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일동맹이라는 거울 - 한미일 안보 체제의 한계와 가능성
지지와 야스아키 지음, 길윤형 옮김 / 한겨레출판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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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이 사라지고 ‘한반도’만 남을 때

— 『미일동맹이라는 거울』을 읽고



대학 시절 국제 정치학과 국제법 수업을 들으며, 나는 정치와 국제 관계가 보여주는 유연한 합의와 변화의 감각을 보이지 않는 전쟁처럼 느꼈다. 우리 헌법이 천명하는 국제 평화주의 역시, 우리만의 의지만으로 지켜낼 수 없는 무게라는 사실을 그때 처음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깨달았다.


을사조약 이후 고종은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사절단을 보냈으나, 약소국이었던 우리는 입장조차 허락받지 못했다. 1904년 대한제국의 국외중립선언 역시 급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무위로 돌아갔다. 국제 평화주의는 힘의 논리 앞에서 언제나 소리 없이 쓰러질 수 있다. 그 교훈 아래 인류는 집단적 동맹 체계로 안보를 지키는 전략을 택했고, 그 흔적은 한미동맹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도 남아 있다.


내가 미일동맹에 흥미를 갖게 된 것은 우리 바깥에서 한국을 바라보는 전략적 시선이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침략의 역사보다 침략 당한 기억을 더 깊이 가진 나라의 후손으로서, 침략하지 않되 침범받지 않으려면 동맹의 다자적 성격을 이해해야 한다는 필요를 느꼈다. 그렇게 펼친 이 책은,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불편한 방향으로 나를 이끌었다.


우리는 동맹을 안전의 언어로 배운다. 서로를 지켜주는 약속, 위협을 억제하는 장치, 전쟁을 막기 위한 구조. 그래서 ‘한미동맹’이나 ‘미일동맹’이라는 말을 들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보호의 문장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미일동맹이라는 거울>을 읽으며 나는 그 문장을 다르게 읽게 되었다. 이 책은 동맹을 설명하는 동시에, 우리가 너무 쉽게 넘겨왔던 질문을 끌어올린다.


정말로, 동맹은 누구를 어떻게 지키는 구조인가.


특히 한국의 입장에서 이 책을 읽을 때, 미일동맹은 단순한 타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한미동맹을 비추는 거울처럼 작동한다. 구조는 닮아 있고, 논리는 유사하며, 작동 방식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질문이 있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벌어진다면, 그 전쟁은 과연 누구의 판단으로, 어떤 방식으로 확장될 것인가.


저자는 반복적으로 ‘대한민국’이 아니라 ‘한반도’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처음에는 그것이 지정학적 분석을 위한 중립적 용어로 받아들이려 했다. 그러나 읽어나갈수록, 그 표현이 만들어내는 시선이 점점 더 선명해지는 기분이었다. 그 언어 안에서 한국은 더 이상 선택하고 판단하는 주체가 아니다. 대신 분석되고 배치되는 공간, 전략이 작동하는 무대, 필요할 때 투입되고 확장될 수 있는 조건처럼 다뤄진다. 누가 싸울 것인가보다 어디에서 싸울 것인가가 먼저 규정되는 세계. 그 안에서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은 지워지고, ‘한반도’라는 지리적 단위만 남는다.


그 표현이 반복될수록 나는 묻게 된다. 우리는 지금 누구의 언어로 불리고 있는가. 그리고 그 언어 속에서, 우리는 과연 주체로 남아 있는가.


이 불편함은 단순한 감정의 문제가 아니다. 이 책은 냉전 시기 미국이 아시아에서 다자 동맹을 구축하지 못하고, 결국 허브 앤 스포크라는 양자 동맹 체제로 귀결된 과정을 설명한다. 그리고 그 주된 이유 중 하나로 한국의 반일 감정을 언급한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애초에 하나로 묶이기 어려웠던 아시아 질서의 균열이 더 깊게 놓여 있었던 것은 아닐까. 전후 아시아는 하나의 공통된 위협으로 단순화될 수 없는 공간이었다. 각 국가는 서로 다른 적을 바라보고 있었고, 서로를 신뢰하지 않았으며, 동일한 전쟁을 상상하고 있지 않았다. 그런 균열 위에서 다자 동맹이 성립되지 못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결과였을지도 모른다.


