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여름 밤 산들바람에 하늘거리는 솜사탕처럼 가볍고 즐거운 로코네요. 이미 부부가 된 두 주인공이지만 분위기는 영원히 연애만 할 것 같이 상큼하고 달콤하기만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몬스터 던전인 시월드도 없고, 여주 등골에 빨대 꽂는 친정도 없으며, 삼각 내지 사각 관계 유발 빌런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남주와 여주가 사랑하고 투닥거리고 화해하고 서로를 이해하고 오해하는 부산스럽지만 평화로운 일상이 빙글빙글 춤추듯 펼쳐질 뿐입니다. 그러고 보면 작가님이 왜 Sixpence None the Richer의 Kiss Me를 BGM으로 택하셨는지 알겠네요. 가사의 "swing swing swing spinning step"이라는 구절이 특히 여주 캐릭터에 딱 들어맞거든요. 맑고 밝고 말 많고 맘 약하고 잘 속는 우리의 햇살 여주는 해맑은 바보처럼 보이긴 하죠. 하지만 사실 우리의 여주는 사람들의 경계심을 단숨에 부숴버리고 제가 추는 춤에 끌어들이고야 마는 마성의 소유자랍니다. 그리고 이 마성에 극도로 내향적인 남주까지 끌려들어가고 만 것이구요. 너무나 내향적이라 음험하기까지 한 남주가 두려워 하는 것은 여주가 자신과 함께 더 이상 춤춰주지 않는 미래죠. 그래서 제게서 벗어나지 못하게 온갖 계략으로 여주를 빙글빙글 돌리며 즐거워합니다. 하지만 결국 여주에게 영원히 잡혀 함께 춤춰야 하는 자신의 서글픈 현실을 자각하지 못한 바보이기도 하죠. 두 사람의 대학생활 에피소드가 더 길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지만 무척 특이한 캐릭터들의 재미난 연애담에 시간가는 줄 몰랐네요.
로맨스물을 보는 주된 이유는 천편일률적인 일상에서 벗어나 현실에 없는 존재(특히 멋지고 나만 알고 돈 많은 남자)나 특이한 사건들을 대리 체험하기 위함인데요. 그래서 생활감 100%인 현로는 아무리 명작이라도 대부분 몇 장 읽다 답답해서 덮어버리기 일쑤였죠. 박영님의 <오, 담에 핀 꽃>도 사실 처음엔 그 무시무시한 현실성 때문에 덮을까 말까 갈등했었네요. 실제로 가능한 빌런들이 가능한 한 가장 악랄한 방식으로 우리 주인공들을 괴롭히잖아요ㅠㅜㅠㅜ 그런데 밤고구마 수십개가 목구멍에 틀어박히는 갑갑함에 가슴을 치면서도 하아… 결국은 덮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남주와 여주의 서로를 향한 애틋한 마음이 한 두 모금의 사이다가 되어 고구마를 적셔주었기 때문이죠. 불행에 짓눌려 자존감뿐만 아니라 생존욕구마저 고장난 남주는 원래 사랑이 넘치는 열정적인 자질의 소유자에요. 어떤 사람이든 그의 장점만 보려고 노력하며, 어쩌다 받은 하찮은 호의까지도 절대 잊지 않고 몇 백 배, 몇 천 배로 갚고자 하니까요. 남주의 처참했던 어린 시절 처음으로 따스한 손을 내어주었던 존재가 여주였으니 남주의 숨막히는 인생에서 유일한 숨구멍이 여주가 될 수밖에 없는 거죠. 남주와 달리 여주는 화목한 가정에서 애정을 듬뿍 받으며 자랐죠. 사실 그냥 평범하게 화목하다고 말하기에도 한참 모자란, 사랑이 철철 끓어넘치는 가정입니다. 여주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제대로 사랑할 줄 아는 넘나 멋진 분들이거든요. 츤데레의 정석 같은 남동생은 여주의 든든한 지원군이죠. 이런 가족들 속에서 여주는 건강하게 사랑할 줄 아는 올바른 어른이 되었죠. 더 나아가 스토커의 만행에 꺾이거나 움추러들지 않고 맞서는 용기와 의지까지 갖췄습니다. 그런 여주 앞에 어느날 갑자기 어린 시절의 동생 친구가 이상형의 모습으로 나타나 굳어버린 마음을 흔들기 시작합니다. 사연 많은 두 주인공의 로맨스는 처음에는 물론 삐걱대기만 하죠. 남동생의 친구라는 배덕감, 각자의 열악한 사정 등의 현실적인 제약을 완전히 무시할 순 없으니까요. 그러나 두 사람의 의지와 용기 그리고 눈물은 차츰차츰 현실의 담벽을 뚫어버리네요. 마치 소설의제목을 그대로 옮긴 듯 이 둘의 사랑은 담 위의 꽃처럼 끈질기고 강인하며 간절하고 아름답게 피어납니다. 현실감 100%의 고구마에도 불구하고 이 독자가 결국 눈을 뗄 수 없었던 이유는 그 사랑의 판타지적인 아름다움 때문이었던 거죠.