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카의 장갑
오가와 이토 지음, 히라사와 마리코 그림, 이윤정 옮김 / 작가정신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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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인터넷 검색창에 라트비아라는 네 글자를 친다. 연관검색어로 리가 여행’, ‘발트3등이 뒤따라온다. 북유럽과 러시아 사이, 리투아니아와 에스토니아의 사이에 라트비아가 정말로 있었다. 나른하고 기분 좋은 꿈같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말로 라트비아의 이름을 확인한 순간 나는 그녀가 몹시 보고 싶어졌다. 물을 잔뜩 머금은 이끼들이 사는 호숫가, 아늑하게 감겨드는 물 속에서 반짝거리는 그녀, 이름을 부르자 돌아보는 얼굴엔 어딘가모를 익숙함이 있다. 마리카나를 향해 활짝 웃어주더니 다시 물속으로 빨려들 듯 사라져 가는 그녀의 모습이 눈 앞에 아른거린다. 마치 오래 알고 지낸 사람처럼 그리운 이름 마리카. 언젠가 그녀를 정말로 만날 수 있을까?


<마리카의 장갑><달팽이 식당>, <츠바키 문구점>을 쓴 오가와 이토의 새 소설이다. 저자가 라트비아를 여행하면서 보고, 듣고, 느낀 점들이 오가와 이토라는 필터를 거쳐 아름다운 소설로 새롭게 태어났다. 그러니까 이 소설의 무대가 되는 루프마이제 공화국은 곧 라트비아의 다른 이름인 셈이다. 이런 사실들은 출간기념 작가의 인터뷰나 마지막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는 일러스트 에세이를 보면 쉽게 알수 있다. 소설 외에 작품의 탄생 배경을 훓어보는 재미와 히라사와 마리코의 귀여운 삽화를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아빠는 잠시 쉬어 갈 겸 걸음을 멈추고 아들들에게 퀴즈를 냈습니다.

이 호두를 삼 형제가 사이좋게 나눠 먹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p.18

 

루프마이제 공화국의 한 사우나 오두막에서 건강한 여자아이가 태어났다. 할머니는 아이를 위해 엄지 장갑을, 할어버지는 버드나무 침대를, 엄마는 흑빵을, 아빠와 오빠들은 크리스마스 나무를 준비한다. 온 가족이 축복하는 가운데 태어난 이 아이의 이름은 마리카. 그 많은 축복들 중에서 마리카의 성장, 결혼, 죽음까지 온 생을 통틀어 가장 중요한 소재는 엄지장갑이다. 루프마이제 공화국에서 엄지장갑은 사랑을 표현하는 수단이기도 하고, 정을 나누는 선물이기도 하고, 슬픔을 위로하는 애도의 표현이기도 하다. 직접 떠낸 장갑이야말로 기쁨이든 슬픔이든 그들이 표현할 수 있는 마음의 최대치인 셈이다. 함께 나무 한 그루, 작은 벌레 한 마리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 가슴 뛰는 첫사랑을 맞이하는 마음, 황새를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마음, 가축들에게도 장갑을 나누어 주는 마음, 징집으로 끌려가는 남편에게 눈물대신 장갑을 전하는 마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망의 순간을 희망으로 바꾸는 그 모든 마음이 엄지 장갑안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런면에서 엄지장갑은 하나의 상징에 불과하지만 그 상징에 담긴 마음을 읽어내는 동안 느끼는 행복감은 이루 말 할 수 없이 컸다.

 


 

마리카는 침묵도 아름다운 음악임을 깨닫습니다.

