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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생각은 사양합니다 - 잘해주고 상처받는 착한 사람 탈출 프로젝트
한경은 지음 / 수오서재 / 2019년 11월
평점 :
저는 오랫동안 거절을 못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거절한다는 건 미움을 받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었거든요. 어떻게 '싫어요'라는 말을 할 수 있는 건지. 제 아이가 열몇 살 때 제가 시키는 일을 하기 싫다며 투덜거리는 걸 본 엄마가 그러시더군요. '너희 엄마는 지금껏 한 번도 싫어요라고 한 적 없는 데.' 아이는 여전히 열몇 살이므로 제가 싫다는 말을 하게 된 지 몇 년 안되었다는 이야기겠죠. 엄마와 함께 한 세월은 길지 않았기에 싫다는 말을 할 필요도 없었겠지만 편안해진 후에도 그랬다는 건 여전히 나에게는 미움받고 싶지 않다는 간절함이 있었나 봐요. 하지만 싫다는 말을 할 수 있게 되니 더 친해졌어요.
싫은 건 싫다고 말하는 건 무척 중요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의사 표현을 해본 적 없는 경우엔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제가 지금 감히 아버지는 언급도 못하잖아요. 거절했어야 하는 일들을 거절하지 못하고 나 하나만 참으면 된다는 마음으로 살아온 날들에 크게 반항 한 번 하고 집을 나갔던 이후 저는 세상 나쁜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괜찮아요. 버림받을 것이 두려워 거절하지 않고 복종하고 살아왔던 날들 속에서도 저는 나쁜 아이라고 불렸었으니까 변한 건 없죠. 다만 그때보다 좀 자유로워졌을 뿐. 그러나 지금도 여전히 아버지께 거절하는 건 기절할 정도의 용기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원하는 것을 하기보다, 원하지 않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사는 것 같을 때가 있다. 마치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하기 위한 생사 게임처럼 말이다. 내가 기대고 있는 벽은 원래 비스듬한데, 그걸 바로 세우겠다고 온 힘을 다해 벽을 밀어붙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완벽한 수평과 수직은 십자가가 될 뿐이다.
-p.265
저는 그렇게 착한 사람이었어요. 그러다 보니 스트레스가 엄청났죠. 그 스트레스는 저 자신을 파괴하기도 하고 괴팍하고 까칠한 성격으로 나타나기도 했어요. 동생에게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내거나 친구에게 말로 상처를 입히기도 했죠. 지금은 극복했지만 여전히 아버지에게는 힘들어요. 폭력에 의한 학습일 테죠.
분노는 착한 사람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누구나 경험하는 가장 원초적이고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분노가 이렇게 인간적인 감정임에도 불구하고 착한 사람들은 유난히 그 감정을 느끼지 못하거나, 적절하게 표현하지 못한다. 그러다가 한계에 도달하게 되면 결국 패배감을 느끼거나 언젠가는 뒤틀린 공격성으로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
-p.83
<당신 생각은 사양합니다>를 읽으며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좋은 구절이 너무 많았어요. 내가 왜 거절 못 하는 사람이었는지를 깨닫기도 하고 생각해보기도 했습니다. 위로가 되기도 했지요. 읽다 보니 내가 앞으로 어떻게 행동해야겠다는 방향도 생겼습니다.
그러나 중반쯤 되니 묘한 반항심이 생기더군요. 저자는 그렇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환경이었으니 그랬겠지. 자기가 그런 환경에 대해 뭘 안다고. 극단적인 상황이라거나 좀처럼 말할 수 없는 상황 같은 거 모르니까 편하게 그러는 거겠지. 직장에서나 가정에서나 학교에서나 사람이 그렇게 딱 거절하고 그러면 얼마나 미움받는지 알기나 해? 사랑받으려고 노력하는 게 왜 나빠?라고 생각했어요. 미움받기 싫다는 게 반드시 사랑받는 것과 연결되는 건 아니지만 사람이 융통성 없이 저렇게 굴면 사회생활은 불가한 거 아닌가 하고, 히키코모리에 가까운 제가 투덜거렸죠.
그러나 중반 넘어서부터 드러나는 저자의 가정사와 후반의 엄마 이야기를 읽으며 마음이 불편해졌습니다. 저자에게 미안해졌어요. 내가 뭘 안다고. 정작 모르는 건 저였습니다.
책을 다 읽고 뒤표지를 보고 나서야 알게 된 건데요. 이 책은 마음 건강을 위한 심리 책, 자기 계발서 같은 건 줄 알았는데 에세이였습니다. 그러고 보니 자기 계발서와 에세이 사이에 있는 책 같아요. 우리에게 하는 이야기임과 동시에 자신에게 하는 말인 것 같기도 해요.
참 좋은 책이었습니다.
만일 1) 싫은 사람의 부탁도 잘 거절하지 못한다면 2) 거절하느니 차라리 맞춰주는 게 편하다면 3) 인정받지 못하면 쓸모없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4) 욕 좀 먹는 게 죽기보다 싫다면 5) 눈치 보느라 말 못 하고 이불킥만 날린다면 6) 내가 진짜 하고 싶은 게 무언지 모르겠다면 이 책을 읽어보셔요. 스스로 생각할 기회가 생길 겁니다. 관계에서 늘 약자의 위치에 서있던 '내가' 그 위치에서 벗어나 자신의 길을 갈 수 있게 될지도 몰라요. 이 책은 본격 착한 사람 극복 에세이거든요.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은 이미 내 안에 다 있다. 사랑도, 인정도, 행복도, 자유도 내 안에 있다. 그러니 타인에게 받고 싶은 칭찬과 인정을 스스로에게 해주자. 남이 해주는 건 한계가 있지만, 내가 해줄 때는 받고 싶은 만큼 원 없이 받을 수 있다. 손발이 오그라들도록 나를 추켜세워주자.
"정말 대단해!","네가 최고야","해낼 줄 알았어!"."지금까지도 정말 잘한 거야!"
우리가 그토록 듣고 싶은 말이 아닌가.
-p.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