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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왕국 - 식물은 어떻게 문명과 권력을 설계했는가
데이비드 스펜서 지음, 배명자 옮김 / 흐름출판 / 2026년 1월
평점 :
이 책은 식물을 둘러싼 방대한 시간을 한 권의 연대기로 엮어낸다. 저자는 식물을 단순한 배경이나 자원이 아닌, 지구의 역사에서 지속적으로 선택하고 적응해온 주체로 다룬다. 광합성을 통해 대기를 바꾸고, 균류와의 공생으로 육상에 정착하며, 수억 년에 걸쳐 생태계의 토대를 형성해온 과정은 식물이 얼마나 능동적으로 환경에 개입해왔는지를 보여준다. 이 책이 제시하는 식물의 역사는 느리고 수동적인 생명이라는 통념을 뒤집는다.
인상적인 부분은 인간과 식물의 관계를 일방적 지배의 서사가 아니라 공진화의 역사로 재구성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흔히 인간이 농업을 시작하며 식물을 길들였다고 믿어왔다. 그러나 진화적 관점에서 보면, 인간 역시 식물이 제공한 조건 안에서 선택을 해온 존재였다. 인간의 이동 경로와 정착지는 식물의 생태와 깊이 맞물려 있었고, 씨앗의 확산과 재배의 역사는 식물에게도 생존 전략이 되었다. 이 책은 “누가 누구를 길들였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인간 중심적 사고에 균열을 낸다.
식물의 주체성에 대한 논의는 생리학과 생태학의 성과를 바탕으로 신중하게 전개된다. 식물은 신경계를 갖고 있지 않지만, 자극을 감지하고 기억하며 반응한다. 뿌리와 균류 네트워크를 통한 정보 교환, 화학 신호를 통한 경고와 협력은 식물이 환경을 ‘수동적으로 견디는 존재’가 아님을 보여준다. 저자는 이러한 특성을 과도하게 의인화하지 않으면서도, 인간만이 유일한 행위자라는 관점을 재검토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이 책의 또 다른 중요한 축은 재배와 개량의 윤리다. 멘델의 유전 법칙에서 현대의 유전자 편집 기술에 이르기까지, 식물 개량의 역사는 과학 발전의 상징처럼 다뤄져왔다. 그러나 저자는 이 과정이 언제나 긍정적이지만은 않았음을 분명히 한다. 지역에 축적된 재배 지식과 토착 종자의 다양성은 산업화 과정에서 급격히 축소되었고, 생물 자원의 상업적 이용은 종종 그 기원과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전통의 이름으로 이어져 내려온 재배 기술에 대한 보상에 대한 논의조차 없이 진행되어 왔다. 저자가 ‘식물 해적 행위’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지점은, 이러한 현실에 대한 문제 제기이자 윤리적 경고로 읽힌다.
공리주의적 효율 논리가 농업과 생명공학 영역에서 얼마나 쉽게 윤리적 질문을 밀어내는지를 짚는 대목이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수확량과 생산성은 분명 중요한 기준이지만, 그것이 유일한 판단 기준이 될 수는 없다. 생물 다양성의 상실, 지역 공동체의 지식 붕괴, 그리고 장기적 생태 불안정성은 결국 인간 사회로 되돌아온다. 이 책은 재배를 기술적 행위가 아닌 관계적 행위로 바라볼 것을 제안한다.
공생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 문명은 식물의 협력 없이는 성립할 수 없었다. 식량뿐 아니라 의약, 주거, 문화적 상징까지 식물은 인간 삶 전반에 깊숙이 관여해왔다. 그렇기에 저자가 강조하는 윤리는 식물을 보호하자는 도덕적 선언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 스스로의 지속 가능성을 다시 묻는 질문에 가깝다. 어떤 방식으로 재배하고, 어떤 가치를 선택할 것인가의 문제는 곧 우리가 어떤 미래를 선택하는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식물을 신비화하지도, 인간을 일방적으로 비판하지도 않는다. 대신 긴 시간의 스케일 위에서 인간과 식물이 맺어온 관계를 차분히 복원하며, 그 관계를 앞으로 어떻게 이어갈 것인지를 독자에게 묻는다. 저자가 그려내는 식물의 연대기를 따라가다 보면, 인간이 자연의 주인이기보다는 상호 의존적 구성원임을 인정하는 태도가 왜 필요한지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된다. 그렇기에 이 책은 식물에 대한 과학서이자, 동시에 인간의 선택과 책임을 성찰하게 하는 윤리적 사유의 장으로 읽힐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