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자의 서재 - 최재천 교수와 함께 떠나는 꿈과 지식의 탐험 우리 시대 아이콘의 서재 1
최재천 지음 / 명진출판사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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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3 때, 이 책을 만났습니다. 무엇을 하며 살아갈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이 책을 읽고 교수님처럼 즐거운 일을 하며 살아가자고 다짐했던 것이 생각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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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앞의 생 (특별판)
에밀 아자르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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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살아갈 생을 사랑하며 살수있기를 하고 책을 덮으며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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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류 문학과지성 시인선 462
정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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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영 시인의 시에서는 처절한 절망의 소리가 들린다. 시에서 괴물들이 등장하고, 잘려지는 신체들이 나오는 등 마치 지옥도를 보는 듯 기괴하다.

그 중 ‘혈관을 꽂아 넣는 슬픔’의 시는 그 절망감을 가장 절절하게 드러낸다. 절망으로 가득 찬 감정적인 존재가 말한다. “발가벗고 팔을 날개처럼 퍼덕이는 천사가 되어 불타버리고 싶어 하는 아이” 우리는 이러한 것과 같다고. 그 다음 가장 이성적인 존재가 대답한다. 이렇게 만든 게 룰이라고. 그러면 “증발하는 방법이 없습니까?” 하고 여기서 구원받을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까? 하는 감성적인 존재의 절망적인 질문에, 가장 이성적인 존재는 말한다. 그것이 룰입니다 라고. 그만큼 절망적인 세상. 시인은 이렇게 외치는 것 같다. 나는 세상에 왜 태어났습니까? 여기에 무슨 희망이 있다고... 하고 부르짖는다. 그러나 그 부르짖음에 세상은 냉혹할 만큼 고요하다.


 시인은 그러한 절망 속에서 사랑을 외친다. 사랑이 자신을 구원한다고 믿고자 한다. 그래서 ‘가련한 사전’ 이란 시에서 이런 구절이 나온다. “오늘 밤에도 빌딩 꼭대기에 가서 외친다 사랑한다고” 시인은 사랑에서 희망을 보는 걸까?

보통 희망은 하늘을 나는 이미지를 상상한다. 이상의 ‘날개’도 절망스런 세상에서 벗어나고자 날자 날자 하며 희망을 노래하지 않았는가. 이 시에도 날개짓으로 하늘을 날아보려고 한다. 그러나 그러한 희망도 절망으로 변하여 ‘사랑은 반항하는 새와 같아서’ 에서는 “허공이 무덤이고 그 무덤이 바람인 지난밤 꿈에 대해 이야기하던 저들은 꿈에서 깨어났을 때의 막막함은 차마 말하지 못하고 날개를 접고 흩어진다” 라고 말한다. 그리고 하늘을 나는 것은 날개 뼈가 부러지는 고통스러운 것이라고 말한다. 사랑이 구원하리라는 희망도 꺾여버리고 결국 절망만이 남았다. 그 속에서 희망을 꿈꾸며 날아갈 수 있을까.


 사람은 어두움, 절망보다 밝음, 희망을 추구한다. 그래서 자기 계발을 하거나 아니면 종교를 믿거나 한다. 문학도 대부분 희망을 이야기 한다. 사람들은 그 속에서 감동을 얻고 살아갈 힘을 얻는다. 그런데 정영 시인의 시는 희망보다는 절망만 보이고 감동보다는 허무가 느껴진다. 나는 이 시에서 무엇을 바라봐야 할까. 나는 이 시집에서 처절함이라는 진흙 속에 묻혀있는 진주 같은 아름다움을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랑은 반항하는 새와 같아서’에서 이런 구절이 나온다. “집으로 돌아오는 더러운 길목엔 내가 이 생에서 보지 못한 처음 보는 깃털 하나” 처절한 상황 속에서 놓인 작은 깃털 하나. 이것은 너무나 간절하고 아름다운 작은 구원과도 같다. 처절한 상황 속에서만 볼 수 있는 강렬하게 빛나는 그 아름다움. 이 시를 통해 그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다.


