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균열내기 - 뒤라스, 카뮈, 에르노를 지나 다만 내가 되기 위해
신유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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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게 되는 것에서 쓰는 것으로

— 신유진, 《나를 균열내기》를 읽고

처음에는 이 책을 작가론 모음처럼 읽기 시작했다. 좋아하는 작가들의 이름이 많았고, 그 이름들이 나란히 놓여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먼저 움직였다. 카뮈, 사강, 아고타 크리스토프, 아니 에르노, 에두아르 루이, 다니엘 페나크, 밀란 쿤데라, 엘렌 식수. 이들은 모두 다른 언어와 시대와 몸을 통과해온 작가들이지만, 책을 읽어갈수록 그들을 묶는 하나의 질문이 또렷해졌다.

작가는 무엇으로 쓰는가.

재능으로 쓰는가. 상상력으로 쓰는가. 문장력으로 쓰는가. 물론 그 모두가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 난 뒤 내게 남은 대답은 조금 달라졌다. 작가는 결국 자신이 통과한 세계의 균열로 쓴다. 고통, 계급, 몸, 언어, 성별, 욕망, 수치심, 상실, 사랑. 이 모든 것들이 한 사람 안에 쌓였다가 어느 순간 문장의 형태로 흘러나온다. 다만 좋은 작가는 그것을 그대로 토해내지 않는다. 삶의 파편을 다시 배치하고, 질문하고, 덜어내고, 구조화한다. 그러므로 작법이란 단순히 글을 잘 쓰는 기술이 아니라, 삶이 나를 통과한 뒤 남긴 잔해를 어떤 형식으로 다시 살아낼 것인가에 대한 태도다.

이 책에서 가장 먼저 나를 붙든 것은 카뮈였다. 카뮈의 부조리는 철학적 개념이기 전에 몸의 감각이었다. 눈을 멀게 하는 빛, 숨을 조이는 더위, 지친 육체. 인간은 생각으로만 세계를 견디는 존재가 아니라 몸으로 세계를 통과하는 존재다. 어머니를 잃은 슬픔조차 태양 아래에서는 추상적인 애도의 언어가 아니라 버텨내야 할 열기와 피로가 된다. 그래서 카뮈의 소설 속 인간은 세계의 냉혹함 앞에서 의미를 쉽게 얻지 못한다. 세계는 인간의 고통에 응답하지 않는다. 그러나 바로 그 무응답 앞에서 인간은 다시 묻는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나는 이 질문이 좋았다. 세계가 고통에 응답하지 않아도 굴복하지 않는 것. 부조리를 없앨 수는 없지만, 그 부조리 안에서 끝까지 인간답게 걷는 것. 그것이 카뮈가 말하는 삶의 방식이라면, 작법 역시 이와 닮아 있다. 글쓰기는 세계가 주지 않은 의미를 억지로 만들어내는 일이 아니라, 의미 없음의 한복판에서도 끝내 말을 잃지 않는 일이다. 삶이 나를 설득하지 못할 때에도 내가 나를 배반하지 않기 위해 문장을 세우는 일이다.

사강의 대목에서는 조금 웃음이 났다. 사강에 대해 너무나 사강다운 해석이었기 때문이다. 열여덟 살에 첫 소설을 발표한 작가. 젊음, 쾌락, 허무, 사랑, 지루함, 도박 같은 단어들과 함께 기억되는 사람. 그러나 이 책은 사강을 단순한 천재 소녀나 시대의 스캔들로 읽지 않는다. 사강이 젊어서 매혹적이었던 것이 아니라, 젊음이라는 감각을 누구보다 정확히 포착했기 때문에 매혹적이었다고 말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나이가 아니라 사유의 밀도다. 어린 작가도 세계의 욕망을 정확히 읽어내면 한 시대를 대변할 수 있다. 반대로 오래 산 사람도 자기 삶을 제대로 응시하지 못하면 아무것도 쓰지 못한다.

이 대목을 읽으며 나는 작가의 나이에 대해 다시 생각했다. 좋은 글은 연륜의 자동 산물이 아니다. 경험이 많다고 해서 곧바로 문학이 되는 것도 아니다. 경험은 그 자체로는 원재료일 뿐이다. 그것을 어떤 문장으로, 어떤 거리로, 어떤 구조로 바라보느냐가 작가를 만든다. 사강은 너무 이른 나이에 자기 시대의 공허를 알아보았고, 그것을 가볍고 우아한 문장으로 붙잡았다. 가벼움은 깊이의 반대말이 아니었다. 어떤 가벼움은 오히려 무거운 것을 견디기 위해 고안된 가장 섬세한 형식일 수 있다.

