지지 않고 내 시간을 몽땅 가져갔으면 했다. 그렇게 견뎌야만 하는 긴 시간이 있을 때, 넷플릭스에 감사헌금이라고 내고 싶은 심정. 그저 내 머리 속에 가득찬 우울한 생각들을 잡아두고 다른 데 몰두할 게 있어서. <해피엔딩 이후에도 우리는 산다>는 저자도 그랬나 보다.
"살면서 처음으로 우울한 감정이 발목까지 차올랐음을 느꼈을 때, 그 감정에 누구면 몸이 반쯤은 잠기게 된다는 걸 알았다. 그때 하루에 세 편씩 봤던 영화가 우울로 가득 찬 웅덩이를 천천히 말려주었다. 아무도 아니라서 무엇도 될 수 없었던 시절에 본 드라마가, 뮤지컬이, 앞이 보이지 않는 다음으로 한 발자국 내딛게 만들어주었다. 몇십 권의 만화책을 단숨에 읽고 나면 다른 세상에 다녀온 것만 같았고, 한곡의 노래를 몇백 번 들으면서 삼키고 소화한 감정도 있다."
그러게. 사실 지금도 그렇다. 다리 오무릴 줄 모르는 윤모씨의 권력을 잊기 위해 앨리슨 벡델의 그래픽 노블을 찾아보고 '들개이빨' 시리즈를 다시 읽는다. 그나마 차분해지면 800쪽이 넘는 <진리의 발견>을 읽는다. 정말 아무 생각도 하기 싫을 땐 남 먹는 거 쳐다보는 게 추접스럽다고 느끼면서도, 열심히 뭘 먹는 누군가의 입과 그 입에 음식을 가져가는 손움직임의 반복을 멍때리고 본다. 가끔 항암투병하느라 음식 제대로 못 먹는데 먹방에서 맛있는 밥먹는 사람을 보고 위로받았다는 댓글을 보면 먹방의 위대함에 숙연해지곤 한다. 이랑의 '늑대가 나타났다'는 거의 매일 수십번씩 듣고, 일부러 현생에 집중하지 않으려고 '우주 다큐'같은 걸 시시때때로 틀어놓는다. 증세가 더 심해지면 'six feet under'를 전 시즌 다시 봐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해피엔딩 이후에도 우리는 산다>는 명랑한 편이다. 특히 '아이 메이 디스트로이 유', '더 체어', '올리브 키터리지'에 영업당했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넘쳐나는 컨텐츠 소개 컨텐츠에 저자 자신의 이야기를 잘 버무려놨다는 점이다. 큰어버자 영정 사진 찍던 얘기, 장례식장에서도 노트북 펴고 쓰는 글 얘기, 뉴욕에서 글쓰며 살고 싶다는 꿈, 노화에 대한 통찰, 주식과 코인 투자, 보드 타다 다친 부위의 멍 색깔의 다채로움, 게임중독, 요즘 애들 얘기까지 생뚱맞은 듯하면서도 다 우리 이야기이기도 한 일들이 잘 어우려져 있다.
특히 이 책의 제목이 좋았다. 저자는 ' 매일이라는 일부가 모여야만 인생이라는 이야기의 엔딩을 볼 수 있다는 것이 픽션과 현실의 차이다. 그리고 그게 바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이후에도 우리가 계속 살아야 하는 이유다'라고 생각한다며 '픽션에서도 현실에서도, 그 어떤 이야기에서도 해피엔딩을 기대하지 않는다'고 한다. 나같은 찌질한 사람은 다른 이유로 슬픈 결말이 좋다. 그래도 내 인생은 저렇게 망가지진 않았잖아,라는 생각에 후딱 눈물을 닦아 버리고 현생을 살러 금방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해피엔딩은 그 비현실성 때문에 다 끝난 영상 앞에서 투덜대다 못해 더 비판적이 되고, 찌질한 현생의 비극성까지 고조시킬 수 있다. 그러니 해피엔딩 이후에도 잘 살 수 있디면 더 강한 사람이겠지. 슬픈 엔딩을 보고서는 잘살아보세~하기 훨씬 더 쉽다. 이렇게 찌질한 게 현생이다. 나만 그렇다면 니들의 행운이고. 어쨌든 해피엔딩, 땡큐!
저자는 이런 얘기도 한다. '에세이를 쓰는 건 역시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을 했다. 나의 이야기라서 그렇다... 에세이의 사전적 정의는 '무형식의 산문'으로 누구나, 거의 모든 소재를 가지고, 어떤 형식으로든 자유롭게 쓸 수 있는 문학의 한 갈래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에세이는 쓰기도 읽기도 쉬운 글로 여겨지는 경향이 있는데, 바로 그 이유로 에세이는 쓰기 어렵다. 에세이 작가는 인터넷 서점의 독자평에 '그냥 일기'라거나 '그래서 어쩌라고'라는 댓글이 달릴 것을 각오해야 한다....에세이를 쓴다는 것은 어떤 형식으로든 자유롭게, 결국 나의 이야기를 쓴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자기 이야기만 써놨다'라는 말은 책을 정확히 본 것이라고 말해줄 수밖에 없다(12쪽).' 전적으로 동의한다. 김훈의 자전거나 개이야기, 밥벌이며 글쓰기에 대해선 너 얘기는 너 일기장에 쓰삼, 이라고 하지 않는다. 여기엔 권력의 문제도 있다. 저자는 직면한다. 그러니 응원할 수밖에. 자기 얘기 쓰기가 얼마나 어려운데, 어차피 남의 이야기 읽으려고 픽션이든 논픽션이든 읽는 거면서, 지 얘기는 한 줄 쓸 용기도 없는 주제에, 자기 얘기를 쓰고 출판까지 결심한 용기 앞에서 건방진 댓글 쓰지 말고, 그럴 시간 있으면 본인의 일기라도 써보도록.
팝콘과 시원한 음료수가 금방 떠오르는 표지. 읽어보시고 두루두루 영업당하시길. 시간을 탕진해야 할 사람들, 시간을 탕진해야 시간이 가니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