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린 미트 - 인간과 동물 모두를 구할 대담한 식량 혁명
폴 샤피로 지음, 이진구 옮김 / 흐름출판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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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과학분야의 책들은 가뜩이나 불안도가 높은 나를 동요시킨다. 이건 이래서 문제, 저건 저래서 문제, 과학적이고 이성적인 문체로 조목조목 따지고 드니 당장이라도 하늘이 무너질 것만 같은 불안함이 엄습한다. 그러면 세상은 온통 문제 투성이인 것 같고 난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부당해서 못견디겠는 거다. 굳이 나의 편독에 대한 변명을 하자면 그렇다. 그런 내가 <클린 미트>라는 제목의 책을 읽고 있다. 생소한데다 매우 비문학적이기까지한 이 단어의 조합을 이해하기 위해 다소간의 모험심이 발휘된다.

 

 

나는 고기를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일주일에 한 두번은 고기를 사야 마음이 편한 주부이자, 육즙 가득한 고기를 한입 베어무는 데서 오는 풍만감을 삶의 낙으로 삼는 소시민이다. 그런데 이 책을 펼치자마자 그런 삶의 원초적인 쾌락 앞에서 비인간적인 공장식 축사와, 항생제 범벅의 사료, 어마어마한 온실가스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단 한번도 없다는 사실이 죄를 지은 것 마냥 뜨끔하다. 동물권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더라도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현실이었다. 하지만 이 책이 그런 현실에 대한 고발만으로 끝났다면 너무 암울해서 아마 끝까지 읽어내지 못했을 것이다. <클린 미트>는 공장에서 태어나 공장에서 죽는 동물 대신 고기를 키우자고 외치는 책이다. 온갖 비능률적이고 비윤리적인 사육을 중단하고 환경도, 동물도, 사람도 윈윈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다. 아니 스테이크를 키운다니, 대체 어떻게?

 


공장식 사육은 투자자에게 큰 위험 요소다. 공장식 사육에는 인간의 건강, 기후변화, 식품 안보, 지구의 자원과 관련된 네가지 불편한 진실이 숨어 있으며, 이는 [묵시록]에 등장하는 말을 탄 네 명의 기사에 버금간다. 공장식 사육은 신선한 물을 고갈시키고 항생제를 과잉 소비하게 하고, 삼림 파괴를 주도하며, 사람들을 먹이는 효과적인 방법도 아니다. 가축에 들어가는 곡물은 인간의 수요를 뛰어넘으며 우리는 이 광기를 멈춰야 한다.

 

p.166

 

 

<클린 미트>의 저자 폴 샤피로는 미국 동물 보호협회의 대변인이자 부회장으로 여러해 활동해 온 사회운동가이다. 아울러, 단백질 배양 조직으로 키운 고기, ‘청정 고기(클린 미트)’를 세계 최초로 시식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전세계 인류가 직면한 환경오염과 식량 부족의 문제를 심각하게 직시하고 그 해결 방법을 찾기 위해 지속 가능한 식품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다 시험관에서 배양하는 고기를 접하게 되었는데 주로 의료용으로 사용되던 생명공학 기술을 식품에 적용하는 획기적인 아이디어가 나오면서 본격적으로 청정 고기가 개발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실제로 햄버거 패티를 만들어 내는데 성공했다. 맛도 고기에 가깝다는 평이다. 만약 청정 고기가 상용화 된다면 넓은 경작지와 공장식 축사가 사라질 것이고, 온실가스와 폐수 같은 기후 변화와 환경 문제, 고기를 만드는 과정에서의 자원 낭비, 전염병등의 문제도 해소될 것이다.     

 


 

물론 장미빛 미래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가장 중요한 상용화의 문제가 남았다. 두꺼운 육질의 고기를 만들 수 없는 기술적인 한계, 10배 이상 높은 생산 단가, 국가적인 윤리적 규제, GMO식품에서 한차례 겪었던 소비자의 거부감등 넘어야 할 산은 아직 많다. 하지만 청정 고기가 중요한 사회문제에 대한 어떤 대안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이 너무 다행스러웠다. 해결이 어려운 문제일수록 대안은 많은 것이 좋지 않은가. 고래기름에서 등유, 석유, 전기로까지 혁신을 거듭해온 에너지의 발전 과정을 생각해 보면 세상을 바꾸는 혁신적인 하나의 방법으로써 어쩌면 너무 먼 미래의 이야기는 아닐 지도 모른다.

