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러드 머니 - 생명을 구하는 약을 둘러싼 탐욕의 전쟁
네이선 바르디 지음, 신유희 옮김 / 상상스퀘어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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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구용 신약은 누구의 공포를 덜어주는가

— 네이선 바르디, 『블러드 머니』를 읽으며


『블러드 머니』를 읽기 시작하며 가장 먼저 붙잡은 질문은 이것이었다. 왜 신약 개발은 이토록 고가의 혁신 치료제를 향해 달려가는가. 암 치료제, 표적치료제, 경구용 신약. 이 단어들은 모두 과학의 진보처럼 들린다. 병의 원인을 더 정밀하게 이해하고, 환자에게 더 적은 고통으로 더 긴 시간을 주려는 시도처럼 보인다. 그러나 동시에 이 단어들은 미국 의료 시장 안에서는 막대한 자본이 움직이는 언어이기도 하다. 생명을 구하는 약은 누군가에게는 마지막 희망이고, 누군가에게는 수십억 달러짜리 시장이다.


이 책의 제목이 『블러드 머니』인 이유도 아마 여기에 있을 것이다. 생명을 둘러싼 돈은 언제나 깨끗하지만은 않다. 그러나 그렇다고 단순히 더럽다고만 말할 수도 없다. 누군가의 절박함이 누군가의 투자 기회가 되고, 누군가의 생존 시간이 누군가의 시장 가치가 되는 세계. 이 책은 바로 그 불편한 교차점 위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BTK 억제제 같은 표적치료제는 기존 항암치료의 한계를 넘기 위해 개발되었다. 전통적인 화학항암제는 빠르게 분열하는 세포를 폭넓게 공격한다. 그 과정에서 암세포뿐 아니라 정상세포도 함께 손상될 수 있고, 환자는 탈모, 구토, 피로, 면역 저하, 통증 같은 고통을 감당해야 한다. 반면 표적치료제는 암세포가 생존하고 증식하는 데 기대고 있는 특정 회로를 겨냥한다. 암이라는 거대한 덩어리를 무차별적으로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병이 버티고 있는 핵심 신호축을 찾아내 그 흐름을 끊으려는 접근이다.


이브루티닙 같은 BTK 억제제는 B세포 수용체 신호전달에 중요한 효소를 겨냥한다. 만성림프구성백혈병이나 외투세포림프종 같은 B세포성 혈액암에서 암세포는 특정 생존 신호에 의존한다. 이 약은 그 회로를 차단함으로써 암세포가 살아남는 방식을 방해한다. 이것은 단순히 “새 약 하나”가 나온 사건이 아니다. 암을 더 정밀하게 이해하게 된 과학의 결과다. 암을 하나의 병명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유전자 변이, 신호전달 경로, 면역환경에 따라 서로 다른 질병군으로 이해하기 시작했기에 가능한 접근이다.


그런 점에서 표적치료제의 등장은 현대 의학의 성취다. 암을 향해 던지는 질문이 “어떻게 죽일 것인가”에서 “무엇에 기대어 살아남는가”로 바뀐 순간이기 때문이다. 병의 핵심 회로를 찾아내고, 그 회로를 막아 환자에게 시간을 벌어주는 일. 표적치료제는 그 자체로 과학이 생명을 이해하는 방식이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 의학적 필요는 미국 의료 시장 안에서 곧바로 사업적 가치로 번역된다. 암 치료제는 높은 가격을 정당화하기 쉬운 영역이다. 생명과 직결되고, 대체 치료제가 부족하며, 환자와 가족에게는 “시간을 벌어주는 약”이기 때문이다. 표적치료제는 환자군이 좁아도 고가 책정이 가능하다. 특정 암종, 특정 돌연변이, 특정 치료 단계에서 효과를 보이면 “정밀 치료”라는 가치가 붙는다. 환자 수가 많지 않아도, 그 환자들에게는 대체 불가능한 약이 될 수 있다. 이 절박함은 가격의 논리로 바뀐다. 생명의 시간이 곧 시장 가치가 되는 것이다.