이제 기를 쓰고 자신의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긴 겨울을 넘기고 마리카는 조금 어른이 되었습니다.

p.78


모든 문장이 털실처럼 보드랍고 따뜻하다. 계절과 음식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오가와 이토만의 따뜻한 시선이 여지없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이국의 것들을 한없이 친근하게 담아낸 일러스트들도 책에 온기를 더해준다. 소설이라고 소개되어 있지만 나는 한편의 동화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다. 자연스러운 행복에 물드는 기분이랄까. 책을 읽고 나면 가슴의 가장자리에서부터 서서히 따뜻해지더니 심장께쯤 와서는 마알간 결정체 같은 것이 생기는 느낌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라트비아에서는 이 시대의 마리카들이 천방지축으로 뛰어 놀고 있을 것만 같다. 언젠가는 그녀들을 만나러 가야겠다고, 그녀들을 만나서 함께 춤을 추겠다고, 그러려면 장갑을 뜨는 법부터 익혀둬야겠다고 또 다시 두서없는 꿈을 꾼다.


 

비 갠 하늘에 무지개가 떠 있습니다.

지면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습니다. 그네도 반짝입니다.

아름다운 꽃밭이 보이고 그 너머로 숲이 펼쳐져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을 무지개가 아름다운 빛으로 감싸고 있습니다.

마리카는 자신이 아무것도 잃어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다만 변화했을 뿐입니다.

p.193

 

 

 

 

 

                                 <7세 딸아이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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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딩 - 작전명, 지구를 구하라! 와이즈만 첨단과학 3
최재훈 지음, 툰쟁이 그림, 장윤재 감수 / 와이즈만BOOKs(와이즈만북스)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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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전, 남편과 아이들이 맥북 컴퓨터로 음성인식 대화를 하며 놀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아이들은 엉뚱한 질문을 해대고 컴퓨터는 답을 찾지 못했다는 답만 늘어 놓고 있었다. 무엇이 그리 우스운지 서로 질문을 하겠다며 아우성이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같이 대화할 수 있는 건 친구 아니면 인형 뿐이었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컴퓨터와 대화를 하며 논다니, 한마디로 격세지감이다. 심각한 기계치에 건전지 하나 가는 것도 남편에게 미루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앞으로 다가올 미래 사회가 자못 두려울 정도다. 미래에 아이들이 살아갈 모습은 아마도 지금의 내 상상을 한참 초월하는 것이 될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코딩교육 운운 하는 것도 다 그런 맥락일 테다.

 

 

  과학분야의 어린이 도서로는 가장 믿음직한 와이즈만출판사에서 나온 <코딩-작전명 지구를 구하라>책이다. 초등 고학년부터 의무 교육이 된다는 코딩이라는게 대체 뭔가 싶어 들춰봤다.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게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코딩이란 무엇인지 개념 키워드부터 실려 있다. 그리고 주인공 소개에 이어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어려운 개념들을 참신한 스토리에 적절히 녹여 흥미롭게 구성한 부분이 인상적이다. 특히 라면 끓이는 법을 예로 들어 알고리즘 순서도를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질 정도였다. 또 아이들이 좋아하는 게임이나, 로봇을 중심으로 코딩의 기본 맥락을 설명하고 있어 흥미를 유발하기에도 좋다. 그 와중에 멸종위기의 북극곰을 상기시키는 센스는 덤이다.

 

 



 

   이제 막 초등학생이 되려는 큰 아이에게는 다소 어려운 이야기일 수 있겠다 싶었는데, 일단 사람과 컴퓨터가 서로 다른 언어를 쓰고 있다는 부분은 이해가 된 모양이다. 나는 100까지도 아는데 컴퓨터는 01(이진법) 밖에 모른다며 어의없게 우쭐해져 있기도 하지만 나에게 엄청 어렵고 대단한 물건인 컴퓨터가 아이에게는 그저 놀이감 같은 기분으로 접근할 수 있다는게 수확이라면 수확이다. 가장 활용도가 좋은 대상은 읽기가 자유로운 초등학교 3학년이상 아이들에게 코딩 입문용으로 적절하다는 생각이다.