미국이 선택한 것은 각 국가를 개별적으로 연결하는 방식이었다. 중심에 서서 관계를 조율하고, 필요할 때 작동 시키는 구조. 이 체계는 효율적이지만, 동시에 또 다른 의문을 남긴다. 그 네트워크는 누구를 중심으로 작동하는가. 그리고 그 안에서 각 국가는 얼마나 스스로를 결정할 수 있는가.


이 책은 미일동맹의 작동 원리를 구체적 사례를 통해 설명하는 과정에서, 몇몇 역사적 장면을 비교적 단선적으로 정리하는 경향도 보인다. 예컨대 일본의 ‘사전협의제’로 인해 오키나와 기지 운용에 제약이 생기고, 그 대안으로 한국 내 기지, 나아가 제주도까지 검토되었다는 서술은 흥미로운 시사점을 던지지만, 그 자체로 하나의 확정된 정책 흐름처럼 읽힐 여지가 있다.


그러나 실제 전후 동아시아의 안보 구조는 단일한 결정이나 의지로 설명되기 어려운 복합적 맥락 위에서 작동해왔다. 한국 정부가 미군의 작전 지속성과 대응 속도에 민감하게 반응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곧 특정 지역을 대체 기지로 ‘제공하려 했다’는 식의 단정으로 이어지기는 어렵다. 이 지점에서 중요한 것은 사실 여부 자체보다, 가능성과 논의의 수준에 머물렀던 사안을 하나의 구조적 결론처럼 압축해 제시하는 서술 방식이다.


이러한 압축은 독자의 이해를 돕는 동시에, 동맹이 작동하는 실제의 복잡성과 긴장을 다소 평면화할 위험도 함께 지닌다. 따라서 이 책을 읽을 때는 제시된 사례를 하나의 확정된 사실로 받아들이기보다, 당시의 정치적 조건과 전략적 선택지가 교차하던 맥락 속에서 다시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냉전 시기 핵 배치의 방식은 이러한 구조를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당시 미국은 핵탄두를 한국과 필리핀 등지에 분산 배치해 두고, 오키나와의 전력과 결합해 운용하는 체계를 구성하고 있었다. 형식적으로 한국은 핵을 보유한 국가가 아니었지만, 실제로는 핵이 저장되고 이동될 수 있는 공간으로 기능했던 셈이다. 핵의 사용 여부와 전략적 판단은 외부에서 내려지지만, 그 작동의 조건과 경로는 이 땅 위에 놓여 있었던 구조. 이처럼 냉전기의 핵 전략이 한국을 주체가 아니라 공간으로 위치 지었다면, 오늘의 안보 논의 역시 그 연장선 위에서 다시 읽힐 필요가 있다.


저자가 전제하고 있는 안보 감각은 분명하다. 미국의 상대적 우위가 약화되는 상황에서, 기존의 핵우산만으로는 충분한 억제력을 담보하기 어렵고, 따라서 핵 공유나 전진 배치와 같은 선택지를 전략적 옵션으로 열어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논리는 일본의 입장에서는 일정 부분 자연스럽다. 핵을 보유하지 않은 상태에서 동맹의 신뢰성을 보완하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의 입장에서 이 논의는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일본의 억제력 보강이라는 문제는 곧바로 한반도 유사시 개입 가능성의 확대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핵심은 단순히 일본이 어디까지 개입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아니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전쟁의 필요성과 범위를 규정하는 판단이 점점 더 외부 동맹의 언어 속에서 형성된다는 점이다. 일본에게 그것이 ‘억제력’의 문제라면, 한국에게 그것은 ‘전쟁이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가’의 문제로 변한다.


