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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은이 냥극하옵니다 안전가옥 쇼-트 24
백승화 지음 / 안전가옥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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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숙종은 어느 날 능행길에서 노란 새끼 고양이 한 마리를 만난다. 어린 고양이는 세자에게 다가오는 독사를 덥석 물어 죽음에서 구해내고 숙종은 그 용맹하고도 앙증맞은 존재를 곁에 두기로 한다. 이름은 금손. 애정은 폭발. 문제는 왕의 사랑이 백성들을 들뜨게 하듯 정치판도 함께 흔든다는 점이다.

고양이를 싫어하는 세자, 고양이를 이용하는 노론과 소론, 고양이의 행방을 둘러싼 의문의 납치극까지. 하필 가장 귀찮은 일만 골라 만나던 포졸 변상벽은 술김에 엮인 사건 덕에 금손 수색 작전에 끌려들고, 버려진 아이들을 돌보는 ‘묘마마’와 한 조가 된다. 변상벽은 고양이를 찾는 임금의 절박함을 목격하며, 고양이를 짐처럼 여기던 자신의 삶을 돌아보기 시작한다. 결국 금손의 행방은 권력과 약자의 경계에 숨어 있던 음모를 드러내고 변상벽을 예상치 못한 선택 앞에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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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숙종은 장희빈과 인현왕후, 당쟁과 사화로 기억되는 인물이다. 그러나 이 책은 오래된 왕의 이미지를 비틀어 애묘인의 얼굴을 전면에 내세운다. 치즈냥이를 ‘꿀묘’라 부르고 금손이라는 귀여운 이름을 붙여주는 왕의 모습은 권력을 휘두르는 군주라기보다 생명 앞에서 마음이 열린 사람에 가까웠다. 숙종이 왜 금손에게 마음을 빼앗겼는지 이야기 초반부터 선명하다. 작은 고양이가 독사를 잡은 순간부터 왕과 고양이의 관계는 정치보다 먼저 움직이기 시작한다. 역사는 이 장면을 기록하지 않았지만 소설은 그 틈을 정확하게 파고들며 왕이라는 인물의 결을 새롭게 만든다.

한편 변상벽의 서사는 금손을 중심으로 넓어지는 조선의 바깥을 비춘다. 얼자 신분으로 형의 그늘 아래 살아야 했던 상벽은 욕지거리나 하며 살아가는 인물처럼 보이지만 고양이가 사라진 순간 비로소 세상의 잿빛 풍경이 드러난다. 노론과 소론의 끝없는 정쟁, 허기진 백성, 팔려가는 아이들, 도망친 아이들. 이 척박한 세계에서 고양이를 돌보는 ‘묘마마’는 은근한 신성성을 띤다. 먹을거리 하나 없는 아이들의 모퉁이에 고양이를 끌어안고 나타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시대의 잔혹한 결핍을 더 또렷하게 만든다. 그렇게 이 작품의 고양이는 단순한 조연이 아니라 시대를 증폭시키는 렌즈로 작동한다.

정치적 긴장과 인간적 욕망이 뒤엉키는 대목에서 고양이는 양쪽을 오간다. 왕을 따르는 존재는 권력의 증거가 되고, 고양이를 미워하는 세자의 알레르기는 권력을 쥐고 흔드는 명분이 된다. 고양이가 사라진 뒤 변상벽과 쪼깐이, 묘마마가 펼치는 추적 과정은 조선판 버디물처럼 흥미롭다. 곳곳에 박힌 작은 사연마다 웃음과 슬픔이 동시에 깃들어 있어 이야기의 속도가 빠르면서도 감정이 단단하게 남는다. 고양이 한 마리가 시대의 틈을 비추며 인간의 본성을 드러내는 구조가 이 작품을 단순한 퓨전 사극 너머로 끌어올린다.