   조기 코딩 교육에 대한 찬반론은 아직 뜨겁다. ‘다른 나라에서 하니까 우리도 하자식으로 시작되는 코딩 교육이 조금 우려스럽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 앞에 닥친 미래를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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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표 영어 구구단 + 파닉스 6단 : to부정사 - 알파벳 없이 입으로 익히는 어린이 영어 아빠표 영어 6
Mike Hwang 지음 / 마이클리시(Miklish)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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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딸 아이는 몇 달 뒤면 초등학생이 된다. 한글만 떼면 시작해야지 하던 아이의 영어 교육이 이제 슬슬 걱정이 된다. 발등에 떨어진 불처럼 초등학교라는 단어 하나가 귀 얇은 엄마를 조바심나게 한다. 영어에 전혀 관심이 없는 딸의 태도도 걱정이다. 어쨌든 하긴 해야 할텐데 언제,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가 가장 큰 고민이다.

 

일단은 최대한 여러가지 방법을 접해 볼 생각이다. <아빠표 영어 구구단+파닉스>도 그 중 하나다.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무엇이든 기본, 기초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한글도 아이가 한글 음절표를 이해하고 외울 수 있게 되자 그 뒤는 어렵지 않게 익혀졌다. 이 책도 그런 학습 효과를 노린 교재라는 생각이 든다. 영어의 기본적인 단어와 문법으로 이루어진 문장을 구구단 처럼 외우면 그 외의 문장들은 어렵지 않게 구사 할 수 있게 될 것 같다.

 

 

 

 

 

구구단 시리즈는 1단부터 10단 그리고 비밀책, 확장패턴까지 총 12권의 책을 마스터하면 영어의 기본기가 탄탄하게 완성되는 수준을 목표로 하고 있다. 책 두께는 두껍지 않고 하루 10분 정도의 투자면 한 권은 2, 늦어도 한 달 안에는 마스터 할 수 있다는 결론이다. 실제로 아이와 몇 문장 읽어보니, 문법이라는 기본기도 익힐 수 있고, 쉬운 문장이라 어렵지 않게 진도도 나갈 수 있고, 윗부분에 쓰인 해설대로 하면 가르치는 나도 자신감이 생긴다. 세이펜이나 파일음원도 제공되니 굳이 발음을 신경쓰며 멋쩍어 할 필요도 없다.         


내가 가진 책은 6, 7, 8단 이지만, 1단부터 차근차근 시작하는게 체계적으로 좋을 듯 하다. 비록 영어는 실패했지만 다른 언어를 전공해보니, 역시 언어는 문법의 틀이 잡혀 있어야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문법이라는게 딱딱해 지기 쉬우니 재미있게 배울 수 있는 다른 방법이 필요한데, 이 책은 그런 부분에 대한 고민이 많이 들어 있는 책이다. 어려운 개념이지만 아이들이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신경을 쓴 티가 역력하다. 개인적으로는 초등학생 이상의 아이들에게 활용도가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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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만나다
모리 에토 지음, 김난주 옮김 / 무소의뿔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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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특별한 순간을 포착해낸 작가의 섬세한 시선 ​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이 띠지의 문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 수 없었다. 모리 에토의 작품은 처음이었고, 저자의 이력을 봐도 쉽게 상상되지 않았다. 다만, <다시, 만나다>라는 제목과 아기자기한 표지 일러스트가 선이 고운 일본 소설의 느낌을 물씬 풍기고 있었다. 처음 접하는 작가의 책은 전혀 예측이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늘 첫 장을 넘길때 마다 두근두근하다.


이 단편집은 <다시, 만나다>, <순무와 셀러리와 다시마 샐러드>, <마마>, <매듭>, <꼬리등>, <파란 하늘>의 총 6개의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우연한 장소에서 예기치 않는 일로 전혀 예상 밖의 사람을 만나게 되면 나도 모르게 세상 참 좁다라고 중얼거리게 된다. <다시, 만나다>는 그런 우연과 인연이 촘촘하게 엮인 사람과의 만남과 헤어짐을 다룬 이야기이다. (원어 제목 중 우연함을 내포한 만남을 뜻한다.) 그저 사는 동안 누군가를 만나고 헤어지는 일이 이렇게 재미있는 이야기가 될 줄은 몰랐다. 사와다와 나리키요, 그들은 결국 다시 만나 밥이라도 한 끼 먹게 되었을까?


