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행이야, 내가 아니라서.
그렇게 생각했다. 그 말의 비열함에 스스로 참혹해지면서도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선배가 출장을 다녀오며 사다 준 핸드크림과 초콜릿, 마그넷 같은 기념품들이 여전히 책상 서랍에 남아 있었지만 죄책감을느끼지 않으려고 애썼다.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을 거면서 죄책감을 느끼는 것 자체가 자신이 형편없는 인간이라는 것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더 큰 비겁함 같아서였다. 그때는 비겁하지 않은 태도 같은 건 선택지에도 없었다. 비겁함의 더하고 덜함을 고를 수 있을 뿐이었다. 뻔뻔하고 못된 얼굴로 청소년들을 상담하고 조언을 하고 위로를 하면서 1년을 더 다녔다. 자신은 한 번도 좋은 어른인 적 없으면서 좋은 어른으로 커야 한다고 말했다. - P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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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영은 사서 공무원은 아니었고 도서관장이 바뀌면서 데려온 무기 계약직 직원이었다. 도서관장이 시청에서 근무할 때도 비서로 일했다고 하는데 둘이 사귀는 사이였다는 소문이 김자옥 씨의 귀에까지 들려왔다. 그래서는 아니지만 다른 사서 선생들보다는이윤영이 대하기 편했다. 소문으로 사람을 훼손하고 그 훼손됨에 우월감을 느끼며 만만하게 대하는 사람들의 저열한 태도를 젊은 날 질리도록 겪어 왔는데 결국 김자옥 씨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가 아니라니. 이윤영이 편한 건 그래서였다. - P73

사실 고독사 워크숍을 준비하면서 대단히 존험하고 고결하고 우아한 고독사를 완성하겠다는 꿈이야말로부장님식 농담에 지나지 않았다. 우리가 꿈꿀 수 있는 가장거창한 고독사란 최대한 하찮게, 고요하게, 누구에게도 슬픔과 죄책감을 안기지 않고 애초에 없었던 것처럼 자연사로서고독사를 맞이하는 것뿐일 터였다. 그것이 조 부장의 고독사워크숍이 지향하는 최선의 고독사였다. - P115

나쁘지 않다는 말은 정말 나빴다. 완벽히 나쁘지도 못하게때문에 더 나빴다. 언젠가 P가 했던 말을 알리스는 떠올렸다.
그때 P의 목소리에 담긴 슬픔과 분노에 대해서, 어떤 촌스러운 슬픔은 분노로 표현된다는 것을 알리스는 이해하고 싶지않았으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말이 P를 지나 윤정을 거쳐 구해영에게 이르는 과정에 대해 생각했다. 나쁘지 않은 건 아주 나빠. 정말이지 아주아주 나쁘다고. 일상적인 가학은 친절과 배려의 옷을 입고 온다고 알리스는 생각했다. 농담으로 위장한 상냥한 폭력에 대해 알리스는 알고 있었다. 알고 싶지 않은데 알게 된 것들이었다.
나쁘지 않아 나쁜 날들은 많았고 사실은 매일 그러했다. - P127

돌이켜 보면 진지하게 그런 생각을 한 건 아니었다. 다만 값싸게 취급된 어떤 죽음에 대해서 슬픔이 제거된 자리에 악취 나는 쓰레기 같은 생각들을 채움으로써 그 죽음이 야기할수 있는 작은 슬픔조차 느끼기를 거부했던 것 같았다. 스스로를 혐오의 상태에 가두고 고립시키는 행위가 슬픔으로부터 자신을 지켜 주리란 어리석은 기만, 그렇게 전이된 슬픔은 이전에도 있었고 이번이 마지막도 아닐 터였다. - P210

타인의 행동에 의문을 품지 않고 모른 척 넘어가는 것이 전규석이 과거를 통해배운 유일한 삶의 해법이었다. 정답은 아니지만 틀리지도 않는 답 - P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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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만 주어지는 행운을 기대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공평한 불행과 재난에 안도하는 사람도 있었다. - P17

아무도 신경쓰지 않으면 모욕도 모욕이 아니었다. 송영달의 비겁한 온유에 필요한 건 그뿐이었다. 그런데 김인선 씨는 왜, 치욕의 가해자는 이제 사무국장이 아니라 김인선 씨가 되었다. 어떤 중오나 혐오의 감정은 어설프게 친절하고 만만한 쪽을 향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끝에 주로 자신이 서게 된다는것도. - P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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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안 될까. 처음부터 자기소개를 제대로 했으면 좋았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게 더 나은 방법일 것 같았어.
그래도 나는 안 될까. 너를 직접 만나려고 2만 광년을 왔어.
내 별과 모두와 모든 것과 자유 여행권을 버리고 그걸 너에게 이해해달라거나 보상해달라고 요구하는 건 아냐. 그냥고려해달라는 거야. 너한테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 그냥 내바람을 말하는 거야. 필요한 만큼 생각해봐도 좋아 기다릴게 사실 지금 이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난 괜찮은 것 같아. 우주가 아무리 넓어도 직접 하지 않으면 안되는 이야기들이 있으니까. 이거면 됐어." - P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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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읽겠습니다 (에세이 에디션) - 책과 가까워지는 53편의 에세이 매일 읽겠습니다
황보름 지음 / 어떤책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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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부딪침. 독서모임의 가장 큰 묘미다. 물론 생각과 생각이 부싯돌처럼 타닥타닥 부딪치는 경험이 처음에는 부담스러울지 모른다. 골똘하게 생각한뒤 내놓은 결론이 상대의 말 한마디에 허술한 의견으로 판명 나 버리면 꽤 속상하기도 하다. 하지만 곧 부딪치는 과정 자체가 중요함을 알게 된다. 그간 얼마나근거 없는 생각들을 신념처럼 떠받들어 왔는지 깨닫는순간, 생각하는 즐거움에 더욱 깊이 빠져든다. - P104

한 권의 책을 다 읽고 이젠 뭘 읽어야 하나 고민할 때 ‘이 책이 왜 좋았지?‘ 한번 생각해 보는 것이다. 그러고는 ‘왜’를 좇아 보이지 않는 책의 연결성을머릿속에 그려 본다. 저자의 사상이 마음에 들었다면사상에 영향을 끼친 작가가 누구인지 찾아보고, 주제가 좋았다면 같은 주제의 다른 책을 검색해보고, 인용구들이 특히 인상적이었다면 인용된 책을 읽어 본다. 거미줄처럼 촘촘한 독서의 그물에서 쉽게 헤어나지 못할 것이다. - P133

나를 지키는, 나를 보호하는 책 읽기가 필요한이유다. 상품을 쌓는 대신 세상을 이해할 지식을 쌓기위해, 미디어가 제안하는 것이 아닌 내가 원하는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외로울 때 마트가 아닌 친구네 집으로 향하기 위해, 안정감에 목마를 때 근사한 집을 꿈꾸는 대신 지금 이곳에서 단순한 생활을 꾸리기 위해, 내불안의 근거를 스스로 추적하기 위해, 내 선택에서 내가 소외되지 않기 위해, 내 안의 욕망을 이해하고 욕망해소 방법을 직접 찾기 위해, 우리는 책을 읽어야 한다. - P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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