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 듣기 - 귀 기울여 들음으로써 완성하는 사랑
유지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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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는 눈으로 하는 듣기



— 유지영, 《심장 듣기》를 읽고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사람과 연결되어 있다. SNS를 열면 수많은 사람의 일상과 생각이 실시간으로 흘러들고, 우리는 ‘좋아요’를 누르고 댓글을 달며 빠르게 반응한다. 그러나 연결의 수가 늘어난 만큼 한 사람의 이야기에 깊이 머무는 시간도 늘어났을까. 화면에는 상대가 고른 문장과 사진이 남지만 흔들리는 눈동자와 대답하기 전의 머뭇거림, 애써 삼킨 말과 침묵은 쉽게 탈락한다. 상대의 말을 듣는 동안에도 우리는 내가 무엇을 대답할지, 어떤 입장을 드러낼지를 준비한다. 타인의 말은 이해해야 할 하나의 세계가 아니라 내 반응을 생산하기 위한 재료가 되고, 화면은 보고 있지만 정작 사람에게는 가닿지 못한다.

그래서 유지영의 《심장 듣기》가 말하는 ‘온몸을 총동원한 듣기’는 파편화된 관계의 시대에 더욱 큰 울림을 준다. 온몸으로 듣는다는 것은 속도를 늦추고 판단과 대답을 잠시 미룬 채 한 사람의 말과 몸과 침묵 앞에 머무는 일이다. 효율적으로 정보를 수집하는 행위가 아니라 효율을 위해 잘게 쪼개진 관계를 다시 한 사람의 크기로 복원하는 행위에 가깝다. 저자가 말하는 듣기는 귀의 기능인 청음과도 구별된다. 청음이 들려오는 소리 신호를 인식하는 일이라면, 듣기는 그 말의 의미를 해석하고 자기 안에 받아들이려는 주체의 의지가 더해진 행위다. 상대의 말을 제대로 들은 나는 때로 흔들리고 일부가 찢어지며 이전과 다른 사람이 된다.

여기서 책의 제목이 왜 ‘귀로 듣기’가 아니라 ‘심장 듣기’인지 선명해진다. 저자가 말하는 듣기는 음성을 정확히 포착하는 기술에 머물지 않는다. 상대의 눈동자가 향하는 방향과 손짓, 자세와 표정, 말과 말 사이에 놓인 침묵까지 온몸으로 감각하는 일이다. 침묵한다고 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야기할 것이 없어서 침묵하는지, 비밀을 지키기 위해 입을 다무는지, 마음속에서 자신의 말을 정리하느라 잠시 멈춘 것인지는 귀만으로 알 수 없다. 심장으로 듣는 사람은 입 밖으로 나온 문장뿐 아니라 아직 말이 되지 못한 마음에도 자리를 내어준다.

저자가 반려견 밤이와 비언어적 의사소통을 배워가는 대목에서 나는 함께 사는 열일곱 고양이를 떠올렸다. 내 고양이들은 아프거나 기력이 떨어지면 평소보다 더 가까이 다가와 내 몸에 붙는다. 다묘 가정에서 약해진 몸을 지키기 위해 가장 안전한 존재를 찾는 생존본능일 것이다. 그러나 그 본능이 하필 내게로 향한다는 사실에는 우리가 함께 견딘 시간도 새겨져 있다고 믿는다. 내가 아이들의 신호를 배워온 만큼 아이들 역시 내 목소리와 체온, 손길과 밤샘 곁을 안전의 언어로 기억했을 것이다. 생존본능과 사랑은 반드시 서로 반대편에 놓인 감정이 아닐지도 모른다.

달땡이의 림프종과 마루와 새론이의 복막염, 라온이와 풀잎이의 허피스를 함께 통과했다. 가온이의 식도확장증과 유문부 다발성 염증을 돌보았고, 보담이의 자궁 염증 수술과 꽃길이의 발바닥 신경 접합 수술, 아름이의 피부염을 지켜보았다. 아이들의 중성화부터 임신과 출산, 양육에 이르기까지 고통스럽고 위태로운 순간에는 가능한 한 곁에 머물렀다. 말로 어디가 아픈지 물을 수 없었기에 나는 더 자세히 보고, 만지고, 기다려야 했다. 평소와 다른 울음 한 번, 밥그릇 앞에서의 짧은 망설임, 달라진 걸음걸이와 호흡, 몸을 웅크리는 각도는 모두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되는 말이었다. 그 작은 차이를 알아채는 일이 때로는 아이들의 생명과 이어져 있었다.