P76. 빈발하는 공격을 방어하는 최선의 길은 국민 모두가 평정심을 유지하면서 일상을 지켜나가는 것. ‘1억 총 평상심을 표방하는 수상의 지도 아래 순응을 잘하는 일본 사람들은 아주 순조롭게 일상을 연기하고 있어…(중략)….또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렇게 앞날을 알 수 없는 세상이기에 더욱이 순무는 순무여야 하고 무는 무여야만 한다는 것이다.


<순무와 셀러리와 다시마 샐러드>는 누군가는 아줌마의 진상이라고 혀를 찰 일이 실은 주부로서 마지막 남은 자존심을 지키려는 몸부림일 수도 있다는 사실이 서글펐다. 그리고 마침내 사회로부터 그녀의 자존감이 지켜졌을 때 그 통쾌함에 웃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으로부터, 자식으로부터 여전히 존중받지 못하는 엄마의 위치가 가여워서 울었다.

 


P.81  아는지 모르겠네. 슬픔은 딱 잘라서 두가지 유형이 있거든. 한가지는 무겁게 마음에 들러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유형. 그리고 또 한가지는 모든걸 몰아내서 마음을 텅비게 하는 유형. 무거운 슬픔은 금방 익숙해질 수도 있어. 사람이 그렇게 생겨먹었잖아. 시간을 들이며 그 무게를 견뎌 낼 수 있게. 골치 아픈건 텅 비는 쪽이야. 그 슬픔은 정말 인간을 갉아먹어.

<마마>는 이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서는 누구에게나 무조건적인 위로가 필요한 순간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다. 그것이 설사 거짓으로 지어낸 환상에 불과할 지라도 무민의 마마같은 따스함이라면 더할 나위 없겠다고 깊이 공감하며 읽어내려갔다.       


<매듭>은 한 가지 사건이 다수에게 얼마나 다른 기억으로 남을 수 있는지에 대한 기록이다. 주인공 고토가 어린 시절 상처라고 생각해 왔던 기억이 상대에게는 전혀 다른 장면으로 기억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 그간의 아픔이 치유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P.184   내가 원했던 것은 뜨뜻미지근한 우정 따위가 아니라 그의 열정이었다. 뭐에 홀린 것처럼 강물로 발을 내디디던, 흥분한 혼을 지닌 살아 있는 육체였다.



<꼬리등>은 세가지 이야기가 옴니버스 형식으로 짜여진 소설이다. 투우장에서 쓰러져 가는 소의 시점, 끝내 서로의 강을 건너지 못한 사랑, 최고의 목표로 추구하던 것들이 것들이 거짓이라는 이름으로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보면서 울부짖는 연인의 이름. 그들이 각각 죽음에 다다르는 과정이 숨이 막힐 듯이 진한 여운과 오랜 잔영으로 남는다. 마치 꼬리등 불빛을 마주한 것 처럼.


띠지의 문구가 이해가 되었다. 작가가 포착한 생의 장면들은 너무나 섬세하고 마음을 건드리는 무언가가 있어, 종종 현실과 이야기의 경계가 모호해졌다. 나는 어떨 땐 주인공이 되기도 하고 가끔은 그 상대가 되기도 하고 그것도 아니면 바로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제 3자가 되기도 했다. 그래서 단편임에도 불구하고 매 순간 몰입도를 높이면서 읽어나갈 수 있었다. 오랜만에 마른 감성이 촉촉해지는 기분이다. 저자의 감각적이고 섬세한 묘사가 인상적인 책이다. 모리 에토의 다른 소설도 읽어보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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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어라, 내 얼굴 슬로북 Slow Book 4
김종광 지음 / 작가정신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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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광’. 20년차 소설가라는데 이름도 작품도 낯설다. 나름 국내 소설은 열심히 읽는다고 자부하던 터라 작품은 커녕 이름도 처음 듣는 작가의 출현에 조바심이 일었다. 그런데 꼭 나만 그런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저자 스스로도 듣보잡소설가라고 지칭하는데 스스럼이 없다. 하지만 그것이 겸양과 겸손의 다른 말임을 처음엔 알지 못했다. 책을 다 읽고 덮을 즈음에야 20년차 글쟁이의 내공에 흠뻑 빠져 한참을 감탄해야 했다.



