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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내가 보고 괴로워하는 것이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보이는 건 암흑뿐이다
자연은 내게 회의와 불안의 씨만 제공한다
신을 나타내는 어떤 것도 보이지 않는다면 
나는 부정으로 마음을 정할 것이다
허나 부정하긴 너무 많이 
확신하긴 너무 적게 보니
나는 개탄할 상태에 있다
만약 신이 있어 자연을 뒷받침하고 있다면 
자연이 신을 명확히 드러내주거나 
자연이 보여주는 표적이 거짓이라면 그것들을 깨끗이 지워버리기를
어느 편을 택할지 알 수 있도록 자연이 모든 걸 말하거나
아무 말도 하지 않기를
내가 놓여있는 상태에서 내가 뭔지, 
뭘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나는 나의 신분도 의미도 모른다
내 마음은 진정한 선을… 그것을 따르기를 온전히 바란다
영원을 위해서라면 
어떤 것도 비싸지 않다"

- 팡세, '파스칼' 中 - 



"원한다면 우리는 행복 없이 지낼 수 있다. 
우리는 행복을 기대한다. 
만약 행복이 안 온다면 희망은 지속되며 
환영의 매력은 그것을 준 열정만큼 지속된다.
이 상태는 자체로서 충족되며 그 근심에서 나온 일종의 쾌락은
현실을 보완하고 더 낫게 만들기도 한다. 원할 게 없는 자에게 화 있으라
그는 가진 것을 모두 잃는다. 원하던 것을 얻고 나면 덜 기쁜 법. 
행복해지기 전까지만 행복할 뿐 "

- 알랭, '행복론' 中 - 


 쥘리는 지난 열정을 회상하지. 생프뢰와 못 이룬 열정을 그와 함께할 행복을 희망하다가 희망 자체로 행복해진 거야. 꿈을 현실로 대체함으로써 만족할 수 있었으니까.
 "이 상태는 그 자체로서 충족되며" 
 상상력의 힘이란 건 그런 거지. 상상력은 순전히 정신적인 쾌락을 통해 사랑하는 이의 부재를 상쇄하는데, 일면 비현실적이지만 그래도 효과는 있어. 쥘리의 경우 루소 자신 같은 경우처럼 상상력이 풍부한 이들에게는 이러한 가상적 만족이 진정한 위안을 주고 그 위안은 관능적 쾌락을 보충하고 대체하는 거야.

                                                                                           

 - 강의하는 장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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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국보다 낯선을 보고.

 

 너에게 천국은 어떤 곳일까. 나에겐 숲이나 도서관, 친한 사람들 사이가 작은 천국이다. 이곳에 있으면 마음이 평온하고 든든하다. 또, 이곳에 있으면 생각지 못한 새로운 것들이 나와서 나를 즐겁게 한다. 덕분에 이야기가 끊이지 않는다. 즉, 나에게 천국은 평온하게 있을 수 있고 새로운 것들을 발견할 수 있는 곳이다. 그렇다면 이곳들이 더 이상 나에게 평온을 주지 않고 새로운 것들도 나오지 않는다면? 계속 불안하고 똑같은 것들만 반복해야 한다면? 마치 카뮈의 시시포스의 신화처럼.

 

 신세계. 헝가리 출신 이민자 에바에게 미국은 천국이었을까? 에바는 먼저 이민 온 친척 윌리에게 미국인의 일상을 배운다. TV로 풋볼 경기를 시청하고 인스턴트 식품을 먹고 카드 게임을 하고 원피스를 입는다. 열흘간 윌리와 함께 미국에서 적응하는 과정에서 에바는 작게나마 웃는다. 이때만큼은 그녀에게 미국은 천국이었을지도 모르겠다.

 1년이 지나고. 그녀는 클리블랜드에서 핫도그 가게에서 일하고 남자친구와 사귀고 있다. 미국에서 완전히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녀는 웃지 않는다. 어느 날 예상치 못한 윌리와 에디의 방문에 그들을 반기며 활짝 웃는다. 그러나 다시 반복되는 똑같은 일상. 경치가 아름답다는 클리블랜드의 호수는 안개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플로리다의 아름다운 해변에 가면 좋겠다고 이야기한다. 에바는 떠나는 윌리와 에디에게 플로리다로 가게 되면 자신을 이곳에서 꺼내 달라고 말한다.

