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의 들판 - 침묵은 어떻게 역사를 드러내는가
마거릿 주혜 리 지음, 장상미 옮김 / 한겨레출판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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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워진 이름은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비밀의 들판》을 읽고


어떤 역사는 기록되지 않아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너무 아픈 기억이라 말할 수 없어서 사라진다.


마거릿 주혜 리의 《비밀의 들판》은 독립운동가였던 할아버지를 찾아가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 책은 단순히 한 명의 위대한 인물을 발굴하는 역사책이 아니다. 저자가 찾아가는 것은 한 사람의 업적만이 아니라, 그 사람이 사라진 뒤 남겨진 가족의 시간이다.


1970년대 미국 텍사스에서 자란 저자는 늘 설명하기 어려운 공허함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질문에 답하고 싶었지만 가족에게 돌아오는 것은 침묵이었다. 가족에게 할아버지는 자랑스러운 독립운동가가 아니라 말할 수 없는 존재였다.


누군가에게는 영광스러운 역사가, 다른 누군가에게는 숨겨야 하는 상처가 될 수 있다. 같은 사건도 그것을 경험한 사람의 위치에 따라 전혀 다른 기억으로 남을 수 있다는 사실이 이 책 전체를 관통한다.


저자가 오랜 추적 끝에 발견한 할아버지는 일제강점기 공주 지역에서 항일운동을 이끌었던 인물이었고, 긴 시간이 흐른 뒤 독립유공자로 인정받는다. 그러나 《비밀의 들판》이 던지는 질문은 단순히 “왜 이제야 그 이름이 돌아왔는가”에 머물지 않는다.


왜 한 사람의 삶은 오랫동안 기록되지 못했는가.

왜 그 가족은 자신의 과거를 말하지 못했는가.

그리고 침묵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은 어떤 시간을 견뎌야 했는가.


역사는 언제나 기록하는 사람의 선택으로 남는다. 무엇이 기록되었는지만큼 중요한 것은 무엇이 기록되지 못했는지다.


한 독립운동가의 삶이 오랫동안 드러나지 못한 것은 단순한 행정적 누락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식민지와 전쟁, 분단과 이념 갈등이라는 거대한 시대의 흐름 속에서 한 가족은 자신의 과거를 쉽게 이야기할 수 없는 삶을 살아야 했다.


가장 마음이 아팠던 것은 한 사람이 감옥에 갇힌 사실 자체보다, 그 이후 남겨진 사람들이 감당해야 했던 시간이었다. 고문과 수감은 한 사람의 몸을 파괴한다. 그러나 침묵된 역사는 남겨진 가족의 삶에도 오래 흔적을 남긴다.


어린 시절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부모의 행동과 선택이 시간이 흐른 뒤에야 시대의 맥락 속에서 다시 보이는 순간이 있다.


책 속 저자의 부친 역시 어린 시절에는 아버지의 기록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가족에게 남겨진 것은 자랑스러운 독립운동의 기억이 아니라 설명되지 않은 수치와 침묵이었다.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왜 그런 삶을 살아야 했는지 알지 못한 채 자란 아이에게 역사는 자부심이 아니라 혼란과 상처로 남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깊이 와닿았다.


이 이야기를 읽으며 나 역시 가족의 역사를 떠올렸다.


나의 증조부는 구한말 고종의 근위대장이었다고 가족에게 전해 들었고, 한일병합 직후 스스로 생을 마감하셨다고 들었다. 그분이 어떤 마음으로 마지막 선택에 이르렀는지 나는 알 수 없다. 다만 한 시대의 질서가 무너지고 자신이 믿어온 세계가 흔들리는 순간을 경험한 한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역사의 상처는 한 사람에게서 끝나지 않는다. 이후 가족이 겪은 몰락 속에서 친할머니는 더 많은 배움과 가능성을 펼칠 기회를 잃었고, 현실 속에서 가족을 부양해야 했다. 숙명여고까지 다녔던 분이 생계를 위해 꿈을 접어야 했고, 영특하고 공부를 잘했던 아버지도 가난 속에서 자신의 가능성을 온전히 펼치기 어려웠다.


어릴 때의 나는 그런 할머니를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할머니를 나와 어머니를 미워했던 사람으로 기억했고, 그 감정은 오래 남았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며 처음으로 다른 질문을 하게 되었다.

“그 사람은 왜 그렇게 되었을까.”

“그 사람이 잃어버린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 질문은 누군가의 잘못을 없애주는 것이 아니다.


상처받은 사람이 반드시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며, 시대의 피해자가 다른 사람에게 또 다른 상처를 줄 수도 있다. 그러나 한 인간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행동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지나온 시간과 함께 바라보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내게 이 책이 인상 깊었던 이유는 이철하를 완벽한 영웅으로만 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두려움이 없는 사람이어서 시대에 맞선 것이 아니었다. 식민지라는 거대한 현실 속에서 무엇이 옳은지 고민했고, 두려움보다 더 중요한 가치를 선택했던 사람이었다. 역사를 바꾸는 사람들은 처음부터 특별한 존재로 태어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들 역시 불안하고 흔들리는 한 인간이다. 다만 자신의 두려움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가 있었기에, 어려운 선택 앞에서 물러서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삶에서 더욱 오래 마음에 남은 부분은 가족을 대하는 태도였다. 그는 시대의 부조리를 비판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가장 가까운 사람들의 가능성 역시 존중했다. 당시 여성의 교육 기회가 제한적이었던 시대에 아내의 배움과 성장을 중요하게 여겼다는 기록은 의미 있게 다가왔다.