그르니에의 장에서는 ‘자기 안에서 길을 잃는다’는 말이 머리에 남았다. 낯선 곳을 꿈꾼다는 것은 단순히 멀리 떠나고 싶다는 뜻이 아닐지도 모른다. 나를 규정해온 기억과 관계와 역할에서 벗어나, 아무도 나를 알지 못하는 곳에서 비로소 내가 누구인지 다시 묻고 싶다는 뜻일 수 있다. 그르니에에게 여행은 풍경을 수집하는 일이 아니라, 자신에게 덧씌워진 이름들을 하나씩 벗겨내는 일이었다. 낯선 곳에서 익명의 존재가 되고 싶다는 욕망은 결국 자기 안의 더 깊은 방으로 들어가고 싶은 욕망과 닮아 있다.

나는 때때로 먼 곳을 꿈꾼다. 나를 정의하는 기억과 관계를 벗어난 곳. 혼자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낯선 도시의 거리를 걷는 상상. 그곳에서 나는 누구일까. 이름도 역할도 잠시 내려놓은 채 남는 것은 무엇일까. 그르니에를 읽으며 깨달았다. 삶이란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채워 넣고 쌓아 올리는 일이 아니라, 때로는 불필요한 것을 깎아내어 투명해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작법 역시 그렇다. 좋은 글은 모든 것을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덜어내고, 비워두고, 침묵이 머물 자리를 만든다. 글쓰기란 결국 나를 더 많이 드러내는 일이 아니라, 나를 가리고 있던 것들을 걷어내는 일일 수 있다.

아고타 크리스토프 앞에서는 숨이 멎는 듯했다. 그는 언어적 장벽을 뛰어넘은 작가가 아니라, 어쩌면 그 장벽을 자기 문체의 핵심으로 삼은 작가였다. 모국어를 떠나 프랑스어라는 낯선 언어 안에서 글을 쓴다는 일. 그것은 단순한 외국어 글쓰기가 아니라 존재의 일부가 잘려나가는 경험에 가까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결핍을 감추지 않았다. 화려한 수사를 포기하고, 짧고 건조하고 무자비한 문장으로 전쟁과 고립과 상실을 썼다. 그 불완전한 언어가 오히려 그의 대표작을 만들었다.

이 점이 내게는 몹시 경이로웠다. 나는 오래도록 언어적 장벽을 뛰어넘고 싶어했다. 더 정확하게, 더 풍부하게, 더 자유롭게 말하고 싶었다. 그런데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다른 길을 택했다. 그는 자신에게 없는 것을 억지로 흉내 내지 않았다. 대신 자신에게 남은 것, 자신이 겨우 붙들 수 있는 것, 그 핵심만을 문장으로 세웠다. 결핍을 극복한 것이 아니라 결핍의 모양을 끝까지 밀고 나간 것이다. 어떤 작가에게 약점은 제거해야 할 흠이 아니라, 가장 고유한 문체가 시작되는 자리일 수 있다.

아니 에르노와 에두아르 루이를 읽는 대목에서는 내 아비투스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오래전에 가족을 떠났지만, 그곳의 모든 것이 여전히 내 몸에 새겨져 있다. 책임을 먼저 떠올리는 습관, 돈 앞에서 긴장하는 몸, 가족을 위해 견뎌야 한다고 믿었던 시간들,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끊임없이 환기시키는 말투와 감각. 그러나 동시에 나는 이제 그것이 나의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은 자신이 출발한 세계에 의해 형성되지만, 그 세계에 영원히 감금되는 존재는 아니다.

에르노와 루이는 계급을 개인의 상처로만 고백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기 몸에 새겨진 사회적 흔적을 해부한다. 그래서 그들의 글쓰기는 복수도 미화도 아니다. 떠나온 세계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 세계가 자신에게 남긴 언어와 감각과 수치심을 분석의 대상으로 삼는다. 이것은 내게 매우 중요한 작법적 태도로 다가왔다. 자기 삶을 쓴다는 것은 “나는 이렇게 아팠다”고 말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왜 그런 아픔이 가능했는지, 어떤 구조가 나를 그렇게 만들었는지, 그 구조 안에서 나는 어떻게 나 자신이 되었는지를 묻는 일이다.

