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틴어 수업 - 지적이고 아름다운 삶을 위한
한동일 지음 / 흐름출판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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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어하면 둘둘 말린 양피지 종이에 깃털 펜촉으로 무언가를 써내려가는 로마 귀족이 떠오른다. 이 때 글씨는 반드시 필기체여야 하고 그는 흔들거리는 불빛 아래서 황급히 전할 메시지를 쓰는 중이다. 어쩌면 영화 속의 한 장면이었는지도 모를 이 장면이 비록 영어였지만 한때 필기체를 열심히 연습하던 학창시절의 기억과도 맞물린다. 지금까지 그런 고상하고 품위 있는 감각만 남고 실체는 한번도 접해 보지 못한 라틴어. 고대 로마와 역사를 함께한 라틴어는 수많은 언어의 뿌리로만 남아있을 뿐, 로마의 영광처럼 이제는 사라진 언어다.   


<라틴어 수업>은 무려 바티칸 대법원 변호사이자, 신학, 법학, 철학, 언어를 두루 공부한 학자이자, 대학교 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한동일 교수가 서강대학교에서 했던 라틴어 강의를 정리하여 펴낸 책이다. 제목만 들어보면 노잼의 향기가 물씬 나는데도 2017년에 처음 출판되어 41번이나 인쇄기를 돌릴 정도로 이 책이 베스트셀러인 이유는 무엇일까? 이제는 없어진 언어에 대해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라틴어와 아름다운 삶은 무슨 관계가 있지? 온갖 의심과 의혹을 거두지 못한 채로 책을 펼졌는데아뿔사아무래도 진짜를 만난 것 같다.


  책장을 넘길 때 마다 예고없이 울컥거리는 감정들을 수시로 달래야 했다. 신을 믿지도 않는 주제에 고해성사를 하는 기분이 되었다. 머리 속에 수없이 많은 고뇌와 절망과 고통의 순간들이 필름처럼 지나가는 동안 마음은 이미 통제 불능에 빠져 버리기도 했다. 이 책이 주는 위로는 생각보다 묵직했고 깊은 곳을 건드렸다. 다행히 아이들은 잠들어 있었고 난 눈가를 훔칠 생각도 잊고 식탁등에 의지한 채 꾸역꾸역 그러나 또박또박 이 책을 읽어나갔다.

 



아지랑이라는 단어가 억겁의 시간 속에서 형성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며 쉽게 포기하지 말고 시시때때로 그렇게 우리 마음을 보아야 합니다.

, 이제 봄날의 아지랑이를 보러 운동장으로 나가십시오. 공부한다는 것, 살아간다는 것은 우리 마음속의 아지랑이를 보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 단어가 원래 의미하는 대로 보잘 것 없는 것’, ’허풍과 같은 마음의 현상도 들여다 보길 바랍니다.

이것은 힘들기는 하지만 꼭 필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p.35

 



실제 강의를 하듯 쓰여진 문체는 때때로 나를 어느 봄날의 강의실로 데려다 놓았다. 칠판에는 라틴어 문장이 씌여있고 고지식하게 생긴 교수님은 조근조근한 말투로 언어 보다는 종교를, 종교보다는 철학을, 철학보다는 본인의 삶을 들여다보라고 말씀하신다. 그 모든 학문들이 결국은 라는 한 우주를 가르키고 있다고, 나가서 운동장의 아지랑이를 보라고, 그 속에서 나를 찾으라고, 꼭 그렇게 하라고 첫 수업은 언제나 휴강인 <라틴어 수업>. 만약 내가 어렸을 때 이런 이야기를 해주는 스승을 만났더라면, 어학점수에 연연해 있는 우리를 향해 네가 어디로 가고 싶은지 알고 있느냐고 물어주는 어른이 있었더라면 내 인생이 조금은 달라졌을까?

