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 스완네 집 쪽으로 1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민음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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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각주가 스포일러가 되고 있네요. 특히 생루 부인에 대한 각주는 너무 심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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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 바리에테 12
슬라보예 지젝 외 지음, 정혁현 옮김 / 비(도서출판b)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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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하려면 목숨 바치라는

7월 이달의 책 [이웃]에 대하여

오랜만에 아이들을 데리고 살고 있는 아파트 놀이터에 배드민턴을 치러 갔다. 그동안 제대로 놀아주지 못한 마음을 모아 열심히 놀아줄 작정이었지만 쉽지 않았다. 아이가 둘이라서 하나와 치면 다른 하나가 입이 나왔고, 치고 난 아이도 교대하면서 입이 나왔다. 엄마가 구경할 테니 둘이서 치라고 하면 아직 힘 조절이 되지 않는 아이들이라 엄마와만 치고 싶어 했다. 둘이 치라고 아들에게 채를 내어 주는데 옆에서 배드민턴 채를 들고 어슬렁거리던 중학생 남자아이가 들고 나온 채를 주면서 자신과 치자고 하는 것이었다. 별 수 없이 그 아이와 배드민턴을 치는데 딸은 동생이 못 친다고 짜증을 내고 나는 나대로 마음이 불편했다. 아이들과 놀아 준다고 해놓고 마음대로 놀아주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처지가 되었다. 딸이 아들에게 못한다고 짜증을 심하게 내기에 나는 말해버렸다. 못 치는 것은 둘 다 똑같다고. 그랬더니 딸은 화가 나서 채를 던지고 자전거를 타러 가버렸다. ‘내가 뭐가 더 못쳐’라고 외치면서 가버리는 딸아이에게 사실 미안했다. 나는 들고 있던 채를 구경하고 있던 초등학생 남자아이에게 주고 함께 치라고 하고는 잽싸게 아들에게 돌아왔다.

레비나스가 “인간”의 범위에 포함시키지 못한 것은 비인간적인 것 그 자체, 즉 인간들의 얼굴을 마주하는 관계를 벗어나는 차원이다. ..... 그가 여기서 놓치는 것은 “인간”에 대한 모든 규범적인 결정은 오로지 “비인간적인”것, 즉 불투명하게 남아 있으며, “인간”으로 간주되는 것의 어떤 서사적 재구축에도 저항하는 어떤 것의 불가해한 근거에 의지해서만 가능하다는 역설이다. [이웃] 252p

나는 아들의 감정은 돌볼 수 있었지만, 중학생 아이의 어떤 관심에 대한 열망은 무시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목소리는 또렷하지 않았다. 자신의 의견을 자신 있게 말할 기회를 갖지 못한 아이의 얼버무림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아이의 어떤 것이 나를 두렵게 했다. 그 아이는 초등학생과 함께 배드민턴을 치면서도 계속해서 내게 말을 건넸다. 나는 그것이 싫었고 대꾸할 겨를을 내고 싶지 않았다. 그는 과장되게 웃었다. 그의 셔틀콕이 날개가 나가고 머리가 나가도록 새게 치면서 자신을 봐달라고 거의 절망에 가까운 히스테릭한 웃음을 계속 웃어도 나는 그에게 갈 수 없었다. 나는 내 아이들을 두고 그의 엄마가 될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계속해서 끼어들고 싶어 했다. 아들아이가 친 공이 울타리를 넘어갔고, 아들이 울타리를 돌아 공을 가지러 가는 사이 그는 달려와 울타리를 넘어가서 공을 들고 돌아왔다. 고마움보다는 어색한 마음이었다. 그의 호의가 부담스러웠다. 자신의 공을 망가뜨린 아이는 다시 아들 옆에 와서 연신 채를 휘둘렀다. 아들의 머리를 쳐버릴까 두려웠던 나는 삼각으로 함께 치자고 권했다. 삼각으로 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내가 공을 잘 치는 것도 아니고.