 

 


 

저는 고기의 대체재를 찾는 모든 노력이 의미 있는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환경적, 도덕적, 윤리적 이유로 우리는 어떤 형태로든 소비를 줄여야 할테니까요.

p.40

 

 

이 책을 읽고 고기가 먹기 싫어지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기우였다. 고기는 여전히 맛있다. 저자는 식물성 고기로 절대 만족할 수 없는 현대인들의 욕구를 정확히 간파했다. 그래서 청정 고기를 지지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이 소설 같은 다큐멘터리가 현실이 되었을 때, 우리가 사는 세상은 정말 더 나아져 있을까? 고기를 키우는 일로 인간과 동물이 행복하게 공존하는 일이 가능하게 될까? 전혀 모르던 이과적 세상에서 던져진 화두가 자꾸 문과적 질문으로 변질되는 것을 보니 편독의 한계가 너무도 뼈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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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빛나고 있어요 웅진 모두의 그림책 19
에런 베커 지음, 루시드 폴 옮김 / 웅진주니어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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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에게 선물하고 싶은 책을 만났다. 책은 더 이상 읽는게 아니라 경험하는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멋진 책이다. <당신은 빛나고 있어요>는 환상적인 이야기로 유명한 에런 베커의 신작이다. 개인적으로 그가 매번 어떤 식으로든 변화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무척이나 좋아하는 작가다. 유명한 상(칼데콧) 하나쯤 받았으면 안주하고 싶어질 만도 할텐데 그는 이렇게 놀라운 책을 또 우리 앞에 내놓았다. (게다가 루시드폴의 번역이라니 한층 더 몽환적이다.) 그가 빛으로 부리는 마법에 흠뻑 빠져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여름날의 오후가 지나간다.

 

 

<당신은 빛나고 있어요
>라는 제목을 보면서 작가는 작정하고 우리를 위로할 셈인가보다 하는 생각도 들었다. 당연히 우리 스스로가 얼마나 귀한 존재 인지 일깨워 주는 그런 책일 것이라는 예상을 했다. 하지만 책을 천천히 넘겨 보는 동안 생각이 좀 달라졌다. 그가 책 속에 담은 빛은 온 우주의 것이었다. 얼마나 많은 빛이 나를, 이 우주를 아름답게 보듬고 있는 걸까 하는 생각에서 한참을 헤어나오지 못했다. 크게는 새벽을 깨우는 빛과 밤을 불러오는 빛, 대지와 하늘을 아우르는 빛에서부터 작게는 작은 나뭇잎 한 장과 꿈틀거리는 곤충 한 마리에서 나오는 빛까지, 그 모든 빛들이 눈으로 느껴지는 듯한 기묘하면서도 환상적인 경험이었다.

 

 

평소에 내가 이렇게나 많은 빛에 둘러싸여 있다는 생각을 한번이라도 해본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마음이 동요했다. 이 우주의 아름다움에 눈과 귀를 기울이는 일은 곧 라는 빛이 어떻게 빛나고 있는지 아는 일이기도 했다. 모든 존재는 빛에서 태어난다는 에런 베커의 말을 빌어 내가 속한 세상도, 나도 눈부신 빛으로 존재한다고 믿고 싶다. 뭐든지 과한 세상 속에서 내 빛이 자꾸 꺼져가는 기분이 들 때, 한번씩 꺼내서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어느 누구에게도 그런 순간은 오니까

 


 
  얼마 전, 아이들의 방학을 핑계 삼아 친정에 다녀왔다. 하늘은 구름 한점 없이 파랗고, 공기는 더웠고, 녹색 식물들은 끝도 없이 줄기를 피웠다. 정원에서 물을 주던 큰 아이가 물 호스를 낑낑대며 옮기더니 하늘을 향해 물을 뿌린다. 저 나무는 너무 목이 말라 보인다는 아이의 손가락 끝을 쳐다본다. 봄에 피었다가 지금은 가지만 앙상히 남은 인동덩굴이 아무렇게나 엉켜 있었다. 이렇게 예쁜 생각을 하는 저 아이는 지금 어떤 빛으로 빛나고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시원하게 뿜어지는 물줄기 사이로 작은 무지개가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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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 (하드커버 에디션)
존 그린 지음, 김지원 옮김 / 북폴리오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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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암환자 혹은 시한부의 삶을 대하는 자세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당연하게도 우리는 언제 죽을지 알수 없는 삶을 살고 있으나 그들은 죽음이 목전에 와 있음을 매 순간 경험하며 살아간다. 늘 기대치보다는 짦은 그들의 수명 앞에서 약속이라도 한 듯 슬픔을 느끼고 동정을 하게 되지만 사실은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십대 소녀 헤이즐은 자신을 동정하는 사람들에 질려하지만 달리 도리가 없지 않느냐 변명하고 싶어진다. 우리는 그들의 고통이나 절망의 깊이를 그저 추측할 뿐이니까.