 



책장 사이사이 빼곡하게 붙인 메모를 주르륵 훓어 읽어보면 누군가는 했던 이야기고 인문학 서적을 통해 흔히 마주칠 수 있는 그런 문장인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라틴어 수업> 이 책의 울림이 남다른 이유는 언어에 담겨 있는 시간의 무게 때문은 아닐까 싶다. 오랜 시간을 지나는 동안 정제되고 추려진 삶의 정수들이 저자만의 통찰과 선한 영향력을 거쳐 지금 시대의 사람들을 감동시킨다. 하나의 문장이 대중에게 위로와 감동으로 다가 오기까지 그가 기울였을 학문적 노력은 순수한 욕망 그 이상의 것이었으리라. 말로 잘 설명할 수는 없지만 생각보다 내 마음 상태가 나빴고 이 책은 생각 이상으로 위로가 되었다는 것만은 사실이다.

 



무엇보다 제가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타인의 객관적인 평가가 숨마 쿰 라우데(최우등)라고 하지 않아도 우리는 숨마 쿰 라우데라는 존재감으로 공부해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스스로 낮추지 않아도 세상은 여러 모로 우리를 위축되게 하고 보잘 것 없게 만드니까요. 그런 가운데 우리 자신마저 스스로를 보잘 것 없는 존재로 대한다면 어느 누가 나를 존중해주겠습니까?

우리는 이미 스스로에, 또 무언가에 숨마 쿰 라우데입니다.

p.74

 


새해부터 좋은 책과 인연이 닿는다는 것은 좋은 징조다. 그렇게 오늘의 기쁨을 만끽하는 것이야말로 카르페디엠에 담긴 진정한 삶의 자세 아닐까. 늘 곁에 두고 아껴가며 읽고 싶은 책이다.   

 


 

여러분은 자기 자신의 길을 잃지 않고 잘 가고 있습니까?

그 길을 걸으며 무엇을 생각합니까?

그 길 위에서 지치지 않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 길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p.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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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해줘 카카오프렌즈 과학 2 - 초등과학 교과서를 통째로 넣은 교과 연계 만화 구해줘 카카오프렌즈 과학 2
박영희 외 지음, 도니패밀리 그림 / 메가스터디북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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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 초등학생 덕분에 학습만화를 여럿 접해봤지만 카카오 프렌즈 시리즈는 처음이다. <구해줘 카카오 프렌즈 - 과학2>의 가장 특징적인 점이라면 캐릭터가 워낙 익숙한 탓에 책 내용 속에서 자주쓰던 이모티콘 표정이라도 만나면 너무 친근하고 재미있다는 점이랄까? 원래는 어피치를 가장 좋아했지만 이 책을 읽고 나니 왠지 제이지가 너무 좋아진다. 분량은 많지 않지만 감초 같은 역할로 어렵게만 느껴지는 과학실험도 킥킥거리며 접근할 수 있게 해준다.  


실험실에서 일어난 사고로 작아진 사이다쌤. 사이다쌤을 원래대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는 신비의 물약이 필요한데 물약을 얻으려면 카카오 친구들이 힘을 합쳐 18개의 켜져라 전구를 밝혀야만 한다. 켜져라 전구를 얻을 수 있는 장소는 4곳인데, ‘화학과 물질’, ‘다양한 생물’, ‘물리와 에너지’, ‘지구와 우주로 나누어져 있다. 초반에 실린 과학 교과 연계표를 보면 실제 5~6학년들의 교과서 공부에 직접적인 도움을 줄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는 것 같다.

 

 

 

과학 교과서를 통째로 넣은 교과 연계 만화라는 타이틀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이 책은 교과내용에 매우 충실히 만들어졌다는 느낌이다. 용어 설명이라던지, 실험 과정에 대한 설명, 풍부한 실험 자료 등 교과서에서 다루는 핵심 개념들을 빼놓지 않고 다루려는 노력이 곳곳에 잘 발휘되어 있다. (아마 수십년 전에 배웠던 것으로 기억되는 실험이 똑같이 나와 있어서 깜짝 놀라기도 했다.) 만화 스토리에 필요한 배경은 초반과 후반에 최소한으로 다루고 그 후로는 쭈욱 교과 내용만 설명하는 방식으로 스토리와 학습내용을 확실히 구분해 놓은 점도 이 책이 얼마나 학습적인 부분에 신경을 썼는지 알 수 있게 해준다.