고양이는 인간의 문장으로 말하지 않지만 결코 침묵하지 않는다. 컨디션에 따라 목소리의 높낮이와 울음의 길이가 달라지고, 눈빛과 꼬리의 움직임, 걸음걸이와 몸을 기대는 방식도 달라진다. 나는 귀뿐 아니라 눈과 손, 오랜 시간 축적된 기억을 동원해 그 말을 듣고 해석하는 일이 좋다. 내가 언제나 옳게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아이들의 신호를 뒤늦게 알아차리기도 하고, 걱정 때문에 작은 변화를 과도하게 해석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완벽히 이해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이해하려는 일을 그만두지는 않는다.

책에는 듣기란 “매 순간 인간을 이해하는 일에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서도 듣는 일이 한 명의 인간을 이해하는 최선의, 그리고 최소한의 행위라는 걸 인정하는 것”이라는 문장이 나온다. 나는 이것이 듣기에 대한 가장 정직한 정의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타인의 내면에 직접 들어갈 수 없으며 같은 사건을 겪어도 서로 다른 감정과 기억을 갖는다. 아무리 오래 듣더라도 한 사람을 완전히 이해했다는 확신에는 오만이 섞이기 쉽다. 그러므로 듣기의 성공은 상대를 남김없이 해석하는 데 있지 않다. 이해에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그 사람을 향해 몸을 기울이는 것, 바로 그 불완전한 시도를 포기하지 않는 데 있다.

이 말은 비인간 존재와의 관계에서도 유효하다. 나는 고양이가 무엇을 느끼는지 완전히 알 수 없고, 아이들도 내가 흘린 눈물이나 두려움의 의미를 인간처럼 이해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때로는 아이들이 밤새 곁을 지킨 내 마음을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듣고 기억한 것처럼 느껴진다. 내가 그들의 언어를 다 알지 못하면서도 계속 귀 기울이는 것처럼, 아이들 역시 내 목소리와 손길에 담긴 마음을 감각했을지 모른다. 심장 듣기란 완벽하게 번역할 수 없는 존재를 이해하려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 태도다. 이해의 불완전함은 관계의 실패가 아니라 서로 다른 존재가 만날 때 반드시 감수해야 할 조건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심장 듣기》는 듣기를 한 사람의 다정한 성품이나 사적인 관계의 기술로만 남겨두지 않는다. 삼각지 역에서 장애인 이동권 시위에 참여한 저자의 경험은 듣기가 개인의 인품을 넘어 권력과 연결된 문제임을 드러낸다. “장애인도 지하철을 타게 해달라”는 외침은 분명 역사 안에 울려 퍼졌다. 그러나 비장애인 시민과 경찰, 지하철을 운영하는 교통 체계는 그 절박한 요구를 동등한 시민의 발언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열차의 안내방송과 역장의 경고는 즉시 질서의 언어로 승인되는 반면, 장애인의 목소리는 시민의 이동을 방해하는 소음과 불편으로 처리되었다. 음성은 모두의 귀에 도달했지만 사회적으로는 말이 되지 못했다.

우리는 들려오는 말을 모두 같은 무게로 듣지 않는다. 어떤 말은 정보와 명령으로 즉시 받아들이고, 어떤 말은 과장이나 투정으로 축소하며, 어떤 말은 아예 소음으로 밀어낸다. 누가 말했는지, 그가 어떤 몸을 가졌는지, 사회에서 어느 자리에 놓여 있는지에 따라 말의 신뢰도와 가치가 미리 결정되기도 한다. 듣기란 단순히 귀의 기능이 아니라 누구의 말을 ‘말’로 인정하고 누구에게 발언의 자리를 허락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권력의 문제다. 듣지 않는 사회는 타인을 침묵시키기 전에 먼저 그의 말을 소음으로 명명한다. 목소리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들을 가치가 없는 것으로 처리되는 것이다.

저자는 시위에 참여한 자신의 정의로움만을 기록하지 않는다. 지친 몸으로 현장에 도착해 경찰의 손에 밀려 바닥에 주저앉았을 때 느낀 서러움, 옆에서 그 모습을 보고 웃던 경찰들의 표정, 자신 역시 피로와 당혹감 속에서 타인의 절박함을 얼마나 끝까지 들을 수 있었는지를 함께 돌아본다. 듣지 않는 권력은 언제나 노골적인 폭력의 모습으로만 나타나지 않는다. 못 들은 척하는 표정, 고통을 구경거리로 만드는 웃음, 모두에게 질서를 지키라고 말하는 듯한 중립적인 안내방송 속에도 숨어 있다. 거대한 사회 구조를 비판하면서도 그 구조 안에 놓인 자기 몸의 피로와 모순까지 감추지 않는 정직함이 이 장면을 구호 이상의 글로 만든다. 타인의 말을 듣는 일은 나를 언제나 옳은 편에 세워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외면해온 것과 내 안의 모순을 함께 마주하게 한다.