더구나 경구용 표적치료제는 장기 복용 시장을 만든다. 병원에서 일정 주기로 주사를 맞고 끝나는 방식이 아니라, 매일 약을 먹으며 병을 억제하는 만성 관리형 치료가 될 수 있다. 환자에게는 편의성과 지속 가능성이 생기지만, 개발사 입장에서는 장기간 매출이 발생하는 구조가 된다. 한 번 성공하면 적응증 확장도 가능하다. 처음에는 특정 혈액암 치료제로 시작했더라도, 같은 B세포 신호 경로가 관련된 다른 혈액암, 더 나아가 자가면역질환까지 확장 가능성이 열린다. 그러면 하나의 약은 단순한 제품이 아니라 플랫폼형 자산이 된다. 과학의 발견은 특허, 브랜드, 장기 복용, 적응증 확장, 인수합병 가치로 이어진다.


그래서 경구용 항암제는 이중적인 얼굴을 가진다. 한쪽 얼굴은 환자 친화적이다. 병원에 가서 주사를 맞고, 입원하고, 수액 항암을 견디는 대신 집에서 약을 먹으며 치료를 이어갈 수 있다. 환자 접근성이 좋아지고, 병원 이용 부담이 줄어들며, 치료가 삶의 리듬 안으로 들어온다. 특히 미국처럼 의료비가 높고 보험 구조가 복잡한 사회에서 경구용 치료제는 “의료비 부담을 낮추고 환자 편의를 높인다”는 강력한 명분을 갖는다.


주사 항암제가 의료 행위의 일부로 처리되는 반면, 경구 항암제는 약제급여 구조 속에 들어가기 때문에 환자 부담이 달라질 수 있다. 이 차이를 보완하려는 oral parity law의 흐름까지 생각하면, 경구용 치료제는 분명 환자에게 더 유리한 조건을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다. 먹는 약이라는 형태는 단순한 편의가 아니라, 의료 접근성과 보험 설계의 문제와 연결된다.


그러나 다른 얼굴도 있다. 경구용 신약은 병원 밖으로 나온 치료이면서 동시에 환자의 일상 안으로 들어온 시장이다. 약은 집에서 먹을 수 있게 되었지만, 약값과 부작용 관리와 장기 복용의 부담도 함께 집 안으로 들어온다. 치료가 덜 침습적으로 바뀐 만큼, 환자와 가족은 매일 약을 챙기고, 반응을 살피고, 보험과 비용을 감당해야 한다. 병원 침대에 묶이는 시간은 줄어들 수 있지만, 고가의 약을 지속해야 하는 현실은 사라지지 않는다. 경구용 표적치료제는 환자를 병원에서 조금 해방시키지만, 동시에 특허와 가격 체계 안에 오래 묶어둘 수도 있다. 치료의 공간이 병원에서 집으로 이동했을 뿐, 치료의 부담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이 지점에서 나는 달땡이의 림프종 치료를 떠올렸다. 달땡이는 내게 단순한 반려동물이 아니라 가족이었다. 그 아이에게 림프종이 생겼을 때, 내 앞에는 몇 가지 선택지가 놓였다. 수술적 제거, 화학요법과 주사, 그리고 경구투약과 표적 치료 추적. 이 선택지들은 의학적 판단의 목록이기도 했지만, 보호자인 내게는 공포의 목록이기도 했다. 수술은 병변을 물리적으로 제거할 수 있다는 점에서 분명한 선택지였지만, 마취가 필요했다. 화학요법과 주사는 보다 적극적인 치료처럼 보였지만, 치료 과정에서 달땡이가 겪을 고통과 스트레스가 두려웠다. 병원 안쪽에서 내가 볼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내 아이가 아파하고 괴로워하고, 혹시라도 마취에서 깨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상상은 나를 압도했다.


나는 결국 경구투약을 선택했다. 그 선택의 중심에는 의학적 판단도 있었지만, 더 깊은 곳에는 공포가 있었다. 내가 모르는 곳에서 내 아이가 아파하고 괴로워할까 봐, 치료라는 이름으로 사랑하는 생명을 낯선 공간에 맡겨야 한다는 사실이 무서웠다. 이 선택이 모든 경우에 정답이라는 뜻은 아니다. 질환의 종류, 병기, 환자의 상태, 수의학적 판단에 따라 최선의 치료는 달라질 수 있다. 다만 그 순간 보호자인 내가 무엇을 두려워했는지는 분명했다. 나는 치료 자체만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치료 과정에서 내가 완전히 무력해지는 감각을 두려워했다.