 앞으로 이 시인의 작품이 기대된다. 절망 속에서 아름다움은 더욱 더 강렬하게 보여질 것이기에. 강렬한 이미지와 절망에서 울리는 강한 외침이 매력적이다. 다만, 필터링이 없는 직설적인 시어들은 부담스럽다. 시 중 ‘생일 파티’라는 시가 그랬다. “여기 태어난 나를 어르고 달래는 극악한 찬미” 라든가 “악마들의 축하 카드가 도착하고 모두가 공감을 표하는 흉측한 박수를 치고 있을 때” 등 너무나 표현이 직설적이다. 물론 다른 시도 그런 면이 몇몇 있었지만, 이 시는 너무나 감정에만 휩쓸려 있어 너무 부담스럽다. 이 점을 조금 유의하면 강렬하고 아름다운 시가 나올 것 같아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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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당나귀 곁에서 창비시선 382
김사인 지음 / 창비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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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사인 시는 발칙한 재미가 있다. 귀족들이 주로 오는 미술전에 신분이 낮은 양치기를 커다랗게 그려 귀족들이 양치기 소녀를 우러러 보게 한 또, 전설 속 영웅이나 귀족만을 그림의 중심에 그렸던 시대에 씨뿌리는 농부를 영웅처럼 그린 밀레의 그림처럼 발칙하다. ‘중국집 전씨’에서는 중국집 전씨가 껌을 따닥따닥 심는 모습을 마치 담배를 물고 있는 배우처럼 표현하는 등 주변에 작은 것을 크고 멋있게 그리는데 이것들이 너무 매력적이다.


 이와 반대로 큰 것들을 우스꽝스럽게 만드는 그 발칙함도 너무 좋다. 국정원, 독재자, 늙음 등을 낄낄거리며 웃을 수 있게 만든다. ‘내곡동 블루스’에서 박정원 최정원 김정원 언어유희로 이름을 주욱 나열하고, ‘미안한 일’에서 화난 사람을 개구리가 고개를 쑥 내밀고 화난 듯 보는 것 같다고 하는 그 유쾌함이 너무 좋다.


 이처럼 실실거리며 볼 수 있지만 그 이면에는 슬픔이 있다. 친구의 죽음, 어머니의 죽음, 가난, 외로움, 부조리, 노인, 노숙자 등 하나하나 무겁고 슬픈 주제다. 이것들을 떠올릴 때면 그 막막함이 그 절절함이 너무 깊어서 글로 그 심정을 쓰기 어렵다. 그렇다고 절절하게 쓰면 그건 또 싫다. 마치 오를 수 없는 산같이 느껴져서 오르기는 커녕 보기도 싫어진다. 그런데 김사인 시는 그런 절절함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야트막한 언덕과 같다. 즐겁다. 이는 ‘둥근 등’시에 나온 구절처럼 그 쓸쓸한 마음은 안으로 품고 밖에는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소재를 사용했기에 그런 것 같다. ‘바보사막’이라는 시에서는 친구의 죽음을 하늘 영감과 장기 한판 간 것이라 말하고, ‘고비사막 어머니’에서는 떼쓰는 아이처럼 엄마 오늘 저녁에는 돌아오세요 콩국수 좀 만들어주세요 말하고, ‘바짝 붙어서다’에서는 폐지를 모으는 할머니가 승용차로 벽에 붙어서는 모습으로 말한다. 하나하나 쉽다. 재밌다.

 그러나 모든 시가 이렇지는 않다. 중간에 담담하게 말하는 시들이 있는데, 시집 전체 구성으로 봤을 때 긴장감을 준다. ‘불길한 저녁’이나 ‘공포의 일기장’같은 시가 그러하다.


 김사인 시인의 “어린 당나귀 곁에서”를 한마디로 말한다면, 둥근 등과 같다고 말하고 싶다. ‘둥근 등’ 시에 이런 구절이 있다. “순한 등 그 등에서는 어린 새도 다치지 않는다 감도 떨어져 터지지 않고 도르르 구른다 남모르게 따뜻한 등 업혀 자부럽고 싶은 등 쓸쓸한 마음은 안으로 품고 세상 쪽으로는 순한 언덕을 내어놓고” 이런 구절처럼 그의 시를 읽고 있으면 따뜻하고 포근한 느낌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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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과 오크 문학과지성 시인선 464
송승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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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승언 시인의 시집은 있었음과 없었음 사이의 시편이 많다. 1부에서는 나의 생각(있음)과 현실(없음)과의 괴리를 노래하였고, 2부에서는 있음과 없음 사이에서의 몸부림을 노래하고, 3부에서는 있었음 또는 없었음의 희망과 절망에 대해서 썼다.