“장애인도 시민”이라는 외침과 장애인의 시위를 “역사 안에서 소란을 피우는 행위”라고 규정하는 말 사이에는 깊은 간극이 있다. 첫 번째 말은 장애인을 이동권을 가진 동등한 시민으로 호명하지만, 두 번째 말은 그들을 정상적인 일상을 방해하는 존재로 밀어낸다. 같은 행동도 누가 이름 붙이느냐에 따라 정당한 권리 요구가 ‘소란’이 되고, 절박한 호소가 ‘불편’과 ‘민폐’로 바뀐다. 시민의 권리는 조용히 부탁할 때만 허락되는 호의가 아니다. 지켜지지 않는 권리를 들리게 하기 위해 소란을 피워야만 하는 사람에게 왜 조용하지 못하냐고 묻는 것은 이미 안정된 질서의 혜택을 누리는 사람의 언어일 수 있다. 제대로 듣는다는 것은 목소리의 크기를 탓하기 전에 그 말이 왜 그렇게 커질 수밖에 없었는지를 묻는 일이다.

여기서 《심장 듣기》는 좋은 경청법을 알려주는 에세이를 넘어 듣기의 윤리와 정치학을 다루는 인문서가 된다. 개인의 태도에서 출발하되 그것을 개인의 친절이나 인품 문제로 끝내지 않고, 누가 말할 자리를 얻으며 누구의 목소리가 삭제되는지를 사회 구조까지 밀고 나간다. 제대로 듣는다는 것은 단지 귀를 열어두는 일이 아니다. 지금까지 말로 인정받지 못했던 목소리가 왜 들리지 않았는지, 그 침묵을 만들어낸 질서 속에서 나는 어디에 서 있었는지를 묻는 일이다. 타인의 말을 들으려면 때로는 내가 편안하게 누려온 자리를 비워야 한다. 나로 가득 찬 상태에서는 타자의 삶이 들어올 공간이 없기 때문이다.

《심장 듣기》를 읽으며 나는 듣기가 내가 오랫동안 해온 책 읽기와도 닮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지금 책이라는 도구를 통해 유지영이라는 한 사람의 말을 듣고 있다. 저자는 내 앞에 앉아 있지 않고 그의 눈빛이나 손짓도 볼 수 없지만, 문장은 시간과 거리를 건너 그의 목소리를 내게 데려온다. 나는 한 문장에 밑줄을 긋고, 이해하지 못한 페이지로 되돌아가며, 불편한 주장 앞에서 책장을 넘기지 못하고 오래 머문다. 그것은 귀 대신 눈과 손과 기억을 사용하는 느린 청취다. 독서는 어쩌면 눈으로 수행하는 듣기인지도 모른다.

물론 책을 읽는다고 언제나 저자의 말을 듣는 것은 아니다. 줄거리와 핵심만 빠르게 수집하고, 이미 가진 생각을 확인해주는 문장만 골라 읽는다면 독서 역시 청음에 머물 수 있다. 책을 몇 권 읽었는지 기록하고 결론만 소비하는 동안에는 눈으로 글자를 좇아도 그 안에 담긴 타인의 세계와 만나지 못한다. 독서가 듣기가 되기 위해서는 문장 앞에서 판단을 잠시 미루고, 나와 다른 삶이 내 안에 머무르도록 허락해야 한다. 저자의 뜻을 정답처럼 복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말이 내 삶과 부딪치며 만들어내는 질문까지 받아들여야 한다. 듣기와 읽기는 모두 타인의 말을 내 안에 들임으로써 변화될 가능성을 감수하는 일이다.

책을 듣는다는 것은 저자의 말에 모두 동의하거나 비판을 포기하는 일이 아니다. 다만 책이 자기 이야기를 충분히 펼치기도 전에 내가 가진 취향과 경험으로 결론을 내려버리지 않는 것이다. 나는 책을 펼칠 때 가능한 한 기존의 판단을 잠시 내려놓으려 한다. 낯선 작가의 글과 익숙하지 않은 장르,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소재의 책도 우선 그 세계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들어본다. 사실과 주장에는 검증과 비판이 필요하지만, 한 사람이 어떤 삶을 통과했고 그 경험에 어떤 이름을 붙였는지는 먼저 그의 언어로 들을 필요가 있다. 동의하지 않는 것과 듣지 않는 것은 다르다.