아이는 생물 분야에 가장 흥미를 보였는데, 당장 꽃을 구해 세로로 잘라보자고 졸라대는 통에 난감하기도 했다. 한번도 직접 경험한 적이 없는 실험도구(삼각 플라스크나, 비커, 스포이드 등)들도 무척 흥미로워 했고, 카카오 친구들이 내는 퀴즈의 정답을 맞추기 위해 한참을 끙끙대기도 했다. 아직 초등학교 저학년에게는 어려운 내용들이지만 카카오 친구들과 함께 하니 그럭저럭 읽어 낼만 했다는 것이 솔직한 소감이다. 고학년 친구들이라면 아마 교과서 보다도 훨씬 재미있게 읽어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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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린 미트 - 인간과 동물 모두를 구할 대담한 식량 혁명
폴 샤피로 지음, 이진구 옮김 / 흐름출판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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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과학분야의 책들은 가뜩이나 불안도가 높은 나를 동요시킨다. 이건 이래서 문제, 저건 저래서 문제, 과학적이고 이성적인 문체로 조목조목 따지고 드니 당장이라도 하늘이 무너질 것만 같은 불안함이 엄습한다. 그러면 세상은 온통 문제 투성이인 것 같고 난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부당해서 못견디겠는 거다. 굳이 나의 편독에 대한 변명을 하자면 그렇다. 그런 내가 <클린 미트>라는 제목의 책을 읽고 있다. 생소한데다 매우 비문학적이기까지한 이 단어의 조합을 이해하기 위해 다소간의 모험심이 발휘된다.

 

 

나는 고기를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일주일에 한 두번은 고기를 사야 마음이 편한 주부이자, 육즙 가득한 고기를 한입 베어무는 데서 오는 풍만감을 삶의 낙으로 삼는 소시민이다. 그런데 이 책을 펼치자마자 그런 삶의 원초적인 쾌락 앞에서 비인간적인 공장식 축사와, 항생제 범벅의 사료, 어마어마한 온실가스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단 한번도 없다는 사실이 죄를 지은 것 마냥 뜨끔하다. 동물권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더라도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현실이었다. 하지만 이 책이 그런 현실에 대한 고발만으로 끝났다면 너무 암울해서 아마 끝까지 읽어내지 못했을 것이다. <클린 미트>는 공장에서 태어나 공장에서 죽는 동물 대신 고기를 키우자고 외치는 책이다. 온갖 비능률적이고 비윤리적인 사육을 중단하고 환경도, 동물도, 사람도 윈윈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다. 아니 스테이크를 키운다니, 대체 어떻게?

 


공장식 사육은 투자자에게 큰 위험 요소다. 공장식 사육에는 인간의 건강, 기후변화, 식품 안보, 지구의 자원과 관련된 네가지 불편한 진실이 숨어 있으며, 이는 [묵시록]에 등장하는 말을 탄 네 명의 기사에 버금간다. 공장식 사육은 신선한 물을 고갈시키고 항생제를 과잉 소비하게 하고, 삼림 파괴를 주도하며, 사람들을 먹이는 효과적인 방법도 아니다. 가축에 들어가는 곡물은 인간의 수요를 뛰어넘으며 우리는 이 광기를 멈춰야 한다.