 


<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는 아주 특별하다. ‘시한부라는 소재는 누구에게나 익숙한 신파로 흘러가기 쉽상이지만 이 책은 다르다. 신파 이전에 삶과 죽음, 떠나는 사람과 남는 사람의 시간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질척거리는 슬픔이 아니라 먹먹한 여운이 길다. 슬픔이라기 보다는 감동에 가까운 감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예상 범위 안의 진부한 신파를 철저히 배반한 멋진 이야기 한편이 여기에 있다.

 


p.21

?”

내가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왜 그런 식으로 날 쳐다보는데?”

어거스터스가 반쯤 미소 지었다.

왜냐하면 네가 예쁘니까. 난 예쁜 사람들을 보는 게 취미인데, 얼마전부터 삶의 단순한 기쁨을 부정하지 않겠다고 결심했거든.”

  


아직 죽음을 이야기 하기엔 너무 이른 16살 헤이즐. 갑상선 암이 폐로 전이되어 줄곧 산소통을 끌고 다니지 않으면 숨을 쉴 수가 없는 소녀다. 헤이즐은 엄마를 위해 꾸역꾸역 나가던 암환자 모임에서 어거스터스를 만나게 되는데, 이 남자, 말도 안되게 멋있고 낭만적이다. 골육종으로 다리 한쪽을 잘라내긴 했지만 엄청나게 섹시한 우리의 어거스터스는 헤이즐에게 예쁘다는 돌직구를 던지며 둘은 사랑에 빠진다. 그 뒤 두 사람이 헤이즐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장엄한 고뇌>를 쓴 작가를 만나러 가는 여정은 이 책의 클라이 막스다. 가장 행복한 순간에 가장 비극적인 일을 맞닥뜨린다.

 


아픈 현실에서도 헤이즐은 자신으로 인해 남겨져 고통 받을 사람들 때문에 괴롭고, 어거스터스는 자신이라는 상징이 세상에서 영영 잊혀질까 두렵다. 하지만 둘은 서로의 시간을 공유하고 마음을 나누며 헤이즐의 소원을 이루어 나가는 동안 각자를 괴롭히던 명제들로부터 서서히 놓여간다. 헤이즐은 자신의 선택에 더 이상 상처 받지 않을 것이고, 남은 사람들의 고통을 덤덤히 받아 들일 것이다. 그리고 어거스터스는 헤이즐과 작은 무한대 안에서 영원한 상징으로 기억될 것이다. 그렇게 그들이 사랑한 시간이 유한한 것이라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

 


p.163

 난 널 사랑해. 사랑이라는 게 허공에 소리를 지르는 거나 다름없다는 것도 알고, 결국에는 잊히는 게 당연한 일이라는 것도 알고, 우리 모두 파멸을 맞이하게 될 거고 모든 노력이 무위로 돌아가는 날이 오게 될 것이라는 것도 알아. 태양이 우리가 발 딛고 산 유일한 지구를 집어삼킬 거라는 것도 알고. 그래도 어쨌든 너를 사랑해.”

 


십대들의 언어로 삶과 죽음, 시간과 상징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완전히 새로운 경험이었다. 유쾌하지만 시니컬하고, 장난같지만 진지했다. 특히, 그들이 나누는 대화는 사색적이고 철학적인 은유들이 가득했다. 비록 산소통과 의족에 매여 있는 몸이지만 무한대보다 더 큰 무한대를 꿈꾸는 그들의 사유는 너무도 자유로웠다. 나는 소소한 사건들에 의미를 부여하며 비유적 상징을 이야기하는 이 어린 연인이 못견디게 사랑스러웠다. 비록 비극적 결함은 끝까지 반전을 거듭하지만 헤이즐과 어거스터스는 그저 서로의 곁을 묵묵히 지킬 뿐이다. 유한한 시간을 무한한 영원으로 바꾸어 버린 이들의 사랑이 책을 덮은 다음에도 내내 그리울 것 같다.