편견 없이 읽는다는 것은 비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비판보다 이해를 먼저 놓는 일이다. 익숙한 장르의 문법이나 유명 작가의 성취를 낯선 책의 기준으로 앞세우지 않고, 그 책이 무엇을 하려는지부터 살펴보는 것이다. 책이 자기 언어와 질서로 충분히 말할 시간을 허락하면 나는 취향의 경계를 넘어 낯선 세계의 재미를 발견한다. 평소라면 선택하지 않았을 장르에서 뜻밖의 질문을 만나고,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소재를 통해 내가 알던 세계가 전부가 아니었음을 배운다. 많이 읽는 일의 가치는 이미 좋아하는 것을 되풀이하는 데만 있지 않다. 내 바깥에서 도착한 목소리를 성급히 돌려보내지 않는 데에도 독서의 기쁨이 있다.


좋은 독서는 이미 잘 들리는 목소리를 반복해서 확인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내 경험과 사회적 위치 때문에 그동안 듣지 못했던 존재의 말을 읽어내고, 누군가의 삶을 소음이나 통계로 처리해온 내 인식의 한계를 발견하게 한다. 책은 전쟁과 가난, 질병과 장애, 차별과 상실을 통과한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 붙인 이름을 내게 들려주었다. 그들의 말을 읽으며 나는 세계가 내 경험만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음을 배웠다. 독서가 타인을 완전히 이해하게 해준 것은 아니다. 다만 이해할 수 없다는 이유로 섣불리 단정하거나 외면하지 않는 법을 조금씩 가르쳐주었다.

저자는 경청이 단순히 듣기만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경험을 통해 과거의 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없도록 변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타인의 말을 제대로 들으면 내 삶이 흔들리고 일부는 찢어지며, 나는 어제와 다른 형태가 된다. 그래서 저자가 경청을 마친 뒤 던지는 질문은 “잘 들었나요?”가 아니라 “무엇이 변했나요?”이다. 이 질문은 독서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책을 얼마나 정확히 요약하고 많은 문장을 기억하는가보다, 그 책을 읽은 뒤 내가 무엇을 이전처럼 생각할 수 없게 되었는지가 중요하다. 책을 제대로 읽는다는 것은 정보를 얻은 채 이전의 나로 돌아가는 일이 아니라 타인의 목소리를 받아들인 탓에 더는 과거의 나로 돌아갈 수 없게 되는 일이다.

한 문장이 오래 지켜온 확신에 균열을 내고, 낯선 삶을 내 안에 머물게 하며, 그동안 소음으로 여겼던 목소리를 비로소 말로 알아듣게 할 때 독서는 눈으로 하는 경청이 된다. 한 권을 다 읽고도 아무 생각이 흔들리지 않고 이미 믿던 것만 더 단단해졌다면, 그것은 독서라기보다 자기 확신을 확인한 일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반대로 한 문장 때문에 익숙한 판단을 의심하고, 쉽게 미워하거나 외면했던 존재에게 다시 질문하게 되었다면 그 책의 목소리는 이미 내 안에 들어온 것이다. 독서를 마친 뒤 내가 물어야 할 것은 무엇을 알게 되었는가만이 아니다. 무엇을 예전처럼 생각할 수 없게 되었는지, 누구의 말을 새롭게 듣게 되었는지, 그래서 내가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물어야 한다. 변화는 제대로 읽고 들었다는 가장 깊은 흔적이다.

나 역시 《심장 듣기》를 읽기 전과 완전히 같지는 않다. 처음에는 듣기에 관한 책을 펼쳤지만, 밤이의 이야기를 통해 열일곱 고양이와 맺어온 관계를 다시 바라보게 되었다. 삼각지역의 장면에서는 듣기가 개인적인 다정함만이 아니라 시민권과 권력의 문제임을 발견했다. 저자가 경청의 본질을 변화에서 찾는 대목에서는 내가 오랫동안 해온 독서의 의미를 새로 정의하게 되었다. 이 책은 내게 새로운 독서 습관을 가르쳤다기보다, 내가 왜 낯선 작가와 장르와 소재를 편견 없이 만나려 했는지를 설명할 언어를 건넸다. 나는 이 책을 요약한 것이 아니라 이 책의 목소리를 들었고, 그 목소리 때문에 내 독서를 이해하는 방식이 달라졌다.

