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들
이동원 지음 / 라곰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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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원 작가의 장편소설 얼굴들은 단순한 범죄 서사를 넘어, 인간의 비가시적 얼굴을 탐구하는 일종의 심리·사회적 해부도처럼 읽힌다. 책을 펼치자마자 느껴지는 압도적인 긴장감과 차가운 서술의 방식은, 우리가 일상 속에서 무심히 지나치는 평범한 악이 얼마나 다층적이고 모순적인지 되묻게 만든다.

 

책의 소개 문구는 이 작품의 핵심 세계관을 명징하게 제시한다. “돈과 명예에 눈이 먼 자, 타인의 고통에 무감한 자, 오직 자신의 쾌락에 굴복한 자, 선의 가면을 쓴 채 살아가는 평범한 악인들.” 이 문장은 인간의 악이 특별한 형태로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준다. 오히려 악은 익명적이고, 일상적이고, 때로는 정상성의 얼굴을 하고 우리 곁을 스며든다.

 

한국 속담에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있다. 현대 심리학에서는 이를 면역된 악성(惡性)의 심리또는 평범한 악(Banality of Evil)’로 설명해 왔다. 고전적인 범죄소설의 악인은 선명한 동기와 상징적 이미지를 가진 존재들이 많았지만, 얼굴들이 제시하는 악은 그러한 전형성을 벗어난다. 이 소설의 악인들은 우리와 동일한 언어를 쓰고, 같은 공간을 살아가며, 거의 구분되지 않는 일상성을 지닌 얼굴로 등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더 섬뜩하고, 더 현실적이다.

 

소설은 강렬한 사형 장면으로 시작해 독자를 긴장 속으로 끌어당긴다. 그러나 이 장면의 목적은 잔혹성의 표현이 아니다. ‘살인의 죄책을 느끼지 못하는 자라는 존재를 제시함으로써 인간이 도덕적으로 무너지는 방식의 기원을 묻는다. 이후 이어지는 장면들에서는 사건의 주변 인물들이 하나씩 등장하며, 그들의 욕망·침묵·회피·이기심이 교차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 작품 속 악의 얼굴들이 결코 특별하거나 극단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도덕적 무감각을 훈련해온 경찰, 명예와 권력을 위해 윤리를 포기한 교수, 타인을 파괴해도 죄책 없이 사라지는 대학생, 이 모든 삶을 관찰하며 글의 소재로 삼으려는 소설가까지 각자의 얼굴은 모두 다르지만, 결국 동일한 구조 속에서 움직인다.

 

특히 여경 광심이라는 인물은 이 소설의 주제를 관통하는 축이다. 타인의 고통에 무감한 그녀의 태도는 단순한 악의 전형이라기보다, 감정의 기능이 마모된 현대인의 초상처럼 읽힌다. 감정이 마모된 인간은 더 쉽게 타인을 도구화하고, 더 쉽게 윤리적 경계를 잃는다. 광심은 그런 의미에서 악의 개인적 형태라기보다, ‘악의 사회적 징후를 상징하는 존재다.

 

이 작품이 가진 흡입력은 단순한 범죄의 퍼즐을 맞추는 재미에 있지 않다. 오히려 인간의 내면을 파헤치는 서늘한 시선,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어두운 구조를 드러내는 방식에 있다. 등장인물 각각은 하나의 역할이라기보다, 다양한 인간성이 교차하는 장()이다. 악은 특정 주체에게 고정되지 않고 끊임없이 이동하고 전이되며, 서로 다른 얼굴을 쓰고 나타난다. 이 점은 작품을 사회적·철학적 독해로 확장하게 만든다.

 

문학이 할 수 있는 일 중 하나가, 보이지 않는 삶의 결을 드러내는 일이라면 __은 그 기능을 충실히 수행한다. 우리는 종종 자신의 삶과 큰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는 타인의 고통 앞에서 무심해지곤 한다. 그러나 이 소설은 그러한 무심함이 어떻게 다른 형태의 악과 연결되는지 보여주며, 독자에게 나는 어떤 얼굴로 살아가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또한 작품은 독자로 하여금 문학적 거리두기를 유지하면서도 깊은 감정적 긴장 속으로 침잠하게 만든다. 미스터리적 구조 위에 인간학적 질문을 겹쳐놓음으로써, 장르적 매혹과 사유의 깊이를 동시에 끌어낸 것이다.

 

__은 범죄소설의 외피를 쓰고 있지만, 그 본질은 인간의 윤리 구조와 사회적 모순을 탐구하는 인문학적 소설에 더 가깝다. 악은 특별한 존재의 전유물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일상 속에 잠복해 있는 가능성이라는 점을 환기한다. 우리는 어떤 얼굴로 타인을 대하는가? 우리는 어떤 얼굴로 사회 속에 존재하는가? 작품은 이 질문을 독자의 손에 쥐여주며, 서늘한 여운을 길게 남긴다.

 

얼굴들은 단순한 장르적 재미를 넘어, 인간을 들여다보는 하나의 깊은 창문 같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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