 


p.272

어떤 무한대는 다른 무한대보다 더 커요. 저희가 예전에 좋아하던 작가가 이걸 가르쳐줬죠. 제가 가진 무한대의 나날의 크기에 화를 내는 날도 꽤 많이 있었습니다. 전 제가 가질 수 있는 숫자보다 더 많이 원하고, , 어거스터스 워터스에게도 그가 가졌던 것 보다 더 많은 숫자가 있었기를 바라요. 하지만, 내 사랑 거스, 우리의 작은 무한대에 대해 내가 얼마나 고맙게 생각하고 있는지 말로 다할 수가 없어. 난 이걸 세상을 다 준다 해도 바꾸지 않을 거야. 넌 나한테 한정된 나날 속에서 영원을 줬고 난 거기에 대해 고맙게 생각해.”

 


서로에게 추모사를 지어주는 그들의 목소리가 듣고 싶다. 한참을 펑펑 울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말해 줄 수 있을까. 남은 자의 오만함은 지우고 죽음에 대한 편견도 숨긴채너희들은 아무 잘못이 없단다. 기만적인 시간 앞에서 그저 교차하는 별들일 뿐. 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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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혀 죽은 사건
구라치 준 지음, 김윤수 옮김 / 작가정신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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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표지부터 낭자한 피에 다소 하드코어한 미스터리 소설일까 싶어 지례 겁을 먹었다. 일본에서는 본격 미스터리 작가로 알려진 구라치 준이기에 더욱 걱정이 되었다. 난 아직 미스터리 초심자라 중간에 책을 덮어버릴 지도 몰랐다. 그런데 제목이 좀 독특하다. <두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혀 죽은 사건>누구나 고개를 갸우뚱 하게 될 만한 문장이다. 사람이 두부 모서리에 부딪혀서 죽을 수 있나? 접시물에 코를 박고 죽는 일 만큼 어려운 일 아닌가? 아마 이 책을 다 읽기 전까지는 누구도 이 제목에 대한 물음표를 지울 수 없을 것이다.

 


p.116.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터무니 없을 정도로 거대한 광기와 맞서야 한다. 우리의 정신도 삼켜버릴 수 있는 엄청나게 크고 어두운 광기와. 나카모토 경부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불안감에 또 다시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 <파와 케이크의 살인현장 중>

 


<두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혀 죽은 사건>은 총 6편의 단편을 모은 소설집이다. 표제작인 <두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혀 죽은 사건>은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던 어느날 학도병으로 차출된 주인공이 나가노현의 극비 연구시설로 발령을 받게 되면서부터 시작된다. 2-13호 실험실에서 이유도 모른채 자전거 페달을 밟는 이즈카는 교대하기 위해 들어간 실험실에서 같이 근무하던 가게우라 이등병의 시체를 발견하게 된다. 하지만 실험실은 완전한 밀실 구조고 사람이 드나든 흔적이나 흉기도 없다. 산산이 부서진 두부가 흩어져 있을 뿐전쟁 막바지, 가미가제로 젊은 병사들이 무수히 죽어나가도 제국주의라는 기치 아래 그 모든 죽음이 영웅시 되던 시기에 겨우 두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혀 죽은 한 이등병의 시체는 말 할 수 없는 아이러니를 불러 일으킨다. ‘구라치 준식의 블랙코미디란 이런 것인가.


 

 p.157 앞으로 쓰러진 시체와 그 주변에 흩어진 두부. 게다가 시체의 후두부는 사작물체의 모서리로 구타한 상처가 있었다. 아무리 봐도 두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혀 죽은 것으로 보인다. 194412월 초순. 제국 육군특수과학연구소 2-13호 실험실에서 일어난 일이다.

 - <두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혀 죽은 사건 중>

 

 

 

 

 

 

불안을 안고 첫 장을 열었으나 결국 내가 중간에 책을 덮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분위기는 어두웠으나 이야기는 가벼웠고, 사건은 복잡하게 얽혀있으나 결론은 심플했다. 게다가, 살인이라는 하나의 사건을 가지고 연쇄살인, SF, 인공지능, 태평양전쟁, 시골집 고양이까지 아우르는 작가의 이야기에 흠뻑 매료되었다. 같은 살인이지만 풀어내는 방식은 너무도 각양각색이라 이런 미스터리 소설도 있구나 하며 순식간에 읽어버렸다. 각 단편마다 전혀 다른 분위기를 유지 할 수 있다는 점이 특히 놀라웠다. 그 중에서도 <밤을 보는 고양이>, <사내편애>가 가장 놀라움을 주는 단편이었고 마지막 <네코마루 선배의 출장>은 이 작가의 네코마루 시리즈를 찾아 읽고 싶어지게 만드는 흥미진진함과 재미가 있었다.