나는 살아남고 싶어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책이 내 삶의 문제에 분명한 답을 내려주기를 바랐고, 무너진 일상을 다시 세우는 방법을 얻고 싶었다. 그렇게 자기계발서에서 시작한 독서는 문학과 과학, 철학과 사회, 역사로 점차 반경을 넓혀갔다. 많은 책을 읽었다고 해서 세상의 답을 모두 알게 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수많은 저자의 말을 오래 듣는 동안 사람과 삶을 쉽게 단정할 수 없게 되었다. 독서가 내게 돌려준 것은 확신의 양보다 질문을 품고 머무를 수 있는 힘이었다.

책 속의 문장은 내가 살아보지 못한 삶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동시에 미처 설명하지 못했던 내 고통과 욕망에도 언어를 건넸다. 타인의 말을 듣는 일이 나를 지우는 과정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타인의 언어를 통과하면서 나는 내 안에 있던 목소리를 발견했다. 책이 나를 살린 것은 삶의 정답을 대신 내려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삶 쪽에서 건너오는 수많은 목소리를 계속 들을 수 있도록 붙잡아주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말이 내 안으로 들어와 내가 혼자서는 찾을 수 없었던 감정의 이름과 삶의 방향을 보여주었다. 나는 타인의 목소리를 들으며 비로소 나 자신의 목소리도 알아들을 수 있게 되었다.

비인간의 몸짓을 인간의 말로 완벽하게 번역할 수 없듯, 한 권의 책을 읽는다고 저자의 내면을 남김없이 이해할 수도 없다. 사람을 마주하고 그의 이야기를 들을 때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타인의 삶을 전부 살아볼 수 없기에 언제나 어느 정도는 오해하고 실패한다. 그러나 이해의 불가능성이 듣기의 무용함을 뜻하지는 않는다. 매 순간 이해에 실패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면서도 다시 눈을 맞추고 몸을 기울이는 것이 한 존재를 이해하기 위한 최선이자 최소한의 행위다. 듣기의 윤리는 완벽한 이해가 아니라 실패 이후에도 타자에게 다가가려는 지속적인 노력 속에 있다.

저자는 “댓글과 좋아요, 구독자 숫자는 폭발적으로 늘었지만 타인의 고통에 진지하게 귀 기울이는 단 한 명의 진지한 청자는 찾아보기 어렵다”고 말한다. 수많은 사람에게 노출되는 것과 한 사람에게 온전히 들리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줄 단 한 사람이 있다는 믿음이 삶을 놓지 않게 하는 힘이 될 수도 있다. 듣기는 거창한 해답을 내놓거나 상대의 고통을 대신 해결하는 일이 아니다. 때로는 눈길을 피하지 않고 그 사람의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곁에 머무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자 최소한의 일이다.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동안 우리는 그가 이 세계에 존재할 자리를 함께 지켜준다.

나는 지금 책이라는 도구로 유지영의 말을 듣고 있다. 그의 문장에 밑줄을 긋고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며, 내가 무엇을 어떻게 들어왔고 또 어떤 목소리를 듣지 않았는지를 생각한다. 어쩌면 내가 그동안 책에서 구했던 것은 정답이 아니라 목소리였을지도 모른다. 살아보지 못한 삶의 이야기, 혼자서는 이름 붙이지 못했던 감정, 사회가 소음으로 밀어냈던 존재의 외침, 절망 속에서도 삶을 놓지 말라고 건너온 수많은 목소리. 그것들을 오래 들은 끝에 나는 타인뿐 아니라 나 자신에게도 조금 더 잘 듣는 사람이 되었다. 책장을 덮은 뒤에도 이 듣기는 끝나지 않는다.

우리는 제대로 듣는 순간 이전과 같은 사람으로 돌아갈 수 없다. 타인의 말이 나를 흔들고 일부를 바꾸도록 허락하는 것이 듣기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심장 듣기》는 더 잘 말하고 더 많이 드러내야 살아남을 것 같은 시대에 말하는 몸에서 듣는 몸으로 옮겨갈 용기를 건넨다. 이제 내게 남은 질문은 얼마나 많은 목소리를 들을 것인가가 아니다. 나는 누구의 말을 말로 인정해왔으며, 한 존재의 목소리 앞에 얼마나 오래, 얼마나 온전하게 머무를 수 있는가이다. 귀로 들을 수 없는 말과 사회가 소음으로 밀어낸 외침까지 놓치지 않기 위해, 나는 오늘도 눈과 손과 기억을 열고 심장으로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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