 천국. 그녀는 그들과 함께 플로리다로 떠난다. 출발할 때는 차 안에서 ‘I put a spell you’ 음악과 함께 에바는 그들과 함께 웃는다. 새로운 곳을 간다는 설렘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플로리다의 바다는 에바에게 웃음을 주지 않는다. 해변에서 에디는 말한다.

 

 “여긴 처음인데 똑같은 것 같아.”

 

 결국 그들은 호텔에만 머문다. 권태로워진 윌리와 에디는 잠든 에바를 두고 도박을 하러 간다. 잠에서 깬 그녀는 자신을 두고 떠난 둘에게 크게 분노하고 자신도 밖을 나선다. 플로리다 해변을 쓸쓸히 걷는 중, 그녀는 우연히 돈을 얻게 된다. 그리고 공항으로 향한다. 항공편은 그녀가 이전에 살았던 헝가리 외에도 파리 같은 완전히 새로운 장소들로 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선택한 건 헝가리(그녀는 이 표를 샀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녀를 찾으러 온 윌 리가 직원 말을 듣고 그 비행기를 탔을 테니). 그러나 그녀는 다시 플로리다의 호텔로 돌아온다. 그리고 의자에 축 늘어져서 무심한 표정으로 카메라를 빤히 보다 영화는 끝이 난다. 그녀의 표정은 어딜 가든 여기와 똑같을 거라고 말하고자 했던 게 아니었을까. 그래서 이제는 떠나기를 포기하고 그저 머무른 것이 아닐까.


너에게 천국은 어떤 곳일까. 나에게 천국은 숲과 도서관 같은 장소와 친한 사람들 사이, 즉 관계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너의 말대로 이 공간과 관계가 평온하지 않고 새롭지 않다면? 이것들도 천국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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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긴 여름의 너구리
한은형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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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한국의 소설을 읽기 두려워한다. 편견인지는 모르겠지만, 한국의 소설은 막막하고 두려워서 외면하고 있는 현실들을 앞에 들이대며 똑바로 바라보라고 말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래서 한국의 소설을 보기 전에는 마음 준비를 해야하거나, 보지 않게 된다. 결국은 한국 소설이 아닌 부담없는 일본이나 독일 소설을 읽게 된다. 좋은 마음은 아니지만, 소설에서나마 현실은 조금 잊고 싶다. 현실 속에서 치열하게 살고 돌아왔는데, 더 막막한 현실을 보라는건.... (한숨)

 어쨌든 한은형 작가로 돌아오면, 재밌게 읽었다. 그 중 샌프란시스코 사우나가 가장 좋았다. 마치 좋은 꿈을 꾸고 깬 듯한 기분 좋은 여운을 준다. 다른 작품들도 일상 속에서 잠시 다른 세계에 온 것만 같다. 그레이하운드가 된 남자친구, 꼽추, 마스터베이션을 묘사해달라는 남자, 연인형 로봇 등 등장인물이 묘하거나, 아니면 한 사람의 인생이 마치 꿈처럼 느껴지게 한다.  

 그래도 현실에 기반한 꿈은 현실을 보는 시선이 있어야 하기 마련인데, 한은형 작가는 현대 사회를 마스터베이션으로 설명하려 한 것 같다. 꼽추 미카엘의 일광욕, 어느 긴 여름의 너구리에서 돈을 줄테니 마스터베이션 하는 장면을 보여달라고 하는 것이나 자신이 마스터베이션 하는 장면을 묘사해 달라고 하는 모습에서 작가가 바라보는 현실이 무엇일까 생각하게 된다. 자본주의, 권태, 자기도취 등 다양하게 생각해보았는데, 아직 정리가 되지 않는다. 해설에서는 꿈과 같은 부분에 집중해서 설명해주셨는데, 이 부분도 다뤄주면 좋았을 텐데 아쉬움이 든다. 

