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 (하드커버 에디션)
존 그린 지음, 김지원 옮김 / 북폴리오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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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암환자 혹은 시한부의 삶을 대하는 자세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당연하게도 우리는 언제 죽을지 알수 없는 삶을 살고 있으나 그들은 죽음이 목전에 와 있음을 매 순간 경험하며 살아간다. 늘 기대치보다는 짦은 그들의 수명 앞에서 약속이라도 한 듯 슬픔을 느끼고 동정을 하게 되지만 사실은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십대 소녀 헤이즐은 자신을 동정하는 사람들에 질려하지만 달리 도리가 없지 않느냐 변명하고 싶어진다. 우리는 그들의 고통이나 절망의 깊이를 그저 추측할 뿐이니까.

 


<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는 아주 특별하다. ‘시한부라는 소재는 누구에게나 익숙한 신파로 흘러가기 쉽상이지만 이 책은 다르다. 신파 이전에 삶과 죽음, 떠나는 사람과 남는 사람의 시간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질척거리는 슬픔이 아니라 먹먹한 여운이 길다. 슬픔이라기 보다는 감동에 가까운 감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예상 범위 안의 진부한 신파를 철저히 배반한 멋진 이야기 한편이 여기에 있다.

 


p.21

?”

내가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왜 그런 식으로 날 쳐다보는데?”

어거스터스가 반쯤 미소 지었다.

왜냐하면 네가 예쁘니까. 난 예쁜 사람들을 보는 게 취미인데, 얼마전부터 삶의 단순한 기쁨을 부정하지 않겠다고 결심했거든.”

  


아직 죽음을 이야기 하기엔 너무 이른 16살 헤이즐. 갑상선 암이 폐로 전이되어 줄곧 산소통을 끌고 다니지 않으면 숨을 쉴 수가 없는 소녀다. 헤이즐은 엄마를 위해 꾸역꾸역 나가던 암환자 모임에서 어거스터스를 만나게 되는데, 이 남자, 말도 안되게 멋있고 낭만적이다. 골육종으로 다리 한쪽을 잘라내긴 했지만 엄청나게 섹시한 우리의 어거스터스는 헤이즐에게 예쁘다는 돌직구를 던지며 둘은 사랑에 빠진다. 그 뒤 두 사람이 헤이즐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장엄한 고뇌>를 쓴 작가를 만나러 가는 여정은 이 책의 클라이 막스다. 가장 행복한 순간에 가장 비극적인 일을 맞닥뜨린다.

 


아픈 현실에서도 헤이즐은 자신으로 인해 남겨져 고통 받을 사람들 때문에 괴롭고, 어거스터스는 자신이라는 상징이 세상에서 영영 잊혀질까 두렵다. 하지만 둘은 서로의 시간을 공유하고 마음을 나누며 헤이즐의 소원을 이루어 나가는 동안 각자를 괴롭히던 명제들로부터 서서히 놓여간다. 헤이즐은 자신의 선택에 더 이상 상처 받지 않을 것이고, 남은 사람들의 고통을 덤덤히 받아 들일 것이다. 그리고 어거스터스는 헤이즐과 작은 무한대 안에서 영원한 상징으로 기억될 것이다. 그렇게 그들이 사랑한 시간이 유한한 것이라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

 


p.163

 난 널 사랑해. 사랑이라는 게 허공에 소리를 지르는 거나 다름없다는 것도 알고, 결국에는 잊히는 게 당연한 일이라는 것도 알고, 우리 모두 파멸을 맞이하게 될 거고 모든 노력이 무위로 돌아가는 날이 오게 될 것이라는 것도 알아. 태양이 우리가 발 딛고 산 유일한 지구를 집어삼킬 거라는 것도 알고. 그래도 어쨌든 너를 사랑해.”

 


십대들의 언어로 삶과 죽음, 시간과 상징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완전히 새로운 경험이었다. 유쾌하지만 시니컬하고, 장난같지만 진지했다. 특히, 그들이 나누는 대화는 사색적이고 철학적인 은유들이 가득했다. 비록 산소통과 의족에 매여 있는 몸이지만 무한대보다 더 큰 무한대를 꿈꾸는 그들의 사유는 너무도 자유로웠다. 나는 소소한 사건들에 의미를 부여하며 비유적 상징을 이야기하는 이 어린 연인이 못견디게 사랑스러웠다. 비록 비극적 결함은 끝까지 반전을 거듭하지만 헤이즐과 어거스터스는 그저 서로의 곁을 묵묵히 지킬 뿐이다. 유한한 시간을 무한한 영원으로 바꾸어 버린 이들의 사랑이 책을 덮은 다음에도 내내 그리울 것 같다.

 


p.272

어떤 무한대는 다른 무한대보다 더 커요. 저희가 예전에 좋아하던 작가가 이걸 가르쳐줬죠. 제가 가진 무한대의 나날의 크기에 화를 내는 날도 꽤 많이 있었습니다. 전 제가 가질 수 있는 숫자보다 더 많이 원하고, , 어거스터스 워터스에게도 그가 가졌던 것 보다 더 많은 숫자가 있었기를 바라요. 하지만, 내 사랑 거스, 우리의 작은 무한대에 대해 내가 얼마나 고맙게 생각하고 있는지 말로 다할 수가 없어. 난 이걸 세상을 다 준다 해도 바꾸지 않을 거야. 넌 나한테 한정된 나날 속에서 영원을 줬고 난 거기에 대해 고맙게 생각해.”

 


서로에게 추모사를 지어주는 그들의 목소리가 듣고 싶다. 한참을 펑펑 울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말해 줄 수 있을까. 남은 자의 오만함은 지우고 죽음에 대한 편견도 숨긴채너희들은 아무 잘못이 없단다. 기만적인 시간 앞에서 그저 교차하는 별들일 뿐. 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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