 


두부 모서리에 부딪혀 죽어라는 일본의 라쿠고에서 인용된 말로 농담을 농담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고지식하기가 이를데 없는 사람을 빈정거리는 말로 사용된다. ‘에라이, 두부 모서리에 머리 부딪혀 죽을 놈아정도로 사용되려나구라치 준이 선사하는 반전은 어이없을 정도로 간단한 해답 (바카미스:황당한 트릭이나 논리의 미스터리)을 핵심으로 하는데 이 책의 제목이야 말로 그 핵심을 찌르는 듯한 명징한 문장이 아닐까 싶다. 이쯤되면 작가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다. ‘고정관념에 사로잡혀서 그래. 잘 들어, 더 유연하게 생각해보자.(p.308) 그렇게 딱딱하게 굴지말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라고!’ 유머와 위트를 잃고 사는 현대인들에게 보내는 반전 메세지가 흥미로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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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피치, 마음에도 엉덩이가 필요해 카카오프렌즈 시리즈
서귤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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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피치, 마음에도 엉덩이가 필요해마치 암호문 같은 이 제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 책의 프롤로그를 읽어야 한다. 그 단 몇 줄로 이 난해한 제목이 이해됨과 동시에 가슴 언저리께부터 슬슬 핑크빛 온기가 돈다.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상처받지 않겠다는 그 천진하고도 귀여운 선언에 나도 모르게 흡족한 미소가 새어나왔다. 그리고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눈 앞에 아이스 아메리카노도 한 모금 쭉 들이켰다. 이 책이 점점 더 궁금해지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사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카카오프랜즈 라는 캐릭터가 가진 대중성, 딱 그 정도의 기대감만 있었다. 무심코 집어든 제품의 사은품이 마침 어피치의 탐스런 분홍색이였을 때의 기쁨 정도면 충분하겠다고 생각했다. 책 표지만으로도 이미 많은 여성들이 지갑을 열테다. 그런데 내 예상은 보기좋게 빗나갔다. ‘서귤이라는 이름도 요상한 작가의 책을 처음 만나보는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잘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감정에 휩싸였다. 나를 아스라한 감정으로 이끈 것은 뜨겁게 붉은 것도 아닌, 차갑게 푸른 것도 아닌, 이제 막 발그레 해진 정도의 핑크빛 온기다. 어쩌면 위트 있는 문장에 온기까지 얹어 내놓는 저자의 글솜씨에 매료된 것일지도 모른다.  

 


p.120

어째서 미처 무엇이 되지 못한 것들은 우리의 마음을 쉽게 저리게 만들까.

너와 내가 한 번도 누군가가 되지 못한 채 늘 과정 위에 선 사람이어서일까.

넌 브로콜리가 사실 열리기 직전의 꽃봉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니?

채 피우지도 못하고 밑동이 잘려버린, 뜨거운 물에 들어가버린, 초장에 찍혀버린,

커다란 꽃봉오리.

자신의 꽃 색깔을 영원히 알지 못한 채 영원히 푸르게 데쳐진 브로콜리 한송이가,

꼭 우리의 젊음에 대한 은유 같아서.

난 도저히 브로콜리를 못 먹겠어.

 

 

얼렁뚱당 써내려간 듯한 문장들에 묘하게 설득되어 있는 나를 발견한다. 선풍기의 플라스틱 날개, 지하철역 어느 거울 앞, 브로콜리의 정체, 얼린 숟가락, 수제버거 먹는 법 같은 것들이 나를 무장해제 시켰다. 저자의 시선을 따라 평소엔 눈치 채지 못했던 작고 사소한 것들을 발견하는 기쁨을 누린다. 오글거리다 킥킥거리고, 뚱해졌다가 피식 웃어버리다보면 어느새 마지막 페이지다. 짧고 긴 문장들 속에서 젊음의 탄력과 생기가 넘쳤다. 만약 어피치가 정말 살아있는 생물에 글까지 쓸 수 있었다면 아마 이런 책을 쓰지 않았을까. 캐릭터와 문장의 매칭이 딱 맞아 떨어지는 덕에, 책을 읽는 내내 핑크색 엉덩이와 마주앉아 있는 기분이다.

 

카카오 프렌즈 캐릭터 에세이 시리즈에서 라이언에 이어 두번째로 책을 내게 된 어피치.  인기 캐릭터 디자인과 작가의 콜라보레이션을 생각해낸 출판사도, 캐릭터의 입을 빌어 책을 써낸 작가들도, 그 젊은 감각들이 눈부시다. 덕분에 즐거운 시간을 보낸 한 명의 독자로서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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