처음부터 쉬웠던 것은 아니다. 달땡이는 처음에 약을 거부했다. 이미 하루에 열댓 번씩 토하며 몸무게가 반토막이 난 아이였다. 나는 그런 아이에게 약 먹는 시간마저 공포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약은 독했고, 병원에서도 입맛이 떨어질 수 있다고 했다. 이미 몸이 무너지고 있는 아이에게, 치료라는 이름으로 또 하나의 공포를 얹고 싶지 않았다. 나는 달땡이의 영리함과 나와의 유대를 믿어보기로 했다. 억지로 붙들고 밀어 넣는 대신, 아이를 설득했다. 십오 분, 이십 분씩 말을 걸었다. 내 말을 정말 알아들었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어느 순간 달땡이가 납득한 듯한 눈빛을 보이면,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벌리고 손가락으로 약을 밀어 넣었다. 그것은 단순한 투약이 아니었다. 치료의 가장 작은 단위가 보호자와 환자 사이의 협상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나는 아이의 거부를 고집으로만 보지 않으려 했다. 아픈 몸이 보내는 두려움이자, 쓰고 독한 약을 삼켜야 하는 생명의 저항으로 보려 했다. 그래서 매번 달땡이를 이기려고 하지 않았다. 달땡이와 함께 약을 먹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치료란 일방적으로 집행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아주 작은 신뢰 위에서 겨우 성립하는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인가 달땡이는 좁은 집 안 대신 복도식 아파트의 복도를 걷고 싶어 했다. 한참 걷고 나면, 마치 운동하고 배고파진 사람처럼 밥을 먹었다. 조금씩 약에도 적응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달땡이가 사라진 식욕을 스스로 불러내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느꼈다. 살려고, 자기 몸을 다시 움직이게 하려고, 아이가 자기 나름의 방식을 찾아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달땡이를 데리고 산책을 시작했다. 고양이 산책이 위험하고 일반적으로 권장되지 않는 일이라는 것을 안다. 그래서 사람의 왕래가 거의 없는 시간대를 골랐다. 주변이 시끄럽지 않은 깊은 밤이나 이른 새벽, 모두가 출근하고 등교한 뒤의 한적한 오전. 우리는 30분에서 한 시간 남짓 복도를 걸었다. 달땡이가 걷고, 냄새를 맡고, 몸을 움직이고, 다시 살아 있는 감각을 되찾는 시간을 기다렸다. 집에 돌아오면 발을 닦이고, 밥을 먹이고, 약을 주었다.


그 시간들은 내게 치료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했다. 치료는 병원에서 처방된 약물만이 아니었다. 치료는 약을 삼키기 전까지의 설득이었고, 아이가 고개를 돌리면 기다리는 일이었고, 밤의 복도를 함께 걷는 일이었고, 밥그릇 앞에서 다시 식욕이 돌아오기를 바라는 일이었다. 치료는 환자의 몸만이 아니라, 환자와 보호자가 함께 견디는 시간 전체였다.


그렇게 경구투약을 이어간 지 2년 만에, 달땡이는 림프종 완치 판정을 받았다. 거의 기적 같은 케이스라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며 경구 투약의 의미를 더 깊이 이해했다. 경구 투약은 단순히 병원에 덜 가도 되는 편리한 방식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랑하는 존재가 치료의 과정에서 완전히 낯선 시스템 안으로 사라지지 않게 하는 방식이었다. 보호자가 곁에서 보고, 설득하고, 기다리고, 약을 먹이고, 다시 밥을 먹는 순간까지 함께할 수 있게 하는 치료의 형식이었다.


인간 환자와 가족에게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주사 항암이나 입원 치료는 몸의 고통뿐 아니라 공포를 동반한다. 치료실에 들어가는 일, 혈관을 잡히는 일, 약물이 몸 안으로 들어오는 시간을 기다리는 일, 부작용을 예감하는 일. 그 과정은 환자와 가족에게 강한 불안을 준다. 반면 경구용 표적치료제는 치료를 병원 안쪽에서 환자의 일상으로 가져온다. 물론 그것이 고통을 없애지는 않는다. 부작용도 있고, 비용도 있고, 장기 복용의 부담도 있다. 그러나 치료가 환자의 삶을 완전히 병원에 빼앗기지 않게 한다는 점에서, 경구 투약은 분명한 심리적 가치를 가진다. 약을 삼키는 행위는 단순한 복용이 아니라, “나는 아직 내 삶 안에서 치료받고 있다”는 감각을 준다.