읽는 동안 지속적으로 떠오르는 생각은 하나였다. 왕이 금손을 돌본 방식이 백성을 돌보는 방식이었더라면 조선의 시간은 조금 다른 모습이었을까. 생명을 쓰다듬는 손길과 권력을 휘두르는 손길이 한 사람에게 공존할 때 어떤 세계가 가능한지, 작가는 고양이라는 작은 생명으로 그 상상력을 풀어낸다. 꿀묘 금손의 반짝임이 닿은 자리마다 조선의 풍경이 환하게 밝혀지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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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양이를 향한 숙종의 애정은 왕의 권력과 어떤 관계를 만드는가

🔦 금손을 잃어버린 사건이 변상벽의 시선을 어떻게 바꾸었는가

🔦 약한 존재를 돌보는 행동은 시대의 정치와 어떻게 충돌하거나 이어지는가

🔦 조선의 정쟁 속에서 고양이라는 생명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 만약 당신이 금손을 찾는 일에 휘말렸다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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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마 유키오 - 우국·한여름의 죽음 외 22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41
미시마 유키오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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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온한 여름 휴가지에서 벌어진 비극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 한순간에 가족을 잃은 생존자에게 남겨진 것은 견딜 수 없는 슬픔이 아니라 어처구니없게도 다시 찾아오는 허기와 권태였다. 또 다른 이야기 속 젊은 장교 부부는 다가올 죽음을 앞두고 생의 가장 뜨거운 밤을 보낸다.
이 책은 미시마 유키오라는 작가의 시작과 끝을 관통하는 강렬한 단편들을 묶은 결정적 기록이다. ‘꽃이 한창인 숲’의 몽환적인 아름다움부터 ‘한여름의 죽음’의 서늘한 심리 묘사, 그리고 ‘우국’의 충격적인 결말까지. 독자는 이 책을 통해 한 작가가 탐닉했던 아름다움이 어떻게 파멸과 맞닿아 있는지 그 위험한 궤적을 목격하게 된다. 과연 그가 문장으로 쌓아 올린 금지된 아름다움의 끝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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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시마 유키오는 문학적으로는 찬사를, 사상적으로는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양가적인 인물이다. 이 단편집은 작가의 생애 전반을 관통하는 미의식을 엿볼 수 있으며 그의 위험한 매력이 가장 농밀하게 압축된 증거물이라 할 수 있다. 수록된 24편 중 특히 주목해야 할 세 작품은 각기 다른 시선으로 '죽음'을 해부한다.
먼저 '꽃이 한창인 숲'은 미시마 문학의 원형을 보여준다. 동경과 과거 그리고 죽음의 이미지가 화려한 수사 뒤에 숨어 있다. 서사보다는 정서와 분위기가 압도적인 이 작품에서 그는 이미 태생적으로 죽음에 매혹된 자의 내면을 고백한다. 이는 10대 소년의 치기 어린 습작이 아니다. 현실의 전쟁이나 소란스러움에서 등을 돌리고 오로지 내면의 미적 완성을 추구했던 그의 탐미주의가 가장 순수한 형태로 드러난 문학적 선언문이다.
반면 '한여름의 죽음'은 지극히 현실적이고 심리적이다. 작가는 생때같은 자식과 시누이를 잃은 주인공 도모코를 통해 인간의 이기심과 망각을 잔인할 정도로 냉정하게 포착한다. 슬픔조차 시간에 희석되고 마는 인간의 본성, 비극적인 사건 앞에서도 밥을 먹고 잠을 자며 살아가는 생존 본능에 대한 묘사는 어떤 공포 소설보다 서늘하다. 보들레르가 말한 "권태"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그리고 미시마 유키오가 평생 경계했던 '평범하게 늙어가는 것'에 대한 공포가 이 작품의 밑바닥에 깔려 있다.
가장 논쟁적인 작품 '우국'에서 작가의 탐미주의는 위험 수위를 넘나든다. 청년 장교의 할복이라는 정치적 소재를 가져왔지만 그가 천착한 것은 이념이 아닌 '죽음의 찰나에 완성되는 관능'이다. 피와 죽음을 가장 성스럽고 아름다운 것으로 포장하는 그의 문장은 불온하지만 부정할 수 없을 만큼 강렬한 흡인력을 지닌다. 현대적 윤리관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든 전체주의적 광기와 죽음 찬양이 담겨 있지만 미시마 유키오라는 작가는 그 광기마저도 숨 막히도록 정교한 문장으로 포장하여 독자를 설득한다. 자신의 신념을 위해 가장 아름다운 순간에 육체를 파괴한다는 이 위험한 미학은 미시마 문학의 정점이자 심연이다.
이 책은 독자에게 도덕적 판단과 미적 체험 사이의 위태로운 줄타기를 강요한다. 그러나 그의 문학이 지닌 파괴적인 힘을 확인하고 싶다면 반드시 거쳐야 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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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소에는 지팡이 따위 드는 일도 없으면서 무심코 들고 온 그것은 먼 옛날에 기껏해야 일이 초쯤이나 만져보게 해주던 가보 투구의 감촉 같은 걸 문득 떠올리게 할 것이다. 바로 그런 때의 일이다." - <꽃이 한창인 숲> 중
현실에서 문득 나도 모르게 조상의 습관을 따라 하고 있을 때가 있다. 작가는 이런 순간을 문학적으로 아름답게 포착하며 우리 모두 조상으로부터 뿌리내려온 존재임을 암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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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토록 큰 불행을 겪었는데도 미쳐버리지 않은 데 대한 절망감, 아직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다는 데 대한 절망감, 인간의 신경의 강인함에 대한 절망감, 그런 것들을 도모코는 속속들이 맛보았다." - <한여름의 죽음> 중
비극마저도 일상으로 만들어버리는 인간의 망각에 대한 절망감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인간이란 어떠한 시련도 결국 견디고 일어나 일상을 회복하는 존재임을 보여주는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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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고는 한참 화장에 시간을 썼다. (중략) 뒤에 남겨지는 세상을 위한 것으로, 그녀의 화장 솔에는 장대한 뜻이 담겨 있었다." - <우국> 중
순간의 행복을 영원히 박제하기 위해 스스로 파멸을 택한다는 광기 어린 논리다. 이것은 사랑의 완성인가 아니면 자기파괴의 미화인가. 죽음 직전의 화장이라는 행위에서 기이한 비장미가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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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시마 유키오가 그리는 ‘죽음’은 단순한 생의 끝이 아니라 미적 완성의 도구로 보인다. 이러한 ‘죽음의 미학’을 현대의 독자는 윤리적으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 ‘한여름의 죽음’에서 보여주는 인간의 망각(슬픔의 풍화)은 비정한 것인가, 아니면 살아남기 위한 본능적인 방어기제인가?
🔦 작가의 위험한 사상(극우, 군국주의)과 그의 문학적 성취(유려한 문체, 심리 묘사)를 분리해서 평가하는 것이 가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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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현대문학으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미시마유키오 #현대문학출판사 #세계문학단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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샴페인과 일루미네이션 현대문학 핀 시리즈 장르 9
허진희 지음 / 현대문학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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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빨간 구두를 신은 보하와 흙 묻은 손의 구니. 너무도 다른 두 소녀의 만남은 우정의 시작이었다. 가난하지만 단단한 구니와, 화려하지만 불안한 보하는 서로의 결핍을 채우며 세상의 중심이 되어 준다. 그러나 보하의 아버지가 회사 돈을 횡령해 감옥에 가면서 두 소녀의 삶은 다른 궤도로 흩어진다. 세월이 지나 다시 만난 둘은 각자의 상처를 감추며 서로에게 매달리지만, 수능을 앞둔 어느 날 아침 보하가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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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샴페인과 일루미네이션>은 서로의 결핍을 닮아가던 두 소녀가 세상의 어둠 속에서 잠시나마 서로를 밝혔던 이야기다.

