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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대왕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9
윌리엄 골딩 지음, 유종호 옮김 / 민음사 / 2002년 3월
평점 :
저에게 깊은 사색의 힘이 없다는 걸 슬프게 한 소설입니다.
이 책을 덮고 나서 읽는 중간 중간 메모를 해 둔 것과 플래그를 붙여놓은 부분을 다시 돌이켜 읽어보아도 도대체 처음을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가 알 수 없었습니다.
소년들은 무인도에 표류합니다. 하지만 쥘 베른의 15소년 표류기에서 그랬던 것처럼 합심하며 모험을 즐기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꿈과 희망과 생존이 결합되어있는 신나는 모험의 세계라기보다는 정말로 참혹한, 생존을 위해 나름대로의 세상을 만들어가야만 하는 잔인함이 그들 속에 존재했습니다.
이 소설은 냉전시대에 쓰였습니다. 냉전시대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의 시간이 지났지만, 그 당시에는 미국과 소련의 신경전이 어찌나 팽팽했던지 어린 학생들조차 알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분단국가인 우리나라는 그 냉전시대를 제법 잘 느낄 수 있었고요. 어렸던 저는 혹시 그들이 상대방에게 본때를 보여주기 위해 우리나라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리면 어쩌나하는 염려를 한 적도 있었습니다. 지금도 전쟁이라는 불안감은 우리 곁에서 맴돌지만, 매월 15일 정기적으로 민방위 훈련을 받아온 학창시절은 전쟁이라는 것이 멀지 않은 곳에 있음을 실감케 했습니다.
소설 속의 소년들은 냉전시대에 정말로 원자폭탄을 날리며 전쟁을 하는 통에 비행기로 피난을 가다가 격추당해 불시착 한 무인도에서 전에는 전혀 경험해 보지 못했던 삶을 살게 됩니다. 그 전까지는 서로 모르던 사이였던 영국 소년들은 나이도 대여섯 살에서 부터 열서너 살에 불과한 그야말로 어린 아이들입니다. 잠자리에서 일어나 벗어놓은 잠옷이라도 개키고 학교에 가면 다행일 것 같은 소년들은 돌보아 줄 어른 하나 없는 이 섬에서 자기들끼리 살아가야만 합니다. 구조 될 지도 모른다는 희망과, 세상이 멸망해서 혹은 자기들이 어디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구조 될리 없다는 불안감을 동시에 안고, 그래도 이곳에서 살아가는 동안 질서와 규칙을 만들어가며 어떻게든 잘 지내보려고 했습니다. 소년들은 누가 봐도 지도자격으로 보이는 랄프라는 소년을 대장으로 선출했습니다. 키도 크고 잘생긴 랄프는 자신감이 넘치다 못해 이기적이고 독선적이었으며 건방진 성격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말은 일리가 있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규칙을 중요시하며, 우왕좌왕 발언하다 싸움이 벌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소라를 들고 있는 사람만 발언을 한다는 중요한 규칙도 만듭니다. 랠프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봉화를 꺼뜨리지 않는 것이었는데, 분명 구조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러했습니다. 랠프와 적대 관계에 있는 잭은 사실 봉화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 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냥이라고 생각했기에 성가대원들을 사냥꾼으로 조직하여 멧돼지를 사냥하고 고기를 공급하는 역할을 합니다. 랠프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봉화나 오두막 만들기보다 사냥에 열을 올리는 것인데, 이는 살아가기 위해 중요한 식(食)과 주(宙) 둘 중 하나만을 고집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들은 이미 의(衣)는 포기한 상태라 책을 읽고 있는 제 입장에서는 잭과 랄프의 균형이 이 섬에서 잘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 아닌가하는 생각에 안타까웠습니다. 그들에게는 이런 걱정을 해 줄 수 있는 어른이 없었기에 스스로 어른스럽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어른은 없었지만, 올바른 판단을 하고, 바른 말을 하는 사람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인물인 돼지가 있었는데요. 그의 이름은……. 모르겠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돼지였습니다. 뚱뚱한 외모에 두꺼운 안경을 쓰고 있었는데요. 