 

p.166

 

 

<클린 미트>의 저자 폴 샤피로는 미국 동물 보호협회의 대변인이자 부회장으로 여러해 활동해 온 사회운동가이다. 아울러, 단백질 배양 조직으로 키운 고기, ‘청정 고기(클린 미트)’를 세계 최초로 시식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전세계 인류가 직면한 환경오염과 식량 부족의 문제를 심각하게 직시하고 그 해결 방법을 찾기 위해 지속 가능한 식품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다 시험관에서 배양하는 고기를 접하게 되었는데 주로 의료용으로 사용되던 생명공학 기술을 식품에 적용하는 획기적인 아이디어가 나오면서 본격적으로 청정 고기가 개발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실제로 햄버거 패티를 만들어 내는데 성공했다. 맛도 고기에 가깝다는 평이다. 만약 청정 고기가 상용화 된다면 넓은 경작지와 공장식 축사가 사라질 것이고, 온실가스와 폐수 같은 기후 변화와 환경 문제, 고기를 만드는 과정에서의 자원 낭비, 전염병등의 문제도 해소될 것이다.     

 


 

물론 장미빛 미래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가장 중요한 상용화의 문제가 남았다. 두꺼운 육질의 고기를 만들 수 없는 기술적인 한계, 10배 이상 높은 생산 단가, 국가적인 윤리적 규제, GMO식품에서 한차례 겪었던 소비자의 거부감등 넘어야 할 산은 아직 많다. 하지만 청정 고기가 중요한 사회문제에 대한 어떤 대안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이 너무 다행스러웠다. 해결이 어려운 문제일수록 대안은 많은 것이 좋지 않은가. 고래기름에서 등유, 석유, 전기로까지 혁신을 거듭해온 에너지의 발전 과정을 생각해 보면 세상을 바꾸는 혁신적인 하나의 방법으로써 어쩌면 너무 먼 미래의 이야기는 아닐 지도 모른다.

 

 


 

저는 고기의 대체재를 찾는 모든 노력이 의미 있는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환경적, 도덕적, 윤리적 이유로 우리는 어떤 형태로든 소비를 줄여야 할테니까요.

p.40

 

 

이 책을 읽고 고기가 먹기 싫어지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기우였다. 고기는 여전히 맛있다. 저자는 식물성 고기로 절대 만족할 수 없는 현대인들의 욕구를 정확히 간파했다. 그래서 청정 고기를 지지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이 소설 같은 다큐멘터리가 현실이 되었을 때, 우리가 사는 세상은 정말 더 나아져 있을까? 고기를 키우는 일로 인간과 동물이 행복하게 공존하는 일이 가능하게 될까? 전혀 모르던 이과적 세상에서 던져진 화두가 자꾸 문과적 질문으로 변질되는 것을 보니 편독의 한계가 너무도 뼈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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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빛나고 있어요 웅진 모두의 그림책 19
에런 베커 지음, 루시드 폴 옮김 / 웅진주니어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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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에게 선물하고 싶은 책을 만났다. 책은 더 이상 읽는게 아니라 경험하는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멋진 책이다. <당신은 빛나고 있어요>는 환상적인 이야기로 유명한 에런 베커의 신작이다. 개인적으로 그가 매번 어떤 식으로든 변화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무척이나 좋아하는 작가다. 유명한 상(칼데콧) 하나쯤 받았으면 안주하고 싶어질 만도 할텐데 그는 이렇게 놀라운 책을 또 우리 앞에 내놓았다. (게다가 루시드폴의 번역이라니 한층 더 몽환적이다.) 그가 빛으로 부리는 마법에 흠뻑 빠져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여름날의 오후가 지나간다.