처음엔 ‘소녀들의 우정 이야기’로 읽기 시작했지만 곧 이 작품이 훨씬 더 깊은 층위를 가진 소설이라는 걸 알게 됐다. 구니와 보하의 관계는 단순한 우정이라기보다 서로의 어둠을 비추는 거울이었다. 구니는 현실을 견디기 위해 마음을 숨기고, 보하는 결핍을 감추려 도망친다. 그렇게 두 사람은 ‘있음’과 ‘없음’을 오가며 세월을 지나 어른이 된다.

보하는 늘 구니를 부러워했다. 구니에게만 있는 초연한 기운, 스스로를 단단히 세우는 힘, 그리고 버텨내는 법을 알고 있는 듯한 안정감. 반면 구니는 그런 보하를 향해 알 수 없는 경계심을 품었다. 서로 닮고 싶고 닮고 싶지 않은 마음이 교차하는 그 감정선이 이 소설의 진짜 매력이다.

구니의 삶은 할머니의 가르침 아래 ‘버티는 법’을 배운 시간이었다. 그러나 그 단단함은 역설적으로 누군가를 잃지 않기 위한 두려움에서 비롯됐다. 그래서 보하에게조차 솔직해질 수 없었다. 반면 보하는 언제나 반짝이는 일루미네이션처럼 구니의 세계에 갑자기 들어와 잠시 빛나고는 사라진다. 구니의 세상은 그 빛으로 환해지지만 동시에 다시 깊은 어둠으로 가라앉는다.