학교에서 불리던 별명을 이곳에서는 이름처럼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어쨌든 돼지는 이 섬에서 가장 지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판단을 옳았고, 랠프에게나 잭에게나 직언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아닌 건 아니라고 말 할 수 있는 용기도 있었고, 생각도 어른스러웠습니다. 하지만 잭은 물론이고 랠프는 그의 의견을 잘 수용하지 않습니다. 랠프의 단짝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가까웠는데도요. 돼지는 자꾸만 무시당합니다. 저는 어째서 그가 무시를 당하는 지 알 수 없었습니다. 외모 때문인가 생각해 보았지만, 소년들은 섬에서의 하루하루가 지나감에 따라 점점 인간의 모습을 잃어갔으므로 외모는 아닐 거라 생각했는데, 문득 깨달았습니다. 아빠가 없기 때문이었나 보다. 결국 고아나 다름없는 그들이 그런 이유로 돼지를 무시하다니. 돼지는 그 누구보다 더 훌륭한 소년이었는데도 말이죠. 게다가 돼지의 안경이 아니라면 그들은 불을 피울 수도 없었습니다. - 이 부분은 좀 오류가 있는데, 불을 피운다고 하기에 저는 당연히 돼지가 원시일거라 생각했었는데 근시더군요 – 어쨌든. 이 비문명의 섬에서의 유일하다고 말해도 좋을 문명의 도구는 돼지의 안경입니다. 돼지는 문명이며, 이 사회의 지식인이었습니다. 지식인은 미개한 삶속에서 무시당하지만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데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또 하나의 중요한 캐릭터가 있습니다. 사이먼. 사이먼은 샤먼이었나 봅니다. 이야기가 흘러가면서 아이들은 사이먼을 돌았다고 했지만, 사이먼은 영적 매개체였으며, 예언자요, 성직자 같은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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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리 떼는 사이먼의 콧구멍 아래를 간질이고 넓적다리 위에서 등넘기 장난을 하였다. 파리 떼는 새까마니 다채로운 초록빛을 띠고 있었고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낳았다. 그리고 사이먼의 전면에는 <파리대왕>이 막대기에 매달려 씽끗거리고 있었다. 마침내 사이먼은 눈을 뜨고 다시 쳐다보았다. 흰 이빨과 몽롱한 눈과 피가 보였다. - 그리고 태곳적부터 있어 온 피할 길 없는 인식이 그의 응시를 떠받치고 있었다. 사이먼의 오른편 관자놀이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 p. 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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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소년들의 광란의 파티에서 두려움에 눈이 멀어버린 소년들의 희생자가 되고 맙니다. 소년들은 그를 공격하기 전에 이미 인간의 모습을 내 던지기 시작했으며 피맛을 본 성난 짐승이 되어있었습니다. 그들은 멧돼지를 사냥하며 피 맛을 즐겼으며 그런 모습의 자신들을 대견해 했습니다. 사냥이 잘 못 된 것은 아닙니다. 그들도 먹고 살아가야하니까요. 오히려 소년들이 그 무서운 멧돼지를 사냥해서 피도 빼고 가죽도 벗기고 불에 구워가며 먹었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하니까요. 하지만, 그것이 광기의 시작점이 되는 것이기에 그들의 기세가 강해질수록 제 마음속에서의 불안감은 더 커질 수밖에 없었지요. 그리고 꼬마들이 목격했다던, 그리고 조사단이 목격했던 무서운 짐승의 정체가 사실은 낙하산을 멘 채로 죽은 조종사의 썩어가는 시체였다는 사실을 알려주려던 사이먼은 그들의 손에 순교합니다. 그들은 이제 멧돼지 사냥꾼이 아니라 살인자가 되어버립니다. 광기에 사로 잡혀 벌인 일이라지만, 대부분의 소년들은 이제 살인을 할 수 있는 집단이 되었습니다. 랠프는 그런 것이 싫습니다. 변명을 할 여지가 없이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돼지가 그 일을 상기시켜줍니다. 돼지의 한 쪽 안경알이 깨지 던 날, 그들의 손에서 문명이 조금씩 사라져 가는 것을 느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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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몸부림치며 목메어 울었다. 이 섬에 와서 처음으로 그는 울음을 터뜨린 것이었다. 온몸을 비트는 듯한 크나큰 슬픔의 발작에 몸을 맡기고 그는 울었다. 섬은 불길에 싸여 엉망이 되고 검은 연기 아래서 그의 울음소리는 높아져갔다. 슬픔에 감염되어 다른 소년들도 몸을 떨며 흐느꼈다. p.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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