 

 

<당신은 빛나고 있어요
>라는 제목을 보면서 작가는 작정하고 우리를 위로할 셈인가보다 하는 생각도 들었다. 당연히 우리 스스로가 얼마나 귀한 존재 인지 일깨워 주는 그런 책일 것이라는 예상을 했다. 하지만 책을 천천히 넘겨 보는 동안 생각이 좀 달라졌다. 그가 책 속에 담은 빛은 온 우주의 것이었다. 얼마나 많은 빛이 나를, 이 우주를 아름답게 보듬고 있는 걸까 하는 생각에서 한참을 헤어나오지 못했다. 크게는 새벽을 깨우는 빛과 밤을 불러오는 빛, 대지와 하늘을 아우르는 빛에서부터 작게는 작은 나뭇잎 한 장과 꿈틀거리는 곤충 한 마리에서 나오는 빛까지, 그 모든 빛들이 눈으로 느껴지는 듯한 기묘하면서도 환상적인 경험이었다.

 

 

평소에 내가 이렇게나 많은 빛에 둘러싸여 있다는 생각을 한번이라도 해본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마음이 동요했다. 이 우주의 아름다움에 눈과 귀를 기울이는 일은 곧 라는 빛이 어떻게 빛나고 있는지 아는 일이기도 했다. 모든 존재는 빛에서 태어난다는 에런 베커의 말을 빌어 내가 속한 세상도, 나도 눈부신 빛으로 존재한다고 믿고 싶다. 뭐든지 과한 세상 속에서 내 빛이 자꾸 꺼져가는 기분이 들 때, 한번씩 꺼내서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어느 누구에게도 그런 순간은 오니까

 


 
  얼마 전, 아이들의 방학을 핑계 삼아 친정에 다녀왔다. 하늘은 구름 한점 없이 파랗고, 공기는 더웠고, 녹색 식물들은 끝도 없이 줄기를 피웠다. 정원에서 물을 주던 큰 아이가 물 호스를 낑낑대며 옮기더니 하늘을 향해 물을 뿌린다. 저 나무는 너무 목이 말라 보인다는 아이의 손가락 끝을 쳐다본다. 봄에 피었다가 지금은 가지만 앙상히 남은 인동덩굴이 아무렇게나 엉켜 있었다. 이렇게 예쁜 생각을 하는 저 아이는 지금 어떤 빛으로 빛나고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시원하게 뿜어지는 물줄기 사이로 작은 무지개가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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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 (하드커버 에디션)
존 그린 지음, 김지원 옮김 / 북폴리오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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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암환자 혹은 시한부의 삶을 대하는 자세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당연하게도 우리는 언제 죽을지 알수 없는 삶을 살고 있으나 그들은 죽음이 목전에 와 있음을 매 순간 경험하며 살아간다. 늘 기대치보다는 짦은 그들의 수명 앞에서 약속이라도 한 듯 슬픔을 느끼고 동정을 하게 되지만 사실은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십대 소녀 헤이즐은 자신을 동정하는 사람들에 질려하지만 달리 도리가 없지 않느냐 변명하고 싶어진다. 우리는 그들의 고통이나 절망의 깊이를 그저 추측할 뿐이니까.

 


<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는 아주 특별하다. ‘시한부라는 소재는 누구에게나 익숙한 신파로 흘러가기 쉽상이지만 이 책은 다르다. 신파 이전에 삶과 죽음, 떠나는 사람과 남는 사람의 시간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질척거리는 슬픔이 아니라 먹먹한 여운이 길다. 슬픔이라기 보다는 감동에 가까운 감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예상 범위 안의 진부한 신파를 철저히 배반한 멋진 이야기 한편이 여기에 있다.

 


p.21

?”

내가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왜 그런 식으로 날 쳐다보는데?”

어거스터스가 반쯤 미소 지었다.

왜냐하면 네가 예쁘니까. 난 예쁜 사람들을 보는 게 취미인데, 얼마전부터 삶의 단순한 기쁨을 부정하지 않겠다고 결심했거든.”