그렇기에 자기서사는 위험하면서도 필요하다. 나의 경험 안에는 언제나 타인의 삶이 포함되어 있다. 가족, 계급, 지역, 성별, 노동, 돌봄, 관계. 내가 나를 말하는 순간, 나는 나를 둘러싼 세계까지 함께 말하게 된다. 그래서 자기서사는 윤리가 필요하다. 하지만 동시에 자기 삶을 말하지 않는다면, 누가 그 세계의 안쪽을 증언할 수 있을까. 나는 이제 내가 살아온 시간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려 한다. 그것은 나를 가둔 세계였지만, 동시에 내가 끝내 떠나온 세계이기도 하다. 그리고 글쓰기는 떠나온 세계를 다시 불러와, 그곳의 언어와 경험을 문학의 중심으로 옮겨놓는 작업일 수 있다.

다니엘 페나크의 몸에 대한 사유도 인상적이었다. 몸은 정신을 운반하는 껍데기가 아니다. 몸은 세계를 처음으로 받아들이는 장소다. 우리는 마음으로 슬퍼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슬픔은 먼저 몸에 온다. 목이 막히고, 배가 아프고, 어깨가 굳고, 잠을 잃는다. 기쁨도 분노도 수치심도 마찬가지다. 몸은 우리가 통제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시간을 통과하고, 노화하고, 병들고, 소멸한다. 삶의 의미를 성취에만 둔다면 몸은 우리를 필연적으로 배반한다. 그러나 삶의 의미를 경험에 둔다면, 몸은 해석해야 할 사건이 된다.

이 대목은 내게 아주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나는 반려묘들을 돌보며 몸의 언어를 배웠다. 아픈 몸은 말보다 먼저 신호를 보낸다. 먹지 않는 것, 숨이 다른 것, 눈빛이 흐려지는 것, 가만히 웅크리는 것. 돌봄이란 그 미세한 언어를 읽어내는 일이다. 어쩌면 글쓰기 역시 비슷하다. 말이 되기 전의 감각, 아직 문장이 되지 않은 통증, 설명보다 먼저 찾아오는 몸의 반응을 알아차리는 일. 몸을 세밀하게 바라보는 사람은 세계를 더 정확히 읽는다. 작가는 관념으로만 쓰지 않는다. 몸으로 먼저 겪은 뒤, 뒤늦게 문장으로 이해한다.

쿤데라의 장에서는 작법이라는 말이 가장 직접적으로 다가왔다. 쿤데라에게 소설은 감정을 쏟아내는 그릇이 아니라 질문을 조직하는 구조였다. 그는 소설을 음악처럼 생각했다. 하나의 주제가 변주되고, 반복되고, 다른 인물의 시선 속에서 새롭게 울린다. 좋은 소설은 정답을 향해 직진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답을 유예하고, 관점을 뒤집고, 비극 속에서 희극을 발견하며, 인간의 우스꽝스러움과 존엄을 동시에 보여준다.

나는 이 부분에서 내가 실패했다고 느꼈던 많은 초고들을 떠올렸다. 진심은 있었지만 구조가 없었던 글들. 감정은 넘쳤지만 질문이 정리되지 않았던 이야기들. 인물은 아팠지만 그 아픔이 어떤 형태로 독자에게 도달해야 하는지 몰랐던 시간들. 쿤데라는 내게 말하는 것 같았다. 소설은 감정으로만 쓰는 것이 아니라고. 감정이 오래 살아남기 위해서는 형식이 필요하다고. 작가는 그 집에 사는 사람이 아니라, 그 집을 짓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이 말은 지금의 내게 특히 중요하다. 예전의 나는 이야기가 밀려와서 썼다. 쓰고 싶어서라기보다 쓰지 않고는 버틸 수 없어서 썼다. 그런 시절의 글에는 분명한 힘이 있다. 통제되지 않은 생명력, 무의식에서 솟구치는 장면들, 나도 모르게 나를 드러내는 인물들. 그러나 이제 나는 조금 달라지고 있다. 쓰게 되는 것들에서 쓰는 것들로 옮겨가고 있다. 밀려오는 감정에만 의존하지 않고, 그것을 어떤 구조로 세울지 생각한다. 인물의 고통을 어떻게 배치할지, 독자가 어디에서 숨을 쉬고 어디에서 무너져야 할지, 하나의 이야기가 어떤 질문으로 남아야 할지 고민한다. 이것은 영감의 상실이 아니라 작가로서의 이동일 것이다. 수동적 작가에서 능동적 작가로.

엘렌 식수의 여성적 글쓰기는 이 책의 또 다른 큰 문을 열어주었다. 나는 예전부터 “여성적인 글쓰기”라는 말을 경계했다. 그것이 자주 감상적이고 사적인 글, 혹은 작고 부드러운 글이라는 식으로 오해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식수가 말하는 여성적 글쓰기는 그런 뜻이 아니었다. 그것은 여성이 쓴 글이라는 좁은 규정이 아니라, 기존 언어의 질서를 해체하고 억압된 몸과 감각과 무의식의 목소리를 문장 안으로 들여오는 일이다.

