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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일리지 아워 - 삶의 격을 높이는 인생 설계의 기술
최유나 지음 / 북로망스 / 2025년 11월
평점 :
『마일리지 아워』
: 분절된 현대인의 시간 구조와 다층적 정체성의 관리 기술
현대인은 단일한 정체성으로 살아가기 어렵다. 업무, 돌봄, 학습, 창작, 가계 운영 등 여러 층위의 역할이 하루 단위로 교차하며, 각 층위는 서로 충돌하고 우선순위를 두고 경쟁한다. 이러한 분절된 삶의 구조는 N잡러라는 용어가 익숙해진 시대적 흐름을 상징한다. 중요한 것은 더 이상 “일과 삶의 균형”이라는 단순한 구도가 아니라, “역할 간의 부딪힘을 어떻게 최소화하며, 자기 효율성을 어떻게 지켜낼 것인가”라는 문제에 가깝다.
<마일리지 아워>는 이 다층적 삶의 구조를 살아내는 사람들에게 시간 자체를 새롭게 바라보게 하는 책이다. 저자는 변호사, 방송작가, 에세이스트, 웹툰 작가, 강연자, 그리고 두 아이의 부모라는 다양한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며 살고 있다. 독자가 그 목록을 읽는 순간 불가피한 의문이 떠오른다. 하루가 24시간뿐인 조건에서 어떻게 저 많은 일을 소화할 수 있는가. 그 질문은 자연스레 책의 목적을 선명하게 구성한다. 이 책은 “시간을 늘리는 법”을 말하지 않는다. 대신 “시간을 구성하는 방식”을 재정의한다.
저자는 현대인의 시간 문제를 단순히 기술 부족이나 게으름의 산물이 아니라 심리적 과부하와 역할 간 간극이 만든 구조적 문제로 바라본다. 실제로 다층적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은 종종 스스로를 과대평가하거나, 반대로 과소평가하는 경향을 보인다. 분절된 삶 속에서 각 영역을 동일한 강도로 관리하려는 시도가 실패로 끝날 때, 사람들은 흔히 자신을 질책한다. 이 책은 이러한 자기비판적 태도를 해체하고, 시간 관리의 기준을 외부 기대가 아니라 내부 감당 가능성에서 출발하도록 요청한다.
책에서 제시하는 문제 해결 메시지들은 단순하고 명료하다. 실패는 적립된다, 행복은 욕심 분의 노력이다, 시간을 쓰는 방식은 결국 나를 정의한다 등등은 시간 관리의 기술이라기보다 ‘삶의 체계’를 재구축하는 원리로 작동한다.
현대인은 실패를 시간 낭비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빠르게 결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실패는 곧 정체, 뒤로 물러섬, 혹은 무능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저자는 실패를 오히려 ‘경험치 적립’으로 읽는다. 실패의 기록은 생산성과 거리가 멀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미래의 선택 비용을 줄이고 판단 체계를 정교하게 만든다.
이 원리는 N잡러의 삶에 특히 유용하다. 여러 영역을 동시에 관리하는 사람들에게 실패는 필연적이다. 모든 영역에서 완벽을 추구하면 결국 소진에 이르기 때문이다. 실패를 적립으로 해석하는 관점은 시간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전환 가능한 자산”으로 바꾼다. 이 관점 전환만으로도 많은 사람은 자신에게 부과하는 불필요한 죄책감을 덜어낼 수 있다.
저자가 아버지에게 들었다는 조언, “행복은 욕심 분의 노력이다”는 시간 관리에 대한 중요한 함의를 갖는다. 욕심이 지나치게 크고 그것을 감당할 노력의 양이 따라주지 않을 때, 불행은 구조적으로 발생한다는 간단한 비례 관계이다.
현대인의 시간 부족 문제는 실제로 시간이 모자랐다기보다, 욕망의 총량과 가용 시간의 불균형에서 비롯된다. N잡의 삶은 일종의 분수식이다. 분모(욕심)가 너무 크면 분자(노력)가 아무리 커도 행복감은 낮아진다. 분모를 줄이는 전략은, 곧 삶의 전반적 만족도를 높이는 가장 현실적인 방식이다.