보하가 남긴 말과 기억은 결국 구니를 성장하게 만든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상처를 주었지만, 그 상처가 없었다면 결코 어른이 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샴페인의 거품처럼 화려했던 시절은 사라졌지만, 그 기억의 잔향은 오래 남는다.

이 책이 특별한 이유는, 두 소녀의 관계가 ‘사랑’과 ‘우정’, ‘집착’과 ‘의존’의 경계를 오가며 인간 관계의 복잡한 감정을 섬세하게 포착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모든 감정이 결국 ‘외로움’이라는 단어로 귀결된다는 점에서, 독자는 자신이 지나온 시절의 친구 한 사람을 떠올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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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머니와 보하에게 조금씩 매정하게 굴고 있지만 두 사람에게 버림받고 싶지는 않았어요. 나는 다만 두 사람에게 내가 누리는 지금 이 시간을 그저 보아 넘겨달라고 떼를 쓰고 있었지요.” -p.47

누구에게나 있는 이중적인 마음이다. 사랑하는 이에게 상처를 주면서도, 그 관계만큼은 잃고 싶지 않은 욕심. 구니는 그 마음을 가장 솔직하게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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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니가 끝내 보하에게 닿지 못한 건 외로움 때문일까 자존심 때문일까

🔦 어른이 된다는 건, 결국 ‘없음’을 견디는 법을 배우는 일일까

🔦 샴페인과 일루미네이션처럼 반짝이는 순간이 지나간 뒤에도, 관계의 빛은 남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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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현대문학으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샴페인과일루미네이션 #허진희 #현대문학 #핀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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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키메라의 땅 1~2 세트 - 전2권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김희진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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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멸종 이후의 지도 위에 그려 본 공존의 실험. 타자를 이해하는 능력이 곧 인류의 최후의 기술임을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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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멸종 위험에 대비한 비밀 계획 ‘변신 프로젝트’. 진화 생물학자 알리스 카메러는 인간과 동물의 유전자를 조합해 혼종 신인류를 만든다. 목표는 단 하나. 어떤 파국이 닥쳐도 인류의 가능성을 잇는 것. 그때 핵전쟁이 일어나고 지구에는 극소수의 인간만 남는다. 그리고 세 종의 키메라가 깨어난다. 방사능을 견디는 신체. 새 질서의 감각. 황폐한 행성 위에서 그들은 생존과 공존 사이의 길을 선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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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책을 두고 호불호가 갈린다는 말을 많이 들었지만 이 작품은 예외였다. 왜 그가 세계적 작가인지 이해가 됐다. 기존 세계관의 실이 은근히 스며 있어 오래된 팬은 반가움을 느낀다. 처음 읽는 독자도 넓은 세계를 단숨에 따라갈 수 있다. 개인적으론 원제인 <키메라의 시간>이 상징을 더 잘 살린다고 여겼다. 다만 시작선에 선 독자에게는 <키메라의 땅>이 더 직관적이다.

갈등의 축이 단계적으로 옮겨 간다. 사피엔스 대 사피엔스. 사피엔스 대 혼종. 혼종 대 혼종. 충돌이 거칠게 번질 때마다 질문이 또렷해진다. 폭력의 유전자는 사라질 수 있는가. 종족 차별은 진화로 지울 수 있는가. 작품은 선악으로 재단하지 않는다. 선택과 결과를 차분히 보여 준다.

이야기의 리듬은 빠르다. 장면은 짧고 선명하다. 그 속에서 윤리의 경계가 흔들린다. 생존을 위해 타자를 배제하면 공동체는 더 약해진다. 반대로 낯선 존재와 언어를 나누면 신뢰가 싹튼다. 소설은 거창한 선언보다 작동하는 장면을 쌓는다. 물과 음식을 나누는 손. 부상을 돌보는 손. 방아쇠 위에 얹힌 손.

세 혼종과 사피엔스의 관계 역시 단선적이지 않다. 어떤 집단은 공생을 택한다. 어떤 집단은 과거를 숭배한다. 어떤 집단은 힘의 논리에 매달린다. 독자는 어느 순간 스스로의 자리도 점검하게 된다. 과거의 상처를 잊지 말자는 다짐과 현재의 공존을 열자는 제안이 충돌할 때 우리는 어디에 설 것인가.