언어는 중립적이지 않다. 우리가 쓰는 말에는 이미 세계의 위계가 들어 있다. 무엇이 중심이고 무엇이 주변인지, 누가 말할 수 있고 누가 침묵해야 하는지, 어떤 몸과 욕망이 정상으로 인정받고 어떤 감각이 부끄러운 것으로 밀려나는지. 식수의 여성적 글쓰기는 바로 그 언어의 감옥을 의심한다. 자기 안의 가장 은밀한 고통을 꺼내는 일이 ‘나’라는 벽을 허무는 일이며, 그 벽을 넘어 타자와 만나는 일이라고 말한다.

이 대목을 읽으며 나는 내가 왜 소설 속 인물들에게 나를 담아왔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나는 나를 직접 구하지 못해서, 이야기 속에서 나와 닮은 아이들을 먼저 구했는지도 모른다. 버려진 아이, 너무 오래 참은 아이, 사랑받고 싶으면서도 사랑을 믿지 못하는 아이, 몸으로 먼저 세상의 폭력을 배운 아이, 자기 존엄을 되찾기 위해 뒤늦게 말을 배우는 아이. 나는 그 아이들을 행복하게 해주며 나를 위로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나를 직접 구하지 못해서, 이야기를 통해 나와 닮은 아이들을 먼저 구했다. 그러다 어느 날 알게 되었다. 그 아이들을 안아주던 손이 결국 나에게도 닿고 있었다는 것을.

그러므로 내가 캐릭터에 나를 담는 일은 도피가 아니었다. 그것은 나를 무너뜨렸던 세계를 다시 쓰는 일이었다. 현실에서는 너무 늦게 도착한 위로를 이야기 안에서는 제때 도착하게 하는 일. 현실에서는 끝내 받지 못했던 이해를 인물에게는 건네주는 일. 그것은 사적인 위안이면서 동시에 작법이었다. 문학은 상처를 없애주지 않는다. 그러나 상처를 다른 형태로 다시 살게 한다. 개인의 고통을 보편의 언어로 확장시키고, 나만의 방이라 생각했던 곳에 누군가도 앉아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이 책을 읽고 나는 작법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다. 작법은 냉정한 기술이 아니다. 그렇다고 막연한 진심도 아니다. 작법은 고통을 견디는 구조이고, 기억을 다루는 거리이며, 결핍을 문체로 바꾸는 선택이다. 몸의 감각을 듣는 일이고, 계급의 흔적을 해부하는 일이며, 언어의 감옥을 의심하는 일이다. 또한 사랑하는 인물들을 함부로 구원하지 않고, 그들이 스스로 살아 움직일 수 있는 세계를 설계하는 일이다.

나는 이제 안다. 좋은 글은 단지 잘 쓴 문장들의 모음이 아니다. 좋은 글은 한 사람이 자기 삶의 폐허에서 끝내 세운 견고한 장소다. 그곳에는 통증이 있고, 수치심이 있고, 부조리가 있고, 몸의 기록이 있고, 계급의 흔적이 있고, 사랑의 잔해가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곳에는 다시 살고자 하는 의지도 있다. 쓰는 사람은 그 모든 것을 외면하지 않고, 너무 빨리 위로하지도 않고, 하나씩 문장의 자리에 놓는다.

그래서 이 책은 내게 작가론이 아니라 작법론으로 남았다. 더 정확히 말하면, 삶의 작법론이다. 어떻게 살아야 쓰게 되는가. 어떻게 써야 살아낼 수 있는가. 이 두 질문이 책의 끝에서 서로를 마주 본다.

나는 오래도록 쓰게 되는 사람이었다. 감정이 밀려오면 썼고, 인물이 찾아오면 썼고, 슬픔이 나를 밀어붙이면 썼다. 그러나 이제는 조금씩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 밀려오는 것을 받아 적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것이 어디에서 왔는지 묻고, 어떤 구조로 세워야 하는지 고민하고, 어떤 문장으로 남길지 선택하는 사람. 상처를 상처로만 두지 않고, 그것이 통과할 수 있는 형식을 만드는 사람.

작가는 자신을 고백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통과한 세계의 파편을 견딜 만한 형식으로 다시 세우는 사람이다.
그리고 어쩌면 내가 지금 배우고 있는 작법이란 바로 나를 균열낸 모든 것들로부터, 끝내 나만의 문학을 짓는 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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