사회적 정의를 말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반드시 자신의 가장 가까운 관계 안에서도 같은 태도를 보이는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이 바깥세상의 변화를 이야기하면서도 가족 안에서는 익숙한 질서를 반복한다.


그런 점에서 이철하 지사가 가족이라는 작은 세계 안에서도 한 인간의 성장 가능성을 인정했다는 사실은, 그가 왜 시대의 부당함에 저항할 수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또 다른 모습처럼 느껴졌다.


한 사람이 가진 가치관은 거대한 역사적 선택에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 자신의 주변에 있는 사람을 어떤 존재로 바라보는지에서도 드러난다.

그래서 이 책이 더욱 깊게 다가왔다.


그러나 《비밀의 들판》이 끝내 보여주는 것은 한 독립운동가의 위대한 삶만이 아니다. 역사의 격랑은 영웅 한 사람만 지나가는 것이 아니다. 그 곁에 있던 가족들, 이름 없이 기다린 사람들, 자신의 꿈보다 생존을 먼저 선택해야 했던 사람들이 함께 통과해야 하는 시간이었다.


이철하 지사의 삶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저자가 마주한 것은 할아버지의 용기만이 아니었다. 그 곁에서 긴 시간을 견뎌낸 할머니의 삶이었다. 남편을 잃고, 가족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삶을 뒤로 미뤄야 했던 사람이 있었다. 할머니는 남편의 이름 뒤에만 머무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역사가 무너뜨린 자리에서 가족을 다시 일으켜 세운 또 하나의 주체로 볼 수 있었다.


그녀는 독립운동가의 아내라는 이름으로만 살아간 것이 아니었다. 남편이 남긴 흔적과 불확실한 미래 사이에서 두 아들을 키워냈고, 손주들을 돌보았으며, 흩어질 수 있었던 가족을 붙잡았다.


저자가 “할머니는 우리 모두의 어머니가 되었다”고 표현한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상처를 완전히 극복해서 위대한 사람이 된 것이 아니다. 상처를 품은 채 살아남았고, 그 과정에서 누군가의 삶을 지켜낸 사람이었다.


나는 이 부분에서 가족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는 흔히 역사를 이름을 남긴 사람들의 이야기로 기억한다. 하지만 한 시대를 버티게 만든 힘은 기록에 남은 몇 명의 영웅만이 아니다. 그들의 곁에서 무너진 삶을 다시 세운 사람들이 있었다.

이름을 남기지 못했지만 누군가를 먹이고, 기다리고, 돌보고, 다음 세대가 살아갈 수 있도록 버틴 사람들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제 할머니를 단순히 나를 아프게 했던 사람으로만 기억하지 않는다. 그녀 역시 한 시대의 폭력과 상실을 통과한 사람이었다. 꿈을 잃은 사람이었고, 자신의 가능성을 접어야 했던 사람이었으며, 동시에 끝까지 가족을 지켜낸 사람이었다.


나의 할머니처럼 저자의 할머니가 남긴 것은 완벽한 사랑이 아니라, 불완전한 인간이 견뎌낸 생존의 기록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 불완전함 속에서도 그녀는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삶을 버텨낸 사람이었다. 물론 고통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권리를 만들어주는 것은 아니다. 시대의 피해자가 또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다. 그렇기에 이해한다는 것은 용서하거나 미화하는 일이 아니다. 한 사람의 행동만 바라보는 대신, 그 사람이 어떤 시간을 지나왔는지 함께 바라보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게《비밀의 들판》은 기억에 대한 책이었다. 사라진 기록을 찾아내는 일, 침묵 속에 묻힌 사람들의 목소리를 복원하는 일은 단순히 과거의 사실을 확인하는 작업이 아니다. 그것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상처를 물려받고, 또 어떻게 다르게 이어갈 것인지 묻는 과정이다.


우리는 이전 세대가 남긴 선택과 결과 위에 서 있다. 그들의 용기뿐 아니라 두려움도, 희생뿐 아니라 상처도 때로는 다음 세대에게 이어진다. 그러나 과거가 우리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시간을 어떻게 이해하고, 무엇을 반복하지 않을 것인지 선택하는 일이다.


역사를 읽는다는 것은 결국 타인의 시간을 이해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 타인의 시간이 나의 가족과 나 자신의 시간과 연결되어 있음을 발견할 때, 책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자신을 이해하는 거울이 된다.


시대의 광풍 속에서도 끝내 남는 것은 거대한 이름만이 아니다.


싸운 사람, 기다린 사람, 살아남은 사람이 함께 역사를 만든다.


우리가 기록하는 이유는 과거를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서가 아니다. 누군가의 희생과 누군가의 고통을 함께 기억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같은 상처가 다음 세대에 반복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역사는 영웅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누군가는 싸웠고, 누군가는 기다렸으며, 누군가는 살아남았다.


그리고 그 모든 시간이 이어져 지금의 우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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