베르베르는 이번에도 결론을 강요하지 않는다. 대신 시야를 확장시킨다. 키메라는 타자가 아니라 거울이다. 새 종을 이해하는 능력은 곧 우리 자신을 구하는 능력이라는 사실. 이 작품은 그 자명함을 끝까지 밀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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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건 오직 혼종들뿐인 것 같아. 이들에겐 조상도 종교도 없다는 단순하고도 당연한 이유에서…” (1권 p.223)

전통의 기억은 연대의 기반이 되기도 한다. 동시에 증오의 연료가 되기도 한다. 과거의 숭배가 현재의 폭력을 정당화할 때 누가 미래를 대표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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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젊은이들은 잘 지냈지만 그 부모들은 그렇지 않았어요. 옛 세대는 뼛속까지 종족 차별주의로 썩어 있고 그 사실을 숨기지도 않아요.” (2권 p.175)

세대의 간극은 단순한 취향 차이가 아니다. 공존의 문법을 새로 배우려는 의지의 차이다. 미배움은 혐오로 자라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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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류의 존엄을 지킨다는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생존의 확률을 높이는 일인가. 타자와 자리를 나누는 일인가.

🔦 과거의 상처를 잊지 않는 일과 미래의 공존을 택하는 일. 두 가치는 어디에서 만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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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열린책들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키메라의땅 #베르나르베르베르 #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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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턴 숲의 은둔자 캐드펠 수사 시리즈 14
엘리스 피터스 지음, 김훈 옮김 / 북하우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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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턴의 영주가 세상을 떠나자 어린 상속자 리처드를 두고 탐욕스런 할머니 디오니시어와 소년을 보호하려는 수도원 간의 기싸움이 시작된다. 어느 날 리처드가 실종되고, 수도원 손님 한 명이 살해된다. 겉보기엔 아무 상관없어 보였던 사건들이 하나로 이어지며 그 끝에는 아무도 예상치 못한 결말이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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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이야기는 시작부터 빠르게 몰아간다. 어린 리처드의 거처 문제를 둘러싼 수도원과 할머니의 싸움은 이야기의 긴장감을 팽팽히 끌어올린다. 거기에 느닷없이 등장하는 에이턴 숲의 은자와 청년. 처음엔 단순히 곁가지로 보였으나 그들이 지닌 비밀과 관계가 사건의 핵심과 맞닿아 있다는 사실이 점차 드러난다.

처음 읽을 때는 이 많은 인물과 사건 조각들이 어떻게 이어질지 감조차 오지 않았다. 그러나 캐드펠이 움직일 때마다 하나둘 흘리는 단서들,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실타래가 점점 풀려가는 느낌이었다. 초반에 흘려두었던 정보들이 마지막에 하나로 모여 완성되는 순간, 퍼즐 조각이 딱 맞아떨어질 때의 쾌감이 대단했다.

에이턴 숲에서 벌어지는 사건은 단순한 살인이나 실종이 아니라 각자의 욕망과 선택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인물마다 사연이 있고, 그 사연들이 모여 하나의 비극을 만들어낸다. 캐드펠 시리즈의 매력은 사건 해결보다 그 속에 담긴 인간성에 있다. 캐드펠은 늘 사람을 먼저 보고, 죄보다 사연을 읽는다. 그래서 단순히 범인을 밝히는 탐정물이 아니라 사람을 이해하려는 여정에 더 가깝다.

은자와 청년이 처음 등장했을 때는 ‘왜 굳이 이런 캐릭터를 넣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마지막에 이들이 사건의 키를 쥐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며 모두가 놀랄 수밖에 없다. 책을 덮는 순간, 작가가 얼마나 정교하게 모든 조각을 설계했는지를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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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많은 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살인자와 살해당한 자가 나란히 누워 있었고, 정의는 이미 실현되었다. 하지만 그 살인자를 살해한 사람은 누굴까? -p.313

겉으로 드러난 결말 속에서도 여전히 풀리지 않는 한 겹의 질문이 남아 독자의 머릿속을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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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을 지키기 위한 선택은 어디까지 정당할까

🔦 선의와 욕망은 어떻게 뒤섞이는가

🔦 죄와 구원은 어떻게 서로를 비추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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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북하우스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캐드펠서포터즈 활동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에이턴숲의은둔자 #엘리스피터스 #북하우스 #캐드펠서포터즈3기 #캐드펠수사시리즈 #추리소설 #추리소설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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