  


아직 죽음을 이야기 하기엔 너무 이른 16살 헤이즐. 갑상선 암이 폐로 전이되어 줄곧 산소통을 끌고 다니지 않으면 숨을 쉴 수가 없는 소녀다. 헤이즐은 엄마를 위해 꾸역꾸역 나가던 암환자 모임에서 어거스터스를 만나게 되는데, 이 남자, 말도 안되게 멋있고 낭만적이다. 골육종으로 다리 한쪽을 잘라내긴 했지만 엄청나게 섹시한 우리의 어거스터스는 헤이즐에게 예쁘다는 돌직구를 던지며 둘은 사랑에 빠진다. 그 뒤 두 사람이 헤이즐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장엄한 고뇌>를 쓴 작가를 만나러 가는 여정은 이 책의 클라이 막스다. 가장 행복한 순간에 가장 비극적인 일을 맞닥뜨린다.

 


아픈 현실에서도 헤이즐은 자신으로 인해 남겨져 고통 받을 사람들 때문에 괴롭고, 어거스터스는 자신이라는 상징이 세상에서 영영 잊혀질까 두렵다. 하지만 둘은 서로의 시간을 공유하고 마음을 나누며 헤이즐의 소원을 이루어 나가는 동안 각자를 괴롭히던 명제들로부터 서서히 놓여간다. 헤이즐은 자신의 선택에 더 이상 상처 받지 않을 것이고, 남은 사람들의 고통을 덤덤히 받아 들일 것이다. 그리고 어거스터스는 헤이즐과 작은 무한대 안에서 영원한 상징으로 기억될 것이다. 그렇게 그들이 사랑한 시간이 유한한 것이라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

 


p.163

 난 널 사랑해. 사랑이라는 게 허공에 소리를 지르는 거나 다름없다는 것도 알고, 결국에는 잊히는 게 당연한 일이라는 것도 알고, 우리 모두 파멸을 맞이하게 될 거고 모든 노력이 무위로 돌아가는 날이 오게 될 것이라는 것도 알아. 태양이 우리가 발 딛고 산 유일한 지구를 집어삼킬 거라는 것도 알고. 그래도 어쨌든 너를 사랑해.”

 


십대들의 언어로 삶과 죽음, 시간과 상징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완전히 새로운 경험이었다. 유쾌하지만 시니컬하고, 장난같지만 진지했다. 특히, 그들이 나누는 대화는 사색적이고 철학적인 은유들이 가득했다. 비록 산소통과 의족에 매여 있는 몸이지만 무한대보다 더 큰 무한대를 꿈꾸는 그들의 사유는 너무도 자유로웠다. 나는 소소한 사건들에 의미를 부여하며 비유적 상징을 이야기하는 이 어린 연인이 못견디게 사랑스러웠다. 비록 비극적 결함은 끝까지 반전을 거듭하지만 헤이즐과 어거스터스는 그저 서로의 곁을 묵묵히 지킬 뿐이다. 유한한 시간을 무한한 영원으로 바꾸어 버린 이들의 사랑이 책을 덮은 다음에도 내내 그리울 것 같다.

 


p.272

어떤 무한대는 다른 무한대보다 더 커요. 저희가 예전에 좋아하던 작가가 이걸 가르쳐줬죠. 제가 가진 무한대의 나날의 크기에 화를 내는 날도 꽤 많이 있었습니다. 전 제가 가질 수 있는 숫자보다 더 많이 원하고, , 어거스터스 워터스에게도 그가 가졌던 것 보다 더 많은 숫자가 있었기를 바라요. 하지만, 내 사랑 거스, 우리의 작은 무한대에 대해 내가 얼마나 고맙게 생각하고 있는지 말로 다할 수가 없어. 난 이걸 세상을 다 준다 해도 바꾸지 않을 거야. 넌 나한테 한정된 나날 속에서 영원을 줬고 난 거기에 대해 고맙게 생각해.”

 


서로에게 추모사를 지어주는 그들의 목소리가 듣고 싶다. 한참을 펑펑 울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말해 줄 수 있을까. 남은 자의 오만함은 지우고 죽음에 대한 편견도 숨긴채너희들은 아무 잘못이 없단다. 기만적인 시간 앞에서 그저 교차하는 별들일 뿐. 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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