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의 빈자리에 - 괴물, 여성, 망자, 호명되지 못한 존재들에 대해
권혁란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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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은 한 존재에게 건네는 가장 짧은 축원

— 권혁란, 《이름의 빈자리에》를 읽고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다. 누군가를 세계 안으로 불러 세우는 가장 오래된 방식이고, 한 존재가 이곳에 있었다는 사실을 붙들어두는 작은 닻이다. 권혁란의 《이름의 빈자리에》는 괴물, 여성, 망자, 동물, 문학과 영화 속 인물들을 통해 이름이 인간을 어떻게 만들고, 지우고, 연결하는지를 묻는 책이다. 이 책은 이름을 둘러싼 인문학적 에세이이면서 동시에, 호명되지 못한 존재들의 슬픔을 어루만지는 기록이다.


나는 《프랑켄슈타인》을 읽을 때도 괴물이 무섭다기보다 슬펐다. 그는 처음부터 괴물이 아니었다. 이름도 받지 못했고, 창조주에게 부정당했으며, 인간들에게 반복해서 배척당했다. 프랑켄슈타인을 죽일 힘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가 요구한 것은 복수 이전에 관계였다. 자신과 같은 존재 하나, 자신을 이해할 수 있는 동료 하나, 이 세계에서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최소한의 유대. 괴물에게 필요했던 것은 지배나 살육이 아니라 곁이었다.


그래서 “당신은 내게 이름조차 지어주지 않았어”라는 크리처의 말은 오래 남는다. 이름을 주지 않는다는 것은 단지 호칭을 생략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상대를 책임의 바깥으로 밀어내는 일이다. “너는 내 세계에 등록되지 않았다.” “너의 고통은 나와 관계없다.” 그런 선언이 이름의 부재 안에 숨어 있다. 결국 괴물은 태어난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 이름을 주지 않는 세계, 책임지지 않는 창조주, 얼굴을 보지 않고 혐오부터 던지는 인간들이 한 존재를 괴물로 만든다.


라이카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였다. 라이카는 이름을 얻었지만 자기 삶의 주인은 되지 못했다. 인간은 그 이름을 역사에 남겼지만, 그 이름은 보호의 언어가 아니라 기록의 언어였다. ‘최초의 우주 개’라는 찬란한 수식어 뒤에는 한 생명의 공포와 외로움이 있었다. 이름이 있어도 구원받지 못한 존재. 이름이 남았지만 삶은 빼앗긴 존재. 이 책이 묻는 것은 바로 그런 자리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누구에게 이름을 붙이고, 누구의 고통은 이름 뒤에 숨겨왔는가.


책을 읽으며 나는 며칠 전 사라졌던 아파트 길고양이 솔이를 떠올렸다. 솔이는 집 앞 상가 펍에서 밥을 먹고, 중성화도 마친 채 사람들 곁에서 조심조심 살아가던 아이였다. 며칠째 보이지 않아 걱정하던 중, 한 할머니가 고양이 때문에 냄새나서 못 살겠다며 짜증을 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설마 싶었지만, 퇴근길에 펍 사장님께 물어보니 그 할머니가 솔이를 우산으로 때렸고, 아이가 다쳐 지금은 지인 집에서 임시보호 중이라고 했다.


그 할머니에게 솔이는 이름 없는 길고양이였을 것이다. 골칫거리, 냄새, 불편함, 쫓아내야 할 대상. 그러나 우리에게 솔이는 솔이다. 이름을 부르면 멀리서 인사하듯 뛰어오던 아이. 추운 날 캔을 따주면 혼자 다 먹지 않고 친구를 부르러 가던 아이. 밥 먹는 동안 곁을 지켜주면 고맙다는 듯 아파트 현관까지 재잘거리며 배웅해주던 영특한 아이. 이름이 붙는 순간, 생명은 풍경에서 관계가 된다. 관계가 되는 순간, 그 존재의 고통은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게 된다.


이 책을 읽으며 내가 데려온 아이들의 이름도 떠올렸다. 우리 라온이는 처음 왔을 때 이름조차 없었다. 해랑이는 ‘츄’처럼 발성기호에 가까운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 나는 받아온 아이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다시 지어주었다. 보다 나은 삶을 살아가라는 뜻으로 보담이, 세상의 중심이 되라는 뜻으로 가온이, 해처럼 빛나는 내 작은 호랑이라는 뜻으로 해랑이, 사랑받은 티가 나라는 뜻으로 티나, 길에서의 고통스러운 삶은 잊고 꽃길만 걸으라는 뜻으로 꽃길이, 네가 별이 될 때까지 내가 키우겠다는 마음으로 키움이. 그렇게 공들여 고민한 이름을 하나씩 붙여주었다.


그때 내가 한 일은 단순히 새 호칭을 고르는 일이 아니었던 것 같다. 이름은 한 존재에게 건네는 가장 짧은 축원이다. “너는 이제 이전의 이름 없는 삶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 “너는 함부로 불리던 존재가 아니라, 내가 오래 생각하고 부를 존재다.” “너의 삶이 이 이름처럼 조금은 나아지기를 바란다.” 이름을 지어준다는 것은 그 존재를 내 세계 안에 들이고, 그 삶에 책임의 실을 묶는 일이다.


김춘수의 시 「꽃」에서 말하듯,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 꽃이 된다. 그러나 이름을 부른 사람에게는 책임도 생긴다. 솔이를 솔이라고 부르는 순간, 나는 그 아이의 배고픔과 두려움과 부재를 그냥 지나칠 수 없게 되었다. 라온이와 해랑이에게 이름을 다시 지어준 순간, 그 아이들은 더 이상 이전의 익명 속에 놓인 존재가 아니었다. 이름은 사랑의 시작이면서 책임의 시작이다.


《이름의 빈자리에》가 좋았던 이유는 이 책이 이름을 낭만적인 언어로만 다루지 않기 때문이다. 이름은 때로 소유의 표식이 되고, 삭제의 도구가 되며, 누군가를 배제하는 장치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름은 한 존재를 어둠 속에서 건져 올리는 손이 될 수도 있다. 이름 없는 존재는 쉽게 지워진다. 그러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하면, 그 존재는 더 이상 배경이 아니다. 얼굴이 되고, 기억이 되고, 관계가 되고, 마침내 내가 지켜야 할 세계의 일부가 된다.


결국 이 책이 내게 남긴 질문은 하나였다. 우리는 누구의 이름을 부르고, 누구를 이름 없는 채로 내버려두는가. 괴물이라 불린 존재들, 실험과 기록 뒤에 남은 동물들, 길 위에서 민원으로 취급되는 생명들, 그리고 아직 자기 이름으로 살아보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 그들의 빈자리에 필요한 것은 거창한 선언이 아닐지도 모른다. 먼저 이름을 불러주는 일. 그 이름에 담긴 삶을 함부로 지나치지 않는 일.


이름은 한 존재에게 건네는 가장 짧은 축원이다.

그리고 어쩌면 사랑은, 그 이름을 끝까지 불러주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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