이 공식은 자기계발 담론이 흔히 제시하는 “더 많이, 더 빨리, 더 노력하라”는 충고와 거리를 둔다. 대신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업무량과 감정적 용량을 먼저 설정하고, 목표치를 현실에 맞게 줄이는 전략을 우선시한다. 이는 심리적 소진을 막고, 장기 지속 가능한 작업 구조를 만들기 위한 근본적인 조절 장치다.
저자는 시간을 단순한 흘러가는 자원으로 보지 않는다. 시간을 어떻게 쓰는지는 결국 자신의 정체성을 결정한다. 시간을 쓴 방식이 곧 삶의 방향을 규정한다는 이 명제는 단순해 보이지만, 분절된 삶에서는 적용하기 어려운 개념이다. 다층적 정체성을 지닌 사람들에게 시간은 종종 외부 요구에 의해 분절된다. 의무와 책임이 시간의 우선권을 차지하면, 자기 영역의 시간은 마지막 순서로 밀려난다. 저자가 말하는 시간 선택의 기술은 외부의 요구보다 자기 정의에 따른 시간 배분을 우선하는 방식이다.
예컨대 저자는 즉각 처리할 수 있는 작은 일들은 바로 해결하고, 반복적인 가사나 업무는 자동화하고, 선택 비용이 큰 결정은 미리 구조화하여 뇌의 여유 공간을 확보한다. 이는 시간 사용의 효율성을 넘어, “내가 어떤 사람으로 살 것인가”에 대한 판단 체계를 세우는 일이기도 하다.
현대인의 가장 큰 시간적 고충은 충돌이다.일과 가사, 돌봄과 휴식, 학습과 생계, 창작과 의무는 서로 시간대를 차지하며 갈등한다. 이 책이 지닌 흥미로운 지점은, 이 충돌을 “해결해야 할 문제”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저자는 충돌 자체를 현대적 삶의 구조로 인정하고, 그 안에서 에너지 손실을 최소화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충돌을 없애려 하지 않고, 충돌을 감당 가능한 수준으로 유지하며, 충돌로 인한 피로도를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시간을 재편성한다. 이 접근은 완벽주의적 시간 관리와는 전혀 다른 길이다. 완벽한 균형을 추구하는 대신, 균형이 깨질 것을 전제하고 대비하는 방식이다.
동시에 여러 정체성을 지닌 사람에게 시간은 단순한 단위가 아니라 서사다. 시간을 어떻게 관리하느냐는 결국 삶을 어떤 구조로 만들어갈지 결정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저자의 태도는 이러한 서사적 관점을 잘 보여준다. 시간을 쪼개 사용하기보다, 시간을 통해 자신의 삶의 이야기를 설계하려는 태도이다. 특히 직업·가사·돌봄·학습·창작이 모두 혼합된 상태에서 중요한 것은 ‘시간의 양’이 아니라 ‘시간의 질’이다. 저자가 강조하는 자동화, 즉각 처리, 선택 비용 축소, 욕심 조절 등의 원리는 결국 시간의 질을 높이는 방법들이다. 이 원리들은 N잡러의 삶에서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에너지 소모를 줄이고 지속 가능성을 확보하는 데 유효하다.
<마일리지 아워>는 방법론적으로는 시간 관리를 다룬 자기계발서의 외형을 띠지만, 실질적으로는 현대인의 분절된 삶을 설명하는 철학적 에세이에 가깝다. 이 책은 더 많은 일을 하도록 독려하지 않고, 더 빠른 속도를 요구하지 않는다. 대신 시간의 구조를 재편성하여, 실패를 자산으로 이해하고, 욕심과 노력을 현실적으로 배분하며, 시간 선택의 기준을 자기 정의에서 시작하도록 안내한다. 이 책의 메시지는 다층적 삶을 살아내는 사람들에게 명확한 기준점을 제공한다. 역할이 많은 사람일수록 외부 요구보다 내부 기준이 필요하다는 점을 책은 반복적으로 환기시킨다. 결국 이 책이 가지는 가치는 “시간 관리 기술”에 있지 않다. 핵심은 자신의 시간과 삶을 다시 정의할 수 있는 사고의 틀을 제공한다는 점에 있다.
다층적 정체성을 지닌 현대인, 특히 N잡러의 삶을 살고 있는 이들에게 <마일리지 아워>는 시간이 곧 자기 자신이라는 단순한 명제를 다시 되새기게 하는 하나의 도구이자 안내서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