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의 중력에 맞서 - 과학이 내게 알려준 삶의 가치에 대하여
정인경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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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깨나 읽는다고 생각하고 또 그만큼 읽어왔는데, 정작 책 그 자체에 대해선 쓰기 어려운 책들이 있다. 그런 책들은 그저 마음에 간직한다. 이 책 <내 생의 중력에 맞서>도 그런 책이다. 책의 감상이랄 게 없다. 그냥 이 책을 기록한다. 그 흔한 추천사 하나 없는 본인의 서문과 본문으로 이루어진 책. 추천사 같은 상투적인 뽐뿌질도 시도하지 않은 책들을 보면 '너가 읽든말든 신경 안 써. 난 끝내주는 이야기를 썼으니 안 읽으면 너만 손해껄~ '이라고 말하는 듯한 까칠감이 느껴진다. 매혹적인 까칠함.

작가의 말만 읽어도 이 책의 깊이를 알 수 있다. 책날개 저자 소개를 보니 박사논문 주제가 한국 근현대 과학기술문화의 식민지성이다. 크하, 과학기술을 익히기도 쉽지는 않겠지. 이걸 문화적 요소로 보는 일은 또 다른 분석이 필요할 거고. 근데 나아가 과학기술문화의 식민지성에 대해 얘기하려면 정말 고민 많았겠다. 난 우리 공동체의 미래를 위해 가장 중요하게 우리에 대해 분석해야 할 요소가 식민지성이라고 생각한다. 과학기술을 가지고 거기까지 갔다니 그 내용은 또 어떨까.

제목도 심상치 않다. 내 몸이라는 물질의 중력이 아니라 생의 중력이라니. 그리고 죽어서 완전 분해되기 이전에 중력에 맞서는 게 가능하기나 한가. 의문은 서문에서 풀린다.

"삶은 고통"이라고 합니다. 우리 삶은 죽음이나 질병, 노화, 망각, 사랑, 이별처럼 피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합니다. 우리 인생은 인간이라는 존재를 초월해야 하는 순간을 마주해요. 인간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중력이 객관적 실체라면 삶의 고통은 주관적 경험이지요. 인간 삶의 문제를 설명하기에는 과학의 객관적 언어로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취약한 주관성을 넘어서기 위해 과학을 열망한다는 것을 모르진 않습니다. 과학을 하는 이유가 객관성을 얻기 위해서고, 그 객관성이 권위와 힘을 주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 몸이 느끼고 말하고 싶은 이야기는 개개인의 성격과 취향, 가치관이 반영된 자신만의 경험에서 나옵니다. 저는 과학책 읽기와 쓰기는 객관의 세계에서 한 발자국 물러나 과학과 인문학의 중간지대 어디쯤 닻을 내리기로 했습니다. 저자 서문

아, 늘 머무르고 싶던 곳이 과학과 인문학 중간지대 어디쯤이었다. 과학은 삭막하고 인문학은 무책임하다. 역사를 전공하고 공대로 다시 입학했을 때 나도 그랬다. 저자는 여러 칼럼과 전작에서 보여주듯 균형감있게 그 중간지대에 닻을 내리고 자유롭게 흘러다니고 있다.

<과학을 읽다>의 주인공이 과학이었다면 후속작은 우리 자신을 주인공으로 살펴보고 싶었어요. '나를 읽다'가 되겠죠. 나를 이해하는 데 과학이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요? 과학이 행복, 사랑, 성격, 감정, 기억, 질병, 노화, 죽음 등 인간의 삶에 대해 말하는 것들을 살펴보고, 과학이 어디까지 말할 수 있는지 검토하고 싶었습니다.