인간됨은 유한, 수동성, 상처받기 쉬운 노출에 대한 특정한 태도이다. 253p

어두워지고 있었다. 딸아이는 일단 돌아왔다. 함께 치자는 권유에 딸은 한 번 무시하는 태도로 아파트 한 동을 돌아 산책을 하고 돌아왔다. 나는 다시 딸에게 함께 하자고 말했다. 딸은 마지못해 동생에게서 채를 받아들었다. 삼각으로 배드민턴을 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딸아이의 얼굴에 짜증이 올랐지만, 쉽게 말을 하지는 않았다. 나는 중학생 아이에게 물었다. 저녁을 먹었느냐고, 먹지 않았다고 했다. 나는 안도했다. 나는 대뜸 얼른 돌아가서 밥을 먹으라고 했다. 그 때의 내 목소리가 얼마나 가소롭던지. 간사하고 어색하던지. 엄마가 기다릴텐데 왜 안 가느냐고. 엄마가 찾을 테니 얼른 가라고. 그 아이는 어쩔 수 없이 집으로 돌아갔다. 이미 많이 어두워졌다. 모두 돌아가고(우린 이른 저녁을 먹었다) 우리만 남았다. 딸아이의 기분이 풀어질 때까지 딸아이가 스스로 잘 친다고 생각할 때까지 열심히 쳐주었다. 아들과도 마찬가지였다. 공이 잘 보이지 않을 때가 되자 집에 가자고 했다. 딸은 더 치고 싶은 눈치였지만, 나는 어두워서 눈이 아프다고 엄살을 부렸다. 딸은 수긍했고, 집으로 돌아왔다.

내내 찝찝했다. 생각해보니 아이들을 데리고 놀이터에 갈 때마다 혼자 놀고 있던 그 아이였던 것 같아 딸에게 물어보니 그 아이가 맞았다. 그는 어느 무리에도 끼지 못했다. 그 아이의 또렷하지 않았던 말투가 떠올랐다. 안타까웠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그 아이의 엄마가 되지도 그 아이의 공부방 선생이 되지도 그 아이의 상담 선생이 될 수도 그 아이의 담임이 될 수도 없었다. 되고 싶지도 않았다. 그 될 수 없다는 사실이 엄연할 뿐이었다. 딸은 그네를 타고 있던 자신에게 그 아이가 다가와 무릎을 만지고 허벅지를 만지더라는 말을 했다. 불쾌감은 극에 달했다. 그냥 있었냐고 하니 동생과 합심해서 그 아이에게 소리를 질렀노라고 아이들이 말했다. 나는 다음에는 그를 무시하고 그냥 집으로 돌아오라고 했다. 나의 그 아이에 대한 호의가 우스웠다.

그런 아이는 누가 돌보아야 할 것인가. 그런 아이들은 도처에 널렸다. 갈수록 사회가 파편화 되어가니 아이들의 놀이 상대는 부모를 넘어서지 못한다. 나와 아이들이 놀고 있던 사이 한 엄마와 아이가 잠깐 배드민턴을 쳤다. 엄마 앞에서 그 아이의 목소리는 컸고 자신감이 있었고, 그 아이의 공은 활기가 넘쳤다. 정서적인 돌봄은 그런 것이다. 어떤 틀 안에 있음, 어떤 보호 안에 있음, 어떤 간섭 안에 있음. 그렇지 못한 사람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럴 기회를 갖지 못한 사람은 어쩔 것인가. 가족의 틀을 벗어나기가 얼마나 힘든 지 너무나 잘 안다. 그런 상황에서 무시로 끼어들고 싶었던 그 아이에 대한 감정적인 거부반응은 나를 당혹스럽게 했고, 불쾌하게 했고, 나 자신에 대한 한계를 느끼게 했다.

“그는 인간이 아니다”는 그는 인간성 외부의 존재, 즉 동물이나 신이라는 의미지만, “그는 비인간이다”는 전혀 다른 어떤 것, 즉 그는 단순히 인간도 단순히 비인간도 아니며, 오히려 우리가 “인간성”이라고 이해하는 것을 부정하지만, 인간 존재에 고유한 섬뜩한 과잉으로 특징짓는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 칸트와 독인 관념론 이후로, 맞서 싸워야 할 과잉은 절대적으로 내재적인 것, 즉 바로 주체성 그 자체의 핵심이다..... 칸트와 함께 광기는 바로 인간 존재의 핵심의 거리낌 없는 폭발을 표지한다..... 아감벤은 무젤만을 완벽한/불가능한 목격자로 설정한다. 무젤만은 집단 수용소의 공포를 완전히 목격한 유일한 존재이며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그것을 증언할 수 없다. 그는 마치 그가 본 공포의 “검은 태양에 불타버린”것과 같다. ...... 나와 이러한 사건의 관계는 언제나 그것을 완전히 목격하는 누군가에 의해 매개되며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더 이상 그것에 관해 보고할 수 없다. ...... 즉 타자의 상처 입기 쉬운 얼굴에서 발성되는 무한한 부름에 “내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대답할 때, 우리는 윤리적 주체가 된다. 그런 한에서, 우리는 무젤만은 정확히 더 이상 “여기에 내가 있습니다!”라고 말할 수 없는 자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앞에서 더 이상 “내가 여기에 있습니다!”라고 말할 수 없다. ........무젤만과 마주칠 때, 우리는 그의 얼굴에서 그/그녀의 상처받기 쉬운 상태 속에 있는, 우리의 책임성에 대한 무한한 부름으로 우리에게 말 건네는 타자의 심연의 흔적을 식별할 수 없다. 그 대신에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일종의 장님 눈동자 굴리기, 즉 깊이의 결여이다. 그러므로 아마도 무젤만은 영도의 이웃, 그와 어떤 감상적인 관계도 불가능한 이웃일 것이다. [이웃] 254-257p