<웃어라 내얼굴>은 생활밀착형 탐구생활 같은 책이다. 저자가 일상 생활중에 느낀 시시콜콜하고 사소한 경험들이 때로는 웃기게, 때로는 진지하게, 때로는 슬프게 다가온다.  듣보잡작가의 생활은 그야말로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애잔함이 반 이상이지만 저자는 그와중에도 작가다운 통찰력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학습지 권유에 신경전을 벌이는 아내, 책보다는 예능프로에 빠진 아이, 샤브샤브집에서 고기를 못 먹는 사연, 대출을 두고 동상이몽을 하는 저자와 아내의 이야기 등등 현실적으로 풀자면 돈 타령 밖에 안되는 일들이 문장이 되고 산문이 되어 독자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특히 찜질방에 대한 묘사를 읽고는 그 진지한 문체의 탁월함에 큭큭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 ‘노가다와 삼계탕은 단지 한 장 남짓의 분량만으로도 김유정의 동백꽃못지 않은 짠함과 유쾌함이 넘쳐 흐른다.

 

 

 

 

 

 

 

 

 

한참을 울고 웃다3부로 넘어오면 무슨 무슨 날에 깃든 뜻과 한참은 동떨어진 현실에 분노하는 저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근로자의 날은 몸 쓰는 노동에 보다 정당한 대가가 지불되기 바라며 육체노동자가 열받는 날이라 부르짖고, 어딘가 가야할 것 같고, 뭐라도 챙겨줘야 할 것 같은 어린이날’, ‘부부의 날이 근심스러우며, ‘광복절도덕’, ‘사회’, ‘국민윤리같은 말들을 쓰레기로 만드는 특사 명단에 혀를 찬다. 달력 한 장으로 우리의 볼온한 현실이 한방에 까발려 졌다.


마지막은 책, 문학, 글쓰기에 대한 저자의 소회를 밝히고 있다. 각종 매체와 인터넷의 발달로 글쓰기라는 스펙트럼이 단박에 우주만큼 확장되었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여러가지 이슈들이 주된 이야기꺼리다. 재미있는 형식의 소설 씨와의 인터뷰라는 글이 이 챕터의 많은 부분을 대표하고 있다.  

 

 

 

p.340  ‘웃기는이 좋겠다. 이제까지도 웃기는 소설을 써왔지만, 내 웃음과 독자의 웃음이 상통하지 못한 듯 내 소설에 웃는 독자가 드물었으나, 불구하고 더욱 웃기는 소설을 써야겠다. 절로 웃을 수밖에 없는 소설. 위로받아서 웃고, 짠해서 웃고, 기가 막혀 웃고, 분해서 웃고, 절묘해서 웃고, 깨쳐서 웃는, 가진 자들의 체제와 권력에 대하여 날이 바짝 서 있으면서도 울음보다 강한 웃음기를 머금은 그런 웃기는 소설.


소재는 오늘도, 내일도 마주쳐야 할 우리 모두의 일상이다. 문장은 간결하고 알아먹기 쉬우며 담백한데 거기다 한술 더 떠 웃기기까지 하다. 글쓰기 수업이나 교본에서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바로 그 경지다. 이래서 20년 이상 한 분야에서 일한 사람은 어찌됐건 도가 트는 모양이다. 앞으로 저자가 이름만 들으면 누구나 알만큼 유명해 질런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그의 원대로 아주 느리게 다다가갈테지만 오래도록 남는 그 무엇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 책이 바로 그 증명이다. 나는 앞으로 기꺼이 그의 독자가 되기로 마음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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