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을 까는 여자들 - 환멸나는 세상을 뒤집을 ‘이대녀’들의 목소리
신민주.노서영.로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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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대선을 거치며 마음에 가장 깊이 남아있던 사람은 3월 초, 달리는 택시에서 뛰어내려 뒷차에 치인 후 숨진 20대 여성이었다. 그리 밤늦은 시간(밤 8시 45분)도 아닌데 달리는 택시 안에서 뛰어내릴 수밖에 없었던 그 여성. 그 공포...이건 여성만 안다. 남성은 무서움을 느낄 필요도 없는 권력이 있고, 그 권력을 태어날 때부터 가진 남성은 그 권력이 자신에게 있음조차 성찰해본 적 없으므로. 택시기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서로 주고 받은 대화가 착오였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 공포는 실재하는 생생한 것이니까.

공포심만으로도 여성이 죽을 수 있는 문화가 있는 곳에서 여성들은 어쨌든 살아가고 있다. 살아남으려고 때로 침묵하고 때로는 생존신고하고 가끔은 목소리도 내면서. 목소리를 내도 잘 들어주지 않는 사회에서.

이번 대선에선 정말 여성들에겐 투표권이 없나 싶었다. 이대남이 정치권에서 호명된 이후, 이름이 부여된 이대녀들. 남성들의 혐오정서를 표로 이용하는 하버드 출신의 한국남성을 보면서, 여성들의 생각이 절실했다. 어디서든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그 목소리는 선거 막바지에나 울려나왔다. 언론과 정치권이 아예 관심을 안 가지니 스스로 이슈를 만들어 움직였다. 그러는 사이 <판을 까는 여자들>을 읽게 되었다. 스스로 이대녀를 대변하려는 마음부터 버리고, 정치가 이대녀를 정치적 주체로 인정하게 만들어야 하지만, 동시에 이대녀를 마음대로 해석하고 하나의 단일집단으로 축약하려는 욕심들에 저항하면서(7쪽), 젊은 여성 세 명이 정치와 사회에 대해 쓴 책. 무조건 반가웠다. 나는 쉽게 선정적인 이슈에나 몰려다니는 언론을 욕했지만, <판을 까는 여자들> 저자 중 로라는 오히려 냉정했다.

가짜뉴스를 생산하는 나쁜 시민과 가짜뉴스에 피해를 입는 선량한 시민이 분명하게 구분된다는 믿음 자체는 허상이다. 사실, 어떤 뉴스는 바로 그것을 갈망하는 사람들의 욕망에 의해 발견되고 가공되고 확산된다. 사람들이 어떤 말을 듣고 싶어 하는 것이 언제나 무지성의 결과는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어떤 뉴스가 자신에게 어떤 도움이 되는지를 분명하게 알고 선택한다. 136쪽

'팩트는 주장을 앞서지 못한다'는 것이다. 여성을 혐오하고 남성우쭈쭈에 앞장서는 언론은 결국 그 왜곡을 원하는 사람들 덕분에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양궁선수의 쇼컷 낙인을 조장한 언론 사례를 들면서 사회가, 언론이, 정치가 이십대 여성을 외면한다면 스스로 말하고, 스스로 언론과 정치를 만들어나가겠다고 한다. 이들의 노력은 짧은 머리를 한 여성은 공격받는다는 선례를 남기지 않았다(141쪽). 아우 똑똑하고 현명하다.