확장억제는 단순한 군사 개념이 아니라 정치적 신뢰에 의존하는 구조다. 바이든 행정부가 이를 제도화하려 했던 것과 달리, 트럼프 시기에는 동맹이 거래의 대상으로 전환되며 그 신뢰 자체가 흔들린 바 있다. 결국 핵우산은 기술이 아니라 관계의 문제이며, 그 관계가 불안정해질 때 동맹의 구조 역시 함께 흔들릴 수밖에 없다.


한국의 핵무장 가능성은 때때로 정치적 발언 속에서 언급되지만, 실제 정책 차원에서 그것은 여전히 강하게 제한된 선택지에 가깝다. 미국이 허용하는 것은 핵의 공유된 억제력이지, 핵의 분산된 주권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이 책에서 가장 불편하게 읽은 지점은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문제였다. 저자가 집단적 자위권의 확대를 강하게 옹호하는 이유는, 그것을 일본의 군사적 팽창이 아니라 미일동맹을 실제로 작동시키기 위한 현실적 조건으로 보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 안보담론 내부에서는 이것이 비교적 자연스러운 주장일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의 입장에서 보면, 그 ‘자연스러움’은 곧바로 불편함이 된다. 일본의 안전을 위한 제도적 보완이 한반도 유사시의 개입 가능성과 연결되는 순간, 집단적 자위권은 더 이상 추상적 법 해석이 아니라 우리의 전쟁과 주권을 가르는 문제로 바뀌기 때문이다.


저자는 그것을 미일동맹의 현실적 조정과 법적 재구성의 맥락에서 설명하지만, 한국의 입장에서 이 문제는 그렇게 중립적으로만 읽히지 않는다. 일본이 말하는 ‘존립위기사태’는 형식상 일본 정부의 판단에 달려 있지만, 실제로는 미국과의 동맹 구조 속에서 공동으로 작동할 가능성이 크다. 다시 말해 한반도에서 전쟁이 벌어졌을 때, 그 사태가 누구에게 얼마나 중대한 위협인지를 판단하는 권한은 한국만의 손에 남아 있지 않을 수 있다. 한국은 전쟁이 벌어지는 장소이고 피해를 감당해야 하는 당사자인데, 그 전쟁의 확대 가능성과 대응 방식의 일부는 미국과 일본의 전략적 판단 속에서 선결될 수 있다는 뜻이다. 이것이 한국인 독자로서 내가 일본의 ‘한정 용인된’ 집단적 자위권조차 위협으로 느끼는 이유다. 문제는 일본이 어디까지 개입할 수 있느냐만이 아니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전쟁의 감당은 한국의 몫이면서도 전쟁의 판단과 작동은 외부 동맹의 언어 속에서 결정될 수 있다는 점이다.


동맹은 보호를 약속한다. 그러나 그 보호의 언어 뒤에는 언제나 권한과 책임의 비대칭이 함께 존재한다. 전쟁을 결정하는 권한과, 그 전쟁을 감당해야 하는 위치는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며 내가 끝내 붙잡게 된 것은 동맹의 유용성 자체보다, 그 구조를 바라보는 시선이었다. 우리는 동맹을 너무 쉽게 ‘안전’이라는 단어로 바꾸어 왔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안에는 언제나 선택과 통제, 그리고 감당의 문제가 함께 들어 있다. 그것은 우리를 지켜주는 장치일 수도 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감당해야 할 위험의 범위를 더 넓히는 구조일 수도 있다.


이 책은 그 사실을 직접적으로 주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구조를 따라가다 보니 나는 앞선 질문들 앞에 서게 되었다. 그래서 이 책은 내게 단순한 국제정치 해설서라기보다, 우리가 너무 오래 당연하게 받아들여온 세계의 문장을 다시 읽게 만드는 거울에 가깝게 느껴졌다. 헤이그에서 입장조차 허락받지 못했던 나라의 후손으로서, 나는 보호를 약속하면서도 결정권과 감당의 몫을 다르게 배분하는 이 구조를, 끝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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