 뭐 좋다. 잠시 꿈을 꾸듯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까. 그리고 꿈에서 깨면 꿈이 무슨 뜻이 있는 걸까 고민도 하고. 마지막은 내가 왜 샌프란시스코 사우나가 가장 좋았는지 보여주는 구절을 쓰고 이 글을 마무리해야겠다.

그녀는 신호등을 대신해 거기에 있었다. 호루라기를 불 때면 오른쪽 뺨에 보조개가 팼다. 그러다 목덜미에 흘러내린 땀을 닦을 때, 한숨을 내쉴 때, 눈물을 참을 때, 나는 사랑에 빠졌다. 빠졌던 것 같다. 슬로모션으로 촬영된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그녀가 뻣뻣해진 고개를 양옆으로 기울일 때 내 시간도 그녀에게로 기울었다. 그녀는 거리에서 시를 쓰고 있었다. 순간마다 완벽하게 사라지고 완벽하게 창조되는, 그래서 완벽한 시. 우리는 동료였다. 애정은 세계를 이해할 수 있게 한다. 나는 회전교차로와 공산주의와 시인의 역할과 사랑에 대해 이해했다. 사랑은 무언가 부족할수록 생겨나는 것 같았다. 나는 없는 게 많았다. 현실감도, 책임감도, 준법정신도, 자부심도, 열등감도 없었다. 그런 면에서 나는 꽤 괜찮은 시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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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세로 가는 길
정여울 지음, 이승원 사진 / arte(아르테)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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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디자인, 멋진 사진들, 헤세의 살았던 곳과 헤세의 책 속 세상을 여행하며 적은 좋은 글, 좋은 책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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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지성 시인선 465
원구식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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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구식 시인의 시집 비를 읽으면서 발상이 재밌는 시가 많다고 생각했다. ‘비’에서 “한없이 낮은 곳으로 흐르기 위해, 물은 자신의 몸을 아낌없이 증발시켜 하늘에 이르렀는데 그 이유가 순전히 허공을 날기 위해서였음을 너무나 뻐저리게 알게 된 것이다. 바위가 부서져 모래가 되는 이유, 부서진 모래가 먼지가 되는 이유, 비로소 모든 존재의 이유를 이해하게 된 것이다.”를 인상깊게 느꼈다. 이과생인 나는 화학 시간에 바위가 먼지로 변해가는 이유를 엔트로피 법칙 즉, 자연이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변하려고 하기 때문이라고 배웠다. 생물학에서는 자연물들이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과 반대로 복잡한 형태로 생성된 이유를 알려주었는데, 그것은 그것이 생존에 유리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과학의 대답은 너무나 서글펐다. 결국에는 엔트로피 법칙에 따라 모든 것이 흩어져버릴 세계 속에서 꿋꿋이 살아가려고 하는 이유가 겨우 생존에 유리해서라니. 그런데 시인은 재밌는 답을 내려준다. 순전히 허공을 날기 위해서였다고. 엔트로피 법칙 속에서 꿋꿋이 살아가려는 이유는 날기 위해서라고. 멋진 대답이다. 이외에도 ‘눈길’이나 ‘삼겹살을 뒤집는다는 것은’, ‘어느 승냥이의 변기’, ‘멸치’ 등 재밌는 시가 많았다.


 물론 아쉬운 점도 있었다. 발상이 좋을지 모르지만 그것이 시인 혼자만의 감탄으로 끝난 시들이 그렇다. ‘분노의 맛’, ‘악의 기원’, ‘학질’ 등이 그렇다고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이것들이 추상적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악의 기원’에서 밤의 숲, 절대적인 밤의 포식자, 숲의 왕 바람, 물의 정액, 밤의 숲 사이로 걸어 나오는 인간 등 대략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는 알겠지만 추상적이어서 재미가 없다. 내가 재밌게 읽은 시들을 보면 눈길, 삼겹살을 뒤집는 것이나 낡은 변기 등 눈에 보이는 사물을 보며 시인의 발상을 이야기하기에 감탄하고 재밌어 했는데, 위 시들은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도 않기에 재미가 없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원구식 시인의 시집을 재밌게 읽었다. 유려한 표현이 있다거나 형식미가 뛰어나거나 하지는 않음에도 발상으로도 재밌게 시를 쓸 수 있구나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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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5-05-17 07: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고 싶어지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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