나는 그 아이를 무섭다고 했다. 그것은 어찌할 수 없는 무기력의 말이었다. 나는 그를 위해 내 아이들의 즐거움을 빼앗고 싶지 않았다. 그보다는 내 아이들의 감정적 상태에 관심이 있었고, 나의 옹졸함은 한없이 그 아이에 대한 내 마음의 불편함으로 돌아왔다. 그는 괴물이 아니었지만 내겐 괴물처럼 느껴졌다. 내가 위선으로 또는 동정심으로 그 아이에게 계속해서 마음을 쓰고 그 아이와 놀아주게 될 때, 내 아이들은 소외 될 것이다. 절대로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내 마음의 어떤 가닥을 잡은 그 아이가 파도처럼 밀려들어올 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감당할 수 없는 공포로까지 느껴졌다. 이것이 모성의 한계다. 절대로 가족의 선을 넘어설 수 없는 것, 감당할 수 없는 것을 감당할 생각이 없는 것. 그러니 사회가 필요한 것이고, 그러니 진정한 의미의 정치가 필요하다. 성숙하지 못한 부모는 자식들을 내팽개칠 것이고, 사회가 감당하지 못한다면 그는 소외되다가 범죄자가 될 것이다. 도둑이 될 것이고, 살인자가 될 것이고, 간섭 없이 자라 절제를 모르는 부랑자가 될 것이다. 물론 아주 축소된 의미의 정치에 대한 말이다.

이 책에서 이웃의 의미는 다양하다. 태어나서 처음 듣게 되는 다른 아이의 울음소리에서 ‘이웃’의 의미는 온다. 본능은 돌볼 상대를 빼앗길 지도 모른다는 공포로부터 ‘이웃’을 알아 볼 것이고, 울고 있는 상대가 경쟁자가 될 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동반할 것이다.

“인간은 부여받은 본능적 자질들에 상당한 공격성이 포함된 피조물”이기 때문에, “인간의 이웃은 그들에게 잠재적인 협력자나 성적 대상일 뿐 아니라, 그들의 공격본능을 자극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인간은 이웃을 상대로 자신의 공격본능을 만족시키고, 아무 보상도 주지 않은 채 이웃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이웃의 동의도 받지 않은 채 이웃을 성적으로 이용하고, 이웃의 재물을 강탈하고, 이웃을 경멸하고 이웃에 고통을 주고, 이웃을 고문하고 죽이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다. [이웃] 9p

‘맨 몸으로 와서 맨 몸으로 간다’는 말이 있다. 맨 몸으로 살아남기 위해 인간은 무섭게 싸워야 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는 것처럼 들린다. ‘프리드리히 셸링은 이미 주체를 모든 것이 되려는 무의 끝없는 분투로 정의하였다.’(책249p) 돌봄을 받지 못하고 맨몸으로 세상과 맞설 때 얼마나 헐벗고 고통스러울 것인지 돌봄 아래에 있는 이들은 잘 느끼지 못한다. 한 번의 실수나 고통이 트라우마로 남는 섬세한 인간인지라 고통으로 단련된 누군가를 알아보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고, 그가 얼마나 무서운 존재로 돌변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무감하다.

종교적이건 세속적이건 회의적인 지도자들에게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은 합리적인 것과는 전혀 동떨어진 것으로 보였으며, 사실 지극히 수수께끼 같은 것으로 생각되었다. 과연 그것은 우리에게 정확히 주체성과 책임 그리고 공동체의 본질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하는 수수께끼 같은 것이다. 14p