노서영 또한 이준석의 의도를 간파하고 있다. 그는 여성혐오를 이용해 남성의 표를 활용했지만 그들의 삶을 진정으로 개선할 의지와 능력을 가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69쪽). 신민지 또한 "남성만을 청년으로 상정하고 정치는 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여성폭력에 대해서, 기울어진 운동장과 성별임금격차에 대해서 말하지 않아도 지지를 얻을 길이 있기 때문이다. 몇 마디의 안티 페미니즘적 발언, 페미니즘에 대한 '손질'시늉은 이미 정치권에서 손쉽게 이대남의 표를 가져올 수 있는 방법으로 통용된다(48쪽)."고 분석하며, 스스로 말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나가겠다고 한다. "분명한 것은 언제나 내 삶을 바꿨던 것은 최악과 차악 중에 선택을 강요했던 사람들이 아니라 젊은 여성으로서 내가 해야 하는 '역할'을 거부했던 순간들이었다(50쪽)"는 말에서는 젊은 여성에게 강요된 '역할'과 예쁨을 주겠다는 남성권력의 보장에서 자유로운 여성의 힘을 느낀다.

판을 깔기 위해 현상을 분석하고 자신이 있는 장소에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젊은 여성들은, 가족 이슈나 불안을 조장하는 사회에 대해서도 진보적이고 정치적인 의견을 내놓는다. '내가 되고 싶은 가족을 찾아서, 가족 바깥에 가족을 짓자. 사랑해서 구속되고 위험해지고 불평등해지는 게 아니라, 사랑하니까 자유로워지고 사랑하니까 평등해지자(169쪽)'는 의견은 과거에 머물지 않고 한탄하지도 않겠다는 의지로 읽힌다. 또 오징어게임에서 혼자 살아남고 456억원을 받을지, 아니면 모두 살아남아서 1억원씩 받을지 선택하는 질문에서, 청년들 75%가 후자를 선택했다는 데서 희망을 얻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돈만 바라보고 갈 것 같지만, 이 상식적인 결과를 통해 돈과 바꿀 수 없는 최저선의 안정감 보장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깨우쳐준다. 기본소득에 대한 논의가 이끌려 오는 것은 당연하다(183쪽).

민서영은 강남역 살인사건을 계기로 많은 젊은 여성들은 자연스럽게 혹은 필연적으로 '결국 정치가 바뀌지 않으면 안 되는 거구나'를 익혀버린 세대라고 말한다. 젊은 여성들은 가장 정치에 대한 환멸과 분노가 크면서도 정치를 믿고 바꿔야만 한다는 열망이 가장 큰 사람들이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어디에 있든 계속해서 정치적인 목소리를 내고 정치적인 역할들을 같이 할 수 있어야 한다. 내 목소리도 보태면서 '판을 까는 여성들'을 열렬히 응원한다. 부디 기운을 내고 지치지말고 끝까지 잘 살아남아서 자연사해야 한다(186쪽).

정치판에도, 직장에도, 사회에도, 학교에도 판을 까는 여자가 필요하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아무도 송은이가 연예계에서 여자들의 판을 깔 것이라 예측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마침내 새로운 길을 개척했다. 그는 후배들의 아이디어에 대해 거침없이 "해보자!"고 외쳤고, 그런 시도가 아무도 해치지 않는 즐거움을 향유할 수 있는 기회를 모두에게 주었다...우리가 서 있는 공간에서도 그것이 가능하게 될지 모른다.

언론이 무시하고 정치가 패싱해버린 젊은 여성들의 정치적 의견이 흔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촘촘하게 담겨 있는 책.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기 바란다. 언제든 귀기울이고 함께 할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 10년 넘게 잠자고 있던 트위터 계정에 로그인하는 걸 시작으로.

권력의 칼이 어떻게 휘둘러질지,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사실 나는 많이 두렵다. 하지만 확신한다. 상황이 어떻든 여성멸시를 대놓고 시연하며 여성들의 희생을 밑밥으로 깔아 무언갈 해보려는 시도는 반드시 실패할 것이다. 결혼율, 출생율이 높아질 것 같은가? 윤석렬이 당선되면 5년 안에 결혼하고 아이도 낳아야지, 라는 남성의 글에 달린 여성들의 의견을 제발 한 번쯤 진지하게 생각해보기를. 여성들은 여성의 인권이 후퇴하면 결혼이 아니라 자살을 합니다, 란 대답에서 그녀들의 심정이 너무나 이해되었다. 부디 힘내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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