저자의 말대로 이 책에는 심리학이나 철학에서 사유할 만한 주제를 가지고, 저자 특유의 섬세하고 부드러운 문체로 자기 생각을 풀어놓고 관련된 과학책을 추천해준다. 끝까지 경어체로 써서 그런지 내내 차분하다. 그러나 곳곳에서 생각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이슈를 던지기도 한다. 가령 첫 챕터부터 미국 독립선언문의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라는 얘기가 틀렸다고 못을 박는다. 사람은 생물학적으로 각각 다르게, 불평등하게 태어났다는 것이다. 이런 인식을 기반으로 더 나은 대안을 제시해준다.

생물학적 불평등을 인정하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보입니다. 과학적 이해를 바탕으로 타인과의 차이를 인정하고 배려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삶에서 성별과 나이, 질병에 따른 사회적 차별을 겪게 됩니다. 누군가에게는 원치 않은 비만, 우울증. 알코올중독 유전자가 관여하고 있습니다. 우성유전학은 스트레스, 학대, 가난, 방치와 같은 나쁜 환경이 유전자에 흉터를 남겨서 여러 세대에 걸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유전자의 횡포에 휘둘려 자신의 의지로 해결할 수 없는 삶을 살고 있지요. 우리는 '능력주의'로 사회적 약자를 몰아서울 것이 아니라 세상의 불행과 불평등을 고쳐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21쪽

내용이 진행되면서 진정한 자아나 존엄한 삶, 죽음이나 노화. 사랑과 양육, 성평등 같은 이슈들이 뇌과학이나 생물학, 물리학이나 의학 등과 함께 어우러진다. '아름다움의 진화' 챕터에서는 젠더차별같은 민감한 이슈와도 과학을 연결시킨다. 폭력적인 숫컷 오리에 맞선 암컷 오리의 생존 전략은 성적 자율성, 배우자 선택의 자유를 향상시키는 방향으로 진화해 왔으며, 이는 사람의 사례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인용하자면 너무 기니까 핵심만 읽어보자면,

우리의 사촌뻘인 고릴라와 오랑우탄은 수컷의 몸집이 암컷보다 두 배 이상 커요...영장류들은 커다란 몸집과 날카로운 송곳니로 암컥과 새끼들을 폭력적으로 지배했습니다. 알파 수컷은 영아살해를 자행하기도 합니다. 인간의 경우 남성의 신체가 여성보다 평균적으로 크지만 다른 영장류들에 비해 현격히 작아졌어요. 남성의 체구는 여성보다 평균적으로 16퍼센트 정도 크고 날카로운 송곳니는 제거되었습니다. 신체크기 차이가 감소하면서 인간사회의 폭력성도 줄어들었지요. 이러한 진화의 방향은 평등한 몸집을 선호하는 여성의 미적 취향의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122쪽

참고한 책은 다윈의 <인간의 유래와 성선택> 그리고 리차드 프럼의 <아름다움의 진화>다. 읽어야 할 목록으로 추가. 저자의 관심은 신경과학, 유전, 행복, 성격, 예술로 이어지다가 책 마무리쯤에는 저자가 특별히 아끼는 올리버 색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죽음을 앞둔 그가 쓴 글에서 '인류와 지구는 생존할 것이고, 삶은 지속될 것이다'라는 메시지를 전해주며 잔잔한 위로도 안긴다. '나의 뇌' 역시 그의 말에 순응하기로 했다.

나같은 '자발적 멸종주의자(292쪽)'는 흉내도 못 내볼 따뜻한 이야기. 책은 현대의학의 실패한 암치료사례를 통해 죽음을 대하는 태도를 제언하며 마무리된다. 역시 그 흔한 저자 후기 같은 것도 없이 저자가 읽어내려간 소중한 참고문헌들을 내놓고 책은 끝난다. 후아, 그냥 한 번 읽고말 책이 아니다. 사놓고 아직 읽지 못한 <과학을 읽다>를 챙겨 읽고 이 책으로 다시 돌아와야 겠다. 머리 구석구석이 지적 호기심으로 들쑤셔지고 과학적 지식과 어른같은 사유가 가득한 책. 나도 절로 성숙해질 것 같은 느낌으로 만족감이 넘치는 책. 이 책 덕에 한 동안 우울하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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