사실 한 개인으로서 책임의 범위는 가족을 넘어설 수 없다. 그동안의 일부일처제가 만들어온 틀의 책임성일 것이다. 가족을 넘어서는 소외된 어떤 존재 그 존재의 고통이 만들어낸 무서움을 한 개인이 감당할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법의 힘을 필요로 한다. 내가 감당할 수 없으니 공동체가 감당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게 된다. ‘법과 보편성의 전 영역은 친하지 않은 타자에 대한 그리고 타자를 위한 이러한 책임성에 근거를 두고 있다. 내가 나의 작은 세계와 그 소유를 포기(‘잠시중지’가 아닐까)하고 타자의 기준에서 사태를 보려고 시도할 때, 나는 정의와 보편적인 법의 영역에 들어선다.(책232p)' 돌봄을 받지 못한 어떤 존재, 소외의 사각지대에서 외로움에 떨면서 오드라덱이 될 수밖에 없었던 존재에 대한 책임을 나 아닌 나와 같은 많은 자들의 암묵적 합의에 의한 힘의 균형에 의해 만들어낸 어떤 이상태가 져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극단의 말로 호명된 것은 아닐까. ‘이웃’은 연민이나 동정을 싫어한다. 그는 자신의 채워지지 않는 욕망의 극단을 추구한다. 손 하나를 주면 팔을, 팔을 주면 몸을 요구한다. 그러니 이웃을 사랑하는 일은 전 존재를 거는 위험한 일이 된다. 쉽게 책임 질 수 없지만 이웃은 늘 눈앞에서 극단의 위협으로 존재한다. 그 위협이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에 극단의 위엄을 부여한다. 이런 의식이 어쩌면 서양 시민 의식을 형성시켰던 교양에 담긴 독(毒)이었을 것이다.

1930년대 말의 막스 호르크하이머의 모토, 즉 “파씨즘에 대해 말하기 싫다면, 자본주의에 대해서는 입을 닥쳐라”를 다음과 같이 바꾸어 쓸 수 있는 것이다. 오드라덱, 그레고르 잠자, 그리고 무젤만에 대해 말하기 싫다면, 너의 이웃 사랑에 대해서는 입을 닥쳐라 책 16p

극단의 위협으로 간주되는 ‘이웃’은 언제든지 ‘나’로 대체될 수 있다. 나는 ‘이웃’으로 변질 될 수 있고, ‘이웃’은 언제든지 ‘나’로 변질될 수 있다. 아니 사실 ‘나’는 ‘이웃’이다.

나는 내가 실정적으로 이러한 질서의 일부로서 존재하는 한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정확히 내가 존재의 질서 속에 있는 구멍인 한에서, 전체 존재의 질서에 대한 위협이다. 그와 같이, 무無로서의 나는 모든 것에 손을 뻗치고 전유하려는 분투이다. 오직 무만이 모든 것이 되기를 욕망할 수 있다. 프리드리히 셸링은 이미 주체를 모든 것이 되려는 무의 끝없는 분투로 정의하였다. 반면에 현실의 한정된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실정적인 생활은 정의에 따르면 순환과 재생산의 순간이다. ........중략........ 즉 우리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타자들을 죽여야 한다는 사실에 대한 냉혹한 인정은 우리 자신의 존재할 권리에 대한 레비나스의 문제제기가 감추고 있는 진실이다. 책 249-251p

나는 내가 아니다. 나는 가족의 간섭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가족의 간섭은 내 안의 타자를 형성한다. 나는 지역 공동체의 간섭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지역 공동체의 눈은 내 안의 또 다른 타자를 만든다. 나는 국가의 간섭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국가는 내 안의 또 다른 타자가 된다. 나는 나이기 전에 이미 이웃이었다. 가족이었고, 지역 공동체였고, 국가였다. 처음 그것을 깨닫는 순간 나는 나가 되었다. 내가 나를 보고 검열한 순간 주체가 도래할른 지도 모른다. 그것이 주체인지도 모른 채로. 내가 나를 알아보는 행위가 쉬울 수 없다. 나를 가족이란 타자에게 맡기지 못한다면 행복할 수 없다. 나를 지역 공동체의 시야에서 한 치라도 벗어나게 한다면 나는 외로울 것이고, 내가 국가를 벗어나게 된다면 나는 사막에 떨어질 것이다. 그러니 모든 곳을 타향으로 생각하는 존재가 될 때에야 헐벗은 존재가 될 때라야 비로소 나는 나를 알아볼 것이다. 삶은 쉽지 않을 것이고 수많은 산을 넘는 목마른 외로움에 치를 떨 것이다.