 1부에서 ‘모든 것을 볼 수 있었다’에 “오랜만에 공원에 갔어 다듬어진 길을 따라 걸으며 자주 보던 금잔화를 보려고 했지 그런데 그곳에 금잔화는 없었다”로 시작으로 사철나무, 주인 없는 개, 정자, 안개 등 생각 속에서 흐릿하게나마 공원에 존재하던 것들이 실제로는 없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모든 것이 흐린 공원이었는데 모든 것이 너무나 뚜렷이 잘 보인다” 라는 말을 나의 상상 속에서 흐릿하게 있었던 것들이 현실에는 없었다는 것을 잘 알게 되었다 라는 말로 볼 수도 있겠고 또는, 아무것도 없는 공원을 보고 내가 인식했던 공원이 상상이였음을 명확히 알게 되었다고 해석할 수 있겠다. ‘굴’에서는 명자라는 타자가 나오는데, 이것저것 이야기를 나누는 내용 끝에 마지막에 “몇 호실이니? 묻는데 대답이 없고 묻는 사람이 없다 정원에는 죽은 개미 떼 주인 잃은 작은 굴들” 말을 통해 있었다고 생각한 것들이 현실에서는 없었다는 것을 알게됐을 때의 허망함을 표현하였다. 이 허망함은 상상뿐 아니라 그 존재까지도 확장할 수 있을 것 같다. 즉, 자신이 존재한다고 믿지만 어쩌면 현실에는 자신이 없는 존재가 아닐까 하는 두려움을 시인이 인식했던 순간을 쓴 것이라 생각한다.


 2부에 ‘백조공원’ 에는 밝은 빛이 드는 공원에서 의미없이 걷는 사람들이 공원 중심의 순백의 백조 조각상 날개 그늘에 모여 서로간의 의미를 만드는 이야기가 나온다. “모여드는 사람들 펼친 날개의 그늘 아래 모두 만났다 서로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손 내민다 차가운 손을 너의 추위를 이해하거나 온기에 놀라기 위해” 빛으로 가득한 공간은 어쩌면 어둠으로 가득한 공간처럼 허공일지도 모른다. 그 속에서는 없음 만이 존재한다. 그런데 그늘이 생기고 그 밑에서 서로간의 얼굴을 확인하고 자신들이 있음을 인지한다. 다른 시편도 있음과 없음이 다른 단어들로 표현된다. ‘새와 드릴과 마리사’에서는 죽은 새(없음)와 살아 있는 새(있음)로, ‘공화국’에서는 밤(없음)과 불(있음)을, ‘철과 오크’에서는 침묵(없음)과 횃불(있음)을, ‘많은 손을 잡고’에서는 어둠(없음)과 손의 감각(있음)으로 다양한 단어들로 변주한다. ‘변검술사’에서 “펜다 잎사귀에 광선이 모인다 둥근 어둠, 이것은 유일한 합의점”이란 말을 통해 어둠이 가득한 허공 속에서 작은 횃불같이 있음을 인지할 수 있는 작은 공간을 시인은 구원이자 희망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이는 1부에서의 느꼈던 괴리감과 허망함을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마지막 3부에서 ‘재앙’에서 “건물은 타들어간다 안에 사람이 있다고 너는 말한다 우리는 너의 말을 믿는다 불 속으로 뛰어들 수는 없지만 뛰어들려는 너를 막는다 생명을 구해라 너는 말하고 우리는 말하지 않는다 (중략) 다행히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럴 리 없다고, 네가 말한다” 말에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자신이 부정당하는 것이 재앙이라고 말한다. ‘나타샤’에서도 “나는 구출당합니다 창백한 어둠이 하나의 원으로 수렴되는 과정”이라는 말과 동시에 “의아한 표정으로 나는 끌려 나옵니다 나는 몇 개의 광물을 잃습니다” 라는 희망과 절망이 서로 나열된 것을 볼 수 있다. ‘재앙’에서는 사람들이 자신의 말을 믿는 장면에서 어둠 속에 불은 희망이 되었지만, 그것을 완전히 신뢰하지 않고 부정하는 사람들을 보며 절망하는 모습이 나열되어있고, ‘나타샤’에서는 어둠 속에서 빛으로 구출되는 희망과 자신이 갖고 있던 광물이 알고보니 쓸모없는 돌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절망 두 가지가 나열되어 있다. 이를 보면 2부에서 말한 없음에서 있음을 알게 해주는 것들이 시인에게 자신이 있음을 알려주는 희망이기도 하지만 다시금 없음을 두려워하거나 아무것도 아닌 자신을 알지도 모르는 절망이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송승언은 이번 시편에서 철학에서 말하는 부조리 즉, 현실과 생각과의 괴리를 노래하고자 한 것이 아닐까. 그래서 시편들이 쉽고 단순하게 보이지만, 쉽게 이해되기 수 어려웠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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