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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령 1
전형진 지음 / 비욘드오리진 / 2022년 8월
평점 :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금주령을 내렸던 지도자들은 많았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들의 의도대로 민초들이 행복해진 적은 없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오히려 밀주를 만들어서 유통하는 조직이 세력을 확장하는 데 도움을 주었으니 이는 누구를 위한 정책인지 원. 알 수가 없는 노릇입니다.
대개 금주령을 배경으로 세력을 확장하는 갱스터들의 이야기라고 하면 미국과 같은 서양권을 떠올리기 쉬운데, 이번에 읽은 정형진 장편소설 <금주령>은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영조는 쌀이 부족해 배불리 먹지 못하는 백성들을 위하여 귀한 쌀로 술빚는 것을 금한다는 정책을 폈습니다.
겉으로는 그럴듯했지만 그렇다고 하여 백성들이 먹는 쌀이 늘어난 것도 아니고 여전히 배를 곯고 있으니 잘못된 정책임에 분명합니다. 하지만 어명을 거둔다는 것은 자신의 말에 어폐가 있음을 드러내는 일이기도 하거니와 이미 뒷배들과 거래하며 배를 불려오던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힐 것입니다.
그러니 결국 자신이 내린 말을 거두지도 못하고 오랜 시간 질질 끌게 되는데요, 이런 상황에서 표철주를 수장으로 하는 검계 조직만 활성화할 뿐입니다. 이 소설 <금주령>에서 저는 상당히 퀄리티가 좋은 술, 산곡주를 빚는 백선당 사람들을 좋아했습니다.
초반에 그들부터 만나서 정을 붙였기 때문에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 양일엽이라는 사람은 젊은 시절 장길산과 의형제를 맺고 활약했었으나 이후에는 고향으로 돌아와 산곡주를 정성껏 주조하고 있었습니다. 상당한 장인 정신을 가진 이로써 재료의 선정부터 만드는 과정까지 꼼꼼하게 돌보았기에 어디서도 찾기 어려운 품질의 술을 만들어내었습니다.
그의 술을 찾는 사람도 많은 데다 유명세를 치르고 있으니 금주령이 내렸다고 하더라도 다른 이들처럼 밀주를 빚음직도 한데, 그런 길을 걷지 않았습니다. 김치태라는 토호와 수령이 아무리 무섭게 몰아붙이더라도 뜻을 굽히지 않은 데다 백선당에서 일해온 사람들이 배를 곯지 않도록 땅을 사들여 소작하게 하는 인품을 지녔습니다.
그의 아들 상규는 아버지의 뜻을 이으며 산곡주를 만들어왔으나 이후 백선당에 위기가 닥치자 산속에서 아내 난지와 함께 살고 있던 천덕에게 의지합니다. 천덕은 사실 장길산의 아들로 어머니와 함께 갓난아기 때부터 백선당에서 살아왔습니다. 양일엽은 상규와 천덕이 호형호제하길 바랐으나 자신들의 신분차를 의식하고 있었습니다.
아내와 함께 천덕의 거처에서 생활하던 상규는 아내가 죽은 후 한동안 폐인처럼 살았으나 딸 숙영을 생각하며 다시 마음을 잡고 산곡주의 명맥이 끊기지 않도록 수련을 거듭합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위기가 닥치고 마는데, 천덕에게 숙영을 부탁한 상규는 술의 비법인 천남성을 모두 먹어버립니다.
이는 사약에도 쓰이는 재료라 검계들이 그를 끌고 가던 도중 독이 퍼져서 사망하고 맙니다. 이런 가족의 비극을 안고 숙영은 천덕을 아버지로 난지를 어머니로 삼아 자라납니다. 그러나 이후에는 무술을 수련하여 비밀리에 운영하는 색주가나 술집들에 불을 지르며 검계 조직을 혼란스럽게 합니다.
검계의 표철주를 처단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장붕익이라고 믿으며 책을 읽어나갔는데, 숙종, 경종, 영조 시대를 관통하며 주요 요직을 맡았던 무장입니다. 영조의 특별 지시를 받고 금주령을 감독하고 단속하는 금란방을 이끌어 갑니다. 부하들에게도 자상하고 온화하나 범죄자에게는 가차없는 단호함을 지녔습니다.
그런데 그가 더 이상 금주령을 단속하지 못하는 처지가 되어버렸을 때 저는, 좌절감을 맛보았습니다. 그를 따르는 부하들에게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기에 결국 손자인 장기륭은 금란방 관원인 이학송의 도움을 받아서 부모님과 함께 묘적사에서 생활하게 됩니다.
그곳에서 이학송으로부터 무술을 배우고 할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상당한 실력을 갖추지만 뇌물이나 배경이 중요하던 시기라 무과에 낙방하고 맙니다. 의기소침해 있는 그에게 누군가 나타나 길을 알려주니 그가 바로 우리에게 사도 세자로 알려져 있는 이선이었습니다.
이렇게 <금주령>은 사도세자의 등장으로 또 한 번의 전환점을 맞습니다.
마치 모든 스토리를 풀어낸 것 같지만 이 내용은 이 책에서 펼쳐지는 이야기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탁월한 상상력과 사건 전개, 스토리텔링에 정신없이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어느새 가슴팍 한가운데가 웅장해짐을 느낍니다. 세상을 흉흉하게 만드는 것들에 대해서 고민하고 이런 시대에 맞서 싸우는 영웅들을 떠올리게 됩니다.
짜임새 있게 흘러가며 입체적인 캐릭터 설정이 돋보이는 이 소설 <금주령>은 이미 드라마화가 결정되어 있습니다. 심각함을 담보로 하는 사극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이지만, <금주령>이라는 이야기가 다를 것 같습니다. 소설을 그대로 시나리오화해서 진행해도 좋겠다고 여겨질 만큼 진행이 좋습니다.
1,2 권을 합해 1000여 페이지에 달하지만 전혀 버겁다는 기분이 들지 않습니다. 오른손은 쉴 새 없이 책장을 넘기고 눈으로는 활자를 쫓기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들게 됩니다. 드라마로 만나는 것도 좋지만 소설을 통해 상상력의 확장을 직접 느껴보시길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