“고향을 감미롭게 생각하는 것은 아직 주둥이가 노란 미숙자이다. 모든 장소를 고향이라고 느낄 수 있는 자는 이미 상당한 힘을 축적한 자이다. 전세계를 타향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먀말로, 완벽한 인간이다” [언어와 비극] 가라타니 고진, 도서출판 b 280p

생 빅토르 후고의 [디다시카리온]의 일절이란 저 글을 가라타니는 고향을 감미롭게 생각하는 것을 ‘공동체의 사고’로 조직되어진 유한한 내부(코스모스)가 조직될 수 없는 무한정한 외부(카오스)라는 이분법에 기초하고 있다고 설명하고, ‘모든 장소를 고향이라고 느낄 수 있는 자’란 이른바 코스모폴리탄, 공동체를 넘어선 보편적인 이성이나 진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전세계를 타향으로 생각하는 자’라는 것은 이른 바 데카르트-스피노자인 것으로, 완벽한 인간인데 모든 공동체의 자명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라 설명하는데 이는 곧 모세의 사막과 같다. 이 말은 곧 ‘나의 기본적인 상황은 나 자신에 맞서는 영구 투쟁이다. 나의 삶을 자연스럽게 끌어당기는 특수하고도 친숙한 세계 속의 자기중심적 뿌리내림과 타자에 대한 책임성이라는 무조건적인 부름 사이에서 나는 영원히 균열된다.(책231-232p)로 대체될 수 있을 것이다.

비인격적 상징질서가 없다면, 어떠한 상호주체성도, 인간들 사이의 대칭적이며 공유된 관계도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제3자 없이는 두 입장들 사이에 어떠한 중심축도 있을 수 없다. 만일 큰 타자의 기능 작용이 중지된다면 친한 이웃은 괴물 같은 사물에 부합할 것이다. 책 230p

우리는 용산 참사에서 폭력과 무관심의 얼굴을 발견했다. 거기에 법은 없었다. 국민의 안전하게 살 권리가 없었다. 자유민주주의의 기본권은 쉽게 침해당했다. 쌍용자동차의 자살 행진은 대다수의 침묵으로 인해 그들을 무젤만으로 만들었다. 삼성반도체 사업장에서 중금속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백혈병으로 근무력증으로 죽어간 죽음들도 보았다. 자살밖에는 할 수 없었던 비정규직 방송작가의 투신도 보았다. 언론은 그들의 말하려는 의지를 꺾었고, 정부는 그들과 말하려 들지 않았다. 당연한 말들이 무시당하는 사회가 되었다. 이걸 소외라고 말하면 질려하는 사람들 속에서 또 소외라고 말해야하는 무기력증을 느껴야 한다. 원자력 발전소가 조용히 멈추어도 나는 모른다. 원자력 발전소의 전기에 의해 전기가 켜져도 35도가 그냥 넘어가는 무더위 속에서 에어콘은 켜야만 잠을 잘 수 있다는 부름에 그냥 답한다. 가장 무서운 건 나다. 아이를 낳았고, 아이의 부름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한없이 가족의 틀 속으로 파고드는 나다. 아이들을 원자력의 불가항력적인 위협 앞에 둔 나며, 천정부지로 솟아오르는 석유 값밖에는 남겨줄 것이 없는 나며, 그와 더불어 오르는 물가를 그냥 바라보는 나며, 매년 무섭게 더워지는 더위 속에 지구 온난화가 더 심해질 것을 알면서도 에어콘을 트는 나며, 나는 틀지 않는다면서도 남을 설득할 마음을 낼 수 없는 나며, 대체 에너지나 대안을 꿈꾸는 누군가를 밀어줄 힘을 조금도 가지고 있지 않은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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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 스완네 집 쪽으로 1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창석 옮김 / 국일미디어(국일출판사) / 199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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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은 병원에서 병과 싸우다 죽어갈 것이고,

어떤 사람은 예고 없이 돌연사로 죽어갈 것이다

최근 돌연사가 늘었다고 한다

주변에서 돌연사는 아니지만 주변 사람들과 인사도 못하고

저 세상으로 간 사람들을 보았다

죽음이 갑작스럽게 찾아 온다는 것은

죽음을 준비할 수 없다는 것은

우리 삶이 그만큼

불투명하고

어떤 예의나 범절을 갖추고 있지 않다는 반증이다

사람은 돌연 죽는다

돌연 죽지 않기 위해 노력하면서

삶을 사는 것도 결국은 잘 죽기 위한 노력에 불과하다

안 죽기 위해 사는 삶이나

때 되면 죽을 테니

지금을 맘대로 사는 삶이나

과연 차이가 있는 지 의문이다

 

'소파 위, 등불 아내, 붉고 둔하고도 속된, 병약한 얼굴을 한, 알지 못하는 한 노부인이 기진맥진한 자세로 꿈꾸는 듯, 좀 멍한 눈을 책 위에 굴리고 있음을 언뜻 보았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5권180p

 