그래서 나는 경구용 신약 개발의 논리 안에 “공포를 낮추는 기술”이라는 요소도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환자 접근성, 의료비 부담 완화, 장기 복용 시장, 적응증 확장, 특허와 브랜드. 이런 산업적 이유만으로는 경구용 표적치료제의 힘을 다 설명할 수 없다. 경구 투약은 병을 치료하는 방식인 동시에, 환자와 보호자가 치료의 공포를 견디게 하는 심리적 형식이다. 병원 밖에서도 치료가 이어질 수 있다는 감각. 사랑하는 사람의 상태를 곁에서 지켜보며 치료에 참여할 수 있다는 감각. 그 안정감은 실제 치료 선택에서 매우 큰 힘을 가진다.


문제는 그 안정감마저 시장의 언어로 번역된다는 데 있다. 환자에게는 덜 침습적인 희망이지만, 개발사에게는 장기 복용 매출을 만드는 상품이 된다. 보호자에게는 사랑하는 존재를 곁에서 돌볼 수 있다는 안도감이지만, 제약사에게는 특허와 브랜드와 고가 약가를 정당화할 수 있는 가치가 된다. 신약은 환자의 몸을 겨냥하지만, 동시에 환자와 보호자의 공포도 겨냥한다. 치료의 두려움을 낮추는 기술은 분명 선한 효과를 갖지만, 그 선한 효과가 곧 시장의 강력한 설득 논리가 된다.


『블러드 머니』가 흥미로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생명을 구하는 약은 순수한 선의만으로 태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순수한 탐욕만으로도 설명되지 않는다. 과학자들은 병의 핵심 회로를 찾아내고, 환자에게 더 나은 시간을 주기 위해 싸운다. 투자자와 제약사는 그 가능성을 고가의 자산으로 만들고, 특허와 임상과 인수합병의 언어로 포장한다. 환자는 그 사이에서 생명을 연장하고, 고통을 줄이고, 동시에 비용과 부작용과 보험의 현실을 감당한다. 한쪽에는 실험실의 집요함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월가의 계산이 있다. 그 사이에 환자의 몸과 가족의 공포가 놓인다.


고가의 표적치료제는 단순히 탐욕의 산물도, 순수한 선의의 결과도 아니다. 기존 항암의 한계를 넘고 환자에게 시간을 벌어주려는 과학적 필요에서 출발하지만, 미국 의료 시장에서는 그 절박함이 고가의 브랜드, 특허, 장기 복용 시장, 적응증 확장, 인수합병 가치로 전환된다. 표적치료제의 시대란 암을 더 정밀하게 이해하게 된 과학의 성취이면서, 생명의 절박함이 가장 비싼 시장이 되는 자본주의의 얼굴이기도 하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계속 묻게 될 것 같다. 생명을 구하는 약이 환자의 삶을 얼마나 덜 고통스럽게 만들었는가. 그리고 그 덜어진 고통은 누구의 비용과 누구의 이익으로 재배치되었는가. 경구용 혁신 치료제는 환자와 보호자의 공포를 덜어주는 기술이다. 동시에 그 공포와 희망이 고가의 시장으로 조직되는 장면이기도 하다. 이 모순을 함께 보아야 이 책을 제대로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블러드 머니』는 신약 개발의 빛나는 성공담만을 말하는 책이 아닐 것이다. 이 책은 아마 생명을 구하려는 과학이 어떻게 자본과 만나는지, 환자의 절박함이 어떻게 시장 가치로 바뀌는지,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여전히 더 나은 약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지를 묻게 할 것이다. 달땡이의 치료 앞에서 내가 느꼈던 공포를 떠올리면, 나는 경구용 신약의 의미를 단순히 산업적 혁신으로만 볼 수 없다. 그것은 생명을 조금 덜 아프게 붙잡고 싶은 마음, 사랑하는 존재를 병원 밖 일상 안에서 지키고 싶은 마음, 치료의 공포 속에서도 무언가 할 수 있다는 감각을 주는 형식이었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 내 질문은 여기에서 시작한다. 경구용 신약은 누구의 공포를 덜어주는가. 그리고 그 공포를 덜어준 대가는 누가 치르는가. 생명을 구하는 약은 기적처럼 보이지만, 그 기적은 과학과 자본과 제도와 보호자의 떨리는 손 사이에서 만들어진다. 『블러드 머니』를 읽는 일은 그 손의 온도와 시장의 냉기를 함께 바라보는 일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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