 내 주변에 낮익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때로 나를 견디고, 때로 나 때문에 행복하고, 나 때문에 불행할 것이다. 그들은 끝없이 변하고, 그 변화는 멈출 수 없다. 달리는 시간 위에 있는 우리가 돌아가는 지구 위의 우리가 평화를 구할 수 있는 건지 의문이다. 통합 진보당 사람들이 당권을 위해 비리를 저리른다 하여 화가 솟았지만, 그들은 달리는 시간 위에 불안한 사람들 아닌가 현재를 무언가를 위해 보험처럼 들고 있는건 아닌가 그러니 그들에게 도덕의식을 요구하는건 부당한 것은 아닌가. 유독 그들에게만 어떤 청빈이나 어떤 대단함의 기준을 들이대는건 우스운 일은 아닌가. 결국 너도 변할 거니까. 결국 너도 늙을 테니까. 결국 너도 어느 순간 이기적으로 돌변할테니까. 이렇게 생각해놓고 나면 세상은 참 한심하고, 별볼일 없는 것들로만 이루어져 있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진하게 자신의 신념을 위해 병적인 도덕성을 위해 소심하게 자신과 또는 타인과 사투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실 이 나라의 현실이 다른 나라보다 어떤 측면에서 불합리하지만, 합리적이라는 그 나라는 그렇게도 좋기만한 건지는 모르겠다. 인간들이 사는 어디라고, 고통이 없을까. 돌아가는 시간이 천천히 돌아주기는 할까. 사람은 매순간 다르게 판단하고 느끼고, 주변을 겪어내기 때문에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다. 그 긴장의 끈을 놓치 않고 꾸준한 사유와 언어로 풀어나가는 이 책은 지리멸렬하고 끔찍하게 적나라하지만 그런 까닭으로 놓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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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콜드 블러드 시공사 장르문학 시리즈
트루먼 카포티 지음, 박현주 옮김 / 시공사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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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큼 읽고 뭘 쓰는건 그렇지만, 생각한다

 냉혈한의 피는 찬가

 그의 손을 잡는다. 과연 차다

 아마 그의 아랫배도 찰 것이다.

 거기에 기가 소외당한 어떤 열등의식으로 들어차 있고,

 돌봄 당하지 못한 먹을 것과 입을 것과

 외로움으로

 그는 무던히도 남들을 원망했을 테니,

 악마가 절로 나는 것인가란 물음에 나는 아니라는 답을 한다

 나도 한때

 구석의 쥐처럼 외로울 때가 있었다. 죽고 싶은 마음과 누군가를 죽이고 싶은 마음과

 내가 갖지 못한 그 모든 것들과

 내가 누려야할 모든 것들 사이에서 상상하고, 또 나를 일으켜 세워야 했다.

  그러나 과연 나는 살인을 저지른 그를 두려움 없이 대할 수 있을까.

 그의 손을 잡을 수 있을까.

 공지영의 살인자처럼이 아니라 정말 끝없이 자신이 저지른 행동으로부터 도망가고, 자신을 정당화시키려는 인간 본연의 욕망을 관망하면서, 그것이 진짜 인간이라는 것을 보면서

 사실 나도 다르지 않음을

 각성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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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투쟁 - 사회적 갈등의 도덕적 형식론 악셀 호네트 선집 1
악셀 호네트 지음, 문성훈.이현재 옮김 / 사월의책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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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아가면서 갈등은 피할 수 없다. 

피하려 하면 비겁해지고 

삶을 적당히 살게 된다 

모든 것을 긍정적인 것으로만 보려하고 

배면을 보려하지 않는다. 

빨리 판단하려 하고, 갈등을 피해가려 하고, 순간을 모면하려고만 한다. 

나이가 들면 그 정도가 더 심해진다. 

.... '인정'은 이미 '이념상' 총체성으로 발전한 의식이 '다른 총체성, 즉 타인의 의식 속에서 자기 자신을 인식하게 되는 인지적 단계를 의미한다. 그리고 '타자 속에서 자신을 인식'한다는 경험을 통해 갈등이나 투쟁이 발생하는 것은, 개인들이 자신의 주관적 요구가 손상될 때에만 타자 역시 내 속에서 자신을 '총체성'으로 재인식하는 지 어떤지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p72 

 어제 나는 아이를 억눌렀다. 아이의 행동의 잘못만을 따지려 했고, 그 배후를 살피려 하지 않았다.  

겉으로 드러난 행동의 잘잘못만 따졌고, 아이의 격한 반응에 당황스러워하면서 

내가 해야할 행동의 강도를 넘어서 버렸다. 

나는 불같이 화를 냈다. 

나는 어리석게 화를 냈고, 

아이의 자존감을 짓밟아 버렸다. 그리고 지금 아이는 내 안에서 생생하게 살아 있다 

나의 잘못과 내가 인정하지 못한 아이의 총체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헤겔이 일생 동안 몰두한 정치철학적 과제는 개인의 자율성이라는 칸트의 이념에서 단순한 당위적 요청의 성격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p33 

고민한다. 아이는 무조건 자유로워야 하는가. 아이는 무조건 억압없이 자라야 하고, 

아이는 아무런 조건 없이 존중 받아야 하는 것인가 

나는 나를 반성하면서 또 아이를 살핀다. 나를 살필 거라면서 아이의 행동의 잘잘못을 따진다. 

헤겔이 일생 동안 몰두한 정치 철학적 과제가 개인의 자율성이라는 칸트의 이념에서 단순한 당위적 요청의 성격을 제거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막연하게 나와 아이의 갈등 상황을 통해 생각하게 된다.  

아이가 한 독립적 개체라고 했을 때, 아이의 자율성은 나에 의해 침해받아서는 안된다. 아이는 

하고싶은 대로 할 권리가 있다. 하지만 그 자율성의 테두리는 나라는 부모에게 틀지워져 있고, 

아이가 그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는 한 아이는 내가 만든 경계를 함부로 넘어가서는 안된다 

그러니 아이는 그냥 자유로운 아무런 조건없는 자유로운 존재가 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어른인 나는 아이의 자유로워야 할 권리를 빼앗아야 하는 것일까. 

내가 경계를 만들었다고 해서 아이가 무조건 그 경계 내부에서만 존재해야하고, 그 경계의 조건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아이는 틀지워진 경계 안에서만 있지 않다.  

나와 동등한 존재적 조건을 가지고 

세상에 있다. 한마디로 총체적으로 존재하는데, 내가 만든 경계를 함부로 행사해서는 안된다. 

여기에 '인정'의 미묘한 역학관계가 있다. 아이는 어리고 아직 나약해서 경계를 받아들여야 하고,  

그 경계 안에서 보호를 받아야 한다. 하지만 그 경계에 머물게 되면 나약한 채로 있고, 한 인간 존재가 치뤄야 할 세상과의 투쟁을 해낼 수 없을 지도 모른다.  

헤겔이 당시 지니고 있던 생각은,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제도를 실천적, 정치적으로 관철하려는 사회 내적 동력이 바로 자신의 정체성을 상호적으로 인정받기 위한 주체들의 투쟁에서 비롯한다는 것이었다. 33p 

헤겔의 변증법에서 '투쟁'이란 용어는 아주 중요하게 사용된다.  어른들은 자주 말했다. 세상에 쉽게 얻어지는 건 없다고. 어렵게 얻는 만큼 어렵게 지키는 것이라고, 

나는 그 말에 동의한다. 하지만 '투쟁'이란 용어가 지닌 부정적 어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정신적 이상은 투쟁없는 삶이지만, 세상이 투쟁없는 삶을 쉽게 용인하지 않는다. 

 '정신사적으로 볼 때 근대 사회철학의 등장은 사회적 삶을 근본적으로 '자기보존'을 위한 투쟁관계로 규정하려는 계획에 따른 것이다. 예를 들어 마키아벨리의 정치 저술에서 주체들이란 자신의 이해를 둘러싼 지속적 경쟁 속에서 서로 대립하는 정치적 존재로 파악되고 있다. 35p 

'주체들이란 자신의 이해를 둘러싼 지속적 경쟁 속에서 서로 대립하는 정지적 존재'로 파악되고 있다.  

자칫 느낌이 좋은 소설과 영화는 부모와 자식간에는 ' 자신의 이해'나 '지속적 경쟁'의 상태를 제거해 버리는데 과연 그것이 옳은 지 의심스럽다.  

관계에도 긴장은 있다. 부모의 이해관계와 자식의 이해관계가 서로 집요하게 작용하지 못할 때 그 관계는 이미 어느 한쪽의 이해관계에 먹혀 버렸다. 대부분의 위대한 아들과 희생만하는 어머니의 관계에서 보이듯이. 그리고 위대한 아들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자신의 작품에서 어머니의 위대성을 들춘다. 하지만 그 위대성은 어머니의 하인됨의 위대성, 묵묵히 자신의 손발이 되어 주었던 그 기형성의 위대성은 아니었을까. 거기에 과연 정상적 인정의 자를 들이댈 수 있을까.  

부모 자식간에도 '자신의 이해를 둘러싼 지속적 경쟁'은 있고, 그로 인한 대립은 있다. 그 대립이 나쁜 것은 아니다. 

나쁘다고 판단할 필요도 없다. 

서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된다. 

호네트의 인정 개념을 너무 나이브하게 생활에 적용하는 지도 모르겠지만, 

사람이 사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내면에 자신의 이해관계를 두고 

상대를 바라보는 투쟁이라는 의미에서 

그 투쟁에 의해 생생하게 살아오는 타인의 의미에 의해서 역동적으로 살아난다. 

호네트가 들고 나온 인정 개념이 

하버마스와는 달리 인간의 상호주관적 관계가 담론에 참여하여 더 나은 논증을 제시하고 이를 통해 보편적 동의에 도달하는 언어적 관계로만 환원되지는 않는다. 사랑, 권리, 사회적 연대 등은 하버마스의 틀에 비해 광범위한 상호주관적 관계로 우리를 인도하여, 하버마스에게서는 차츰 사라져간 심리적 현상이나 전언어적 영역에 대한 접근 또한 가능하게 한다. 21p  옮긴이의 말 중 

 타인의 총체적 조건을 이해하기 위해 나의 총체적 조건을 살핀다. 면밀히 살피고 냉정하게 판단한다. 그 판단의 여하에 따라 타인과의 의사소통은 가능해질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하버마스가 제시하는 담론의 장은 어쩌면 너무 이상적 지식적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의사소통에 의해 사회적인 문제가 다 해결될 수는 없을 것이다. 호네트가 말하는 '좋은 삶'이 호네트가 드는 논거들에 의해 바야흐로 등장할 수 있을 지 의심스럽지만, '인정'이란 개념은 중요하다. 

'인정'의 복잡성은 주변에 널려 있다. 

노동자가 사측과 말을 하려 하지만, 사측은 모르는 척 입을 닫아 버린다. 

거기에 답은 없다.  

어제 아이에게 소리 지르는 순간 아이는 부모를 경멸하게 된다. 

거기에 정상적인 소통의 장은 만들어질 수 없다. 

뒤늦게 깨달은 부모가 아이로 하여금 말문을 열개 하려고 하지만 되지 않는다. 

그리고 부모는 끝내 아이를 이해할 수 없는 채로 

또 다른 일상적 아침을 맞았다.  

태연하게 아침을 먹고, 학교로 간다. 태연하게 날씨는 흐리고, 아이의 우울한 마음 상태와 다르게 

흐린 날씨에도 불구하고 

태양의 은총아래 그다지 어둡지 않다. 고딕식의 음침함은 어울리지 않는다. 

우울함을 과장할 필요가 없다 

또 다른 아침이 왔고 

공기의 흐름은 그렇게 절망적이지 않다 

이런 아침은 수없이 많은 아침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시간은 그 태연함으로 인간을 길들여 왔다. 

지금 버티면 

또 다른 시간은 온다. 

하지만 쉽게 오지는 않는다. 

부당하게 당한 사람이 따지러 가는 아침이다. 하지만 상대는 없다. 

할 말을 가슴에 품고 온 사람을 적당한 웃음으로 무시해 버린다 

그리고 

포즈를 취한다. 선함의 포즈 

자신은 괜찮은 사람이라는 포즈 

당한 사람의 얼굴은 일그러지고 우울하다. 

억압하고 누르고 폭력을 가하는 사람의 일상은 멀쩡하고 너무 정상적이고 

온갖 명품과 기품으로 가득한 이는 화면을 향해 미소만 날린다 

자신을 존경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미소 

자신을 닮으라는 미소 

상대를 인정하지는 않지만 

자신을 인정하고 존경하고 따라하라는 미소 

거기에 인정이란 개념이 끼여들 틈은 없다. 

만인의 만인을 향한 투쟁이 

정치적으로 변할 때 

억압하는 자는 자유롭다 

만인이 만인을 향해 칼을 휘두를 때 

우리는 전체주의적으로 아주 평균적으로 단순하게 변한다. 거기에 답은 없다. 

'인정'은 어렵다. 

부모가 자식을 인정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워서 

피눈물을 흘리는데 

하물며 다른 관계에서랴. 

직장 동료와의 관계에서 상사와 부하직원의 관계에서 

채무자와 채권자의 관계에서 

그리고 대통령과 그 국민들의 관계에서 

'인정'의 의미는 중요하게 

기본적으로 자신의 이익을 마음에 두고 바라볼 줄 모른다면 

말놀음의 희생양이 되기 쉽다.

좀 똑똑 해지길, 좀 이기적이길  일개 개인은 거대한 말에 줏대없이 휘둘릴 필요가 없다. 

특히나 그 사고의 지반이 약하다면 어떻게 해야할 지. 

사실 똑똑하게 이기적이어지기 위해 공부한다. 

집요하게 공부하고 그 날카로운 눈으로 인정을 받아내기 위해 

그러니 적당히 살다보면 인정을 받을 수 없다 

만인의 만인에 의한 투쟁이 무서운 이유는 거기에 있다. 

나이브하게 현실을 

똑똑